
혁명의 여진이 전쟁이 되다
1979년 이란 혁명은 중동의 지정학적 판도를 한순간에 뒤흔들었습니다. 팔라비 왕정이 무너지고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공화국이 탄생하자, 주변 국가들은 불안에 휩싸였습니다. 혁명 정부는 “이슬람 혁명의 수출”을 공공연히 선언했고, 이란 내부에서는 군부 숙청과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습니다. 바로 이 틈을 노린 인물이 있었으니,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었습니다.
48화에서 살펴보았듯, 이란 혁명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중동 전체의 세력 균형을 근본적으로 재편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여진은 곧바로 20세기 중동에서 가장 길고 참혹한 두 차례의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과 걸프전(1990~1991)은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오늘날 중동 질서의 뼈대를 형성했습니다.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전쟁을 선택한 독재자
바트당과 사담의 권력 장악
이라크의 바트당(Ba’ath Party)은 아랍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한 세속 정당으로, 1968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이 당의 실질적 권력자였던 사담 후세인은 1979년 7월, 병약해진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 대통령을 밀어내고 공식적으로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취임 직후 그가 보여준 행보는 소름 끼칠 정도로 잔혹했습니다.
사담은 취임 며칠 만에 바트당 혁명지도위원회 특별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회의장에서 한 명의 “자백자”가 쿠데타 음모에 가담했다며 동료 당원 68명의 이름을 읽어 내려갔고, 호명된 이들은 하나씩 회의장 밖으로 끌려 나갔습니다. 이 중 22명이 즉결 처형되었습니다. 사담은 이 장면을 촬영해 전국에 배포함으로써 공포 정치의 서막을 알렸습니다. 그는 비밀경찰 무카바라트(Mukhabarat)를 강화하고, 군부와 관료 조직을 자신의 고향 티크리트 출신 측근들로 채웠습니다.
이라크의 전략적 계산
사담이 이란 침공을 결심한 배경에는 복합적인 동기가 얽혀 있었습니다. 첫째, 샤트알아랍(Shatt al-Arab) 수로 분쟁이었습니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합류해 페르시아만으로 흘러드는 이 수로는 양국의 핵심 석유 수출 통로였습니다. 1975년 알제 협정으로 이라크는 이 수로의 중앙선을 국경으로 인정했는데, 사담은 이란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이 “굴욕적 양보”를 되돌리고 싶었습니다.
둘째, 아랍 세계의 패권에 대한 야심이었습니다.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가 1978년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이스라엘과 단독 평화를 맺자, 아랍 연맹에서 축출되었습니다. 사담은 이 권력 공백을 메우고 자신이 아랍 세계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이란의 페르시아 민족주의에 맞선 아랍의 수호자를 자처한 것입니다.
셋째, 시아파 혁명의 전파에 대한 공포였습니다. 이라크 인구의 60~65%는 시아파 무슬림이었지만, 정치 권력은 수니파 소수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호메이니는 이라크의 시아파 주민들에게 봉기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고, 실제로 이라크 남부의 시아파 조직 다와당(Da’wa Party)이 사담 정권에 대한 저항 활동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사담은 1980년 4월 다와당의 지도자 무함마드 바키르 알사드르를 처형하는 것으로 응답했습니다.
넷째, 이란군의 와해라는 기회의 창이 열려 있었습니다. 혁명 후 이란 군부는 대규모 숙청을 겪었습니다. 팔라비 정권에 충성했던 장교 수천 명이 체포·처형·망명했고, 미국이 공급한 첨단 무기 체계의 정비와 부품 공급이 끊겼습니다. 사담은 이란이 군사적으로 가장 취약한 시점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 20세기의 1차 세계대전
침공의 시작: 1980년 9월
1980년 9월 17일, 사담 후세인은 텔레비전에 출연해 1975년 알제 협정의 파기를 선언하며 샤트알아랍 수로 전체에 대한 이라크의 주권을 주장했습니다. 5일 뒤인 9월 22일, 이라크 공군기들이 이란의 주요 공군 기지 10곳을 기습 폭격했습니다. 사담은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 공군을 지상에서 궤멸시킨 것을 모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이란 공군 기지들은 분산 배치되어 있었고, 방호벽이 설치되어 있었기에 피해는 제한적이었습니다.
같은 날 이라크 지상군 약 20만 명이 세 방면에서 이란 영토로 진격했습니다. 북부에서는 쿠르디스탄 지역, 중부에서는 메흐란과 데즐풀, 남부에서는 석유가 풍부한 후제스탄(Khuzestan) 주가 주요 목표였습니다. 후제스탄은 이란 석유 매장량의 90%가 집중된 곳이자, 아랍계 주민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사담은 이 지역의 아랍인들이 이라크군을 해방자로 환영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초기 이라크군의 진격은 순조로워 보였습니다. 후제스탄의 주요 도시 호람샤르르(Khorramshahr)를 향해 기갑 부대가 밀려 들어갔고, 아바단 정유 시설을 포위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심각한 오판이 드러났습니다. 첫째, 후제스탄의 아랍계 이란인들은 이라크군에 합류하는 대신 이란을 위해 싸웠습니다. 민족 정체성보다 국가 정체성이 강했던 것입니다. 둘째, 이란의 저항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호람샤르르 전투: “피의 도시”
호람샤르르 전투(1980년 9월~11월)는 이 전쟁의 성격을 예고하는 참혹한 서곡이었습니다. 인구 15만의 이 항구도시에서 이란 정규군, 혁명수비대(파스다란), 그리고 무장 시민들이 집집마다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습니다. 이라크군은 도시를 점령하는 데 34일이 걸렸고, 양측 합쳐 수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란인들은 이 도시를 “피의 도시(Khuninshahr)”라 불렀습니다.
이 전투는 전쟁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사담이 기대한 “빠른 승리”는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이란 국민들은 혁명 직후의 내부 분열을 잠시 접고 외세 침략에 맞서 단결했습니다.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이 전쟁을 “성전(지하드)”으로 규정하며 전 국민적 동원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혁명수비대(IRGC, 세파흐에 파스다란)는 기존 정규군과 별도로 급속히 확장되었고, 자원 민병대 바시즈(Basij)가 조직되어 수십만 명의 청년과 소년들이 전선으로 향했습니다.
전쟁의 교착과 참호전
1981년 말부터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의 서부 전선을 연상시키는 참호전 양상으로 변했습니다. 1,200킬로미터에 달하는 국경선을 따라 양측이 참호와 방어선을 구축하고, 몇 킬로미터의 땅을 놓고 수만 명이 목숨을 잃는 소모전이 반복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전투들은 그 규모와 잔혹함에서 세계를 경악시켰습니다.
이란의 인해전술(Human Wave Attacks)은 이 전쟁의 가장 논란적인 측면 중 하나였습니다. 이란은 장비와 기술에서 이라크에 밀렸지만, 인구에서는 세 배 가까운 우위를 점하고 있었습니다(이란 약 4,000만 대 이라크 약 1,500만). 혁명수비대와 바시즈 민병대는 종종 대규모 보병 돌격을 감행했습니다. 특히 논란이 된 것은 13~17세의 소년 바시즈 대원들이 전선에 투입된 것이었습니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이란측은 소년 병사들에게 플라스틱 열쇠(“천국의 열쇠”)를 목에 걸어주며 순교를 독려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의 정확한 범위와 맥락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지만, 미성년자의 전쟁 동원이 대규모로 이루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1982년은 전쟁의 흐름이 크게 바뀐 해였습니다. 5월, 이란군은 대규모 반격 작전 “예루살렘으로의 길(Beit ol-Moqaddas)”을 감행해 호람샤르르를 탈환했습니다. 이 작전에서 이라크군 약 19,000명이 포로로 잡혔고, 이란 국민들은 환호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사담은 휴전을 제안했으나, 호메이니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호메이니의 목표는 단순한 영토 회복이 아니라, 사담 정권의 제거와 이라크 시아파의 “해방”으로 확대되어 있었습니다.
1982년 7월, 이란군은 국경을 넘어 이라크 영토로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전쟁의 성격은 방어에서 공격으로, 그리고 이란이 침략자의 위치에 서는 것으로 역전되었습니다. 이라크군은 자국 영토에서 방어전을 치르며 더욱 결사적으로 저항했고, 국제사회의 시선도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화학무기의 악몽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가장 충격적인 측면은 이라크의 대규모 화학무기 사용이었습니다. 이라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장에서 화학무기를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1983년부터 이라크군은 겨자 가스(머스터드 가스), 타분(Tabun), 사린(Sarin) 등 다양한 신경작용제와 수포작용제를 이란군에 대해 사용했습니다.

화학무기 공격의 규모는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유엔 조사단은 이란 전선을 방문해 화학무기 사용의 증거를 직접 확인했고, 1984~1988년 사이 여러 차례 이라크의 화학무기 사용을 공식 확인하는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대응은 미온적이었습니다. 서방 국가들은 이란의 이슬람 혁명 수출을 더 큰 위협으로 간주했고, 이라크의 화학무기 사용에 대해 실질적인 제재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화학무기의 사용은 전장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1988년 3월 16일, 이라크 공군은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마을 할라브자(Halabja)에 화학무기를 투하했습니다. 이 공격으로 민간인 약 3,200~5,000명이 사망했으며, 수천 명이 장기적인 건강 피해를 입었습니다. 할라브자 학살은 사담 정권이 자국민인 쿠르드족에 대해 벌인 “안팔(Anfal) 작전”의 일환이었습니다. 안팔 작전은 1986~1989년 사이 진행된 체계적인 쿠르드족 학살 캠페인으로, 최소 5만~18만 명의 쿠르드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작전은 후에 국제사회에서 제노사이드(집단학살)로 인정되었습니다.
유조선 전쟁과 국제 개입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양측은 상대방의 경제적 생명선인 석유 수출을 차단하기 위한 “유조선 전쟁(Tanker War)”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1984년부터 이라크는 이란의 카르그 섬(Kharg Island) 석유 터미널을 향하는 유조선을 공격했고, 이란은 보복으로 페르시아만을 통과하는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조선을 공격했습니다(양국은 이라크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조선 전쟁은 페르시아만의 해상 안보를 위협했고, 세계 석유 공급에 직접적인 충격을 주었습니다. 1987~1988년 사이 약 546척의 선박이 공격을 받았고, 이 중 상당수가 중립국 선적이었습니다. 이 위협에 대응해 미국은 쿠웨이트 유조선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리플래깅(Reflagging)” 작전을 실시하고, 페르시아만에 대규모 해군 함대를 파견했습니다(“어니스트 윌 작전”, Operation Earnest Will).
미국의 개입은 사실상 이라크 편이었습니다. 이란 혁명과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1979~1981) 이후 미-이란 관계는 최악이었습니다. 미국은 이라크에 위성 정보를 제공했고, 이라크의 화학무기 사용을 알면서도 묵인했습니다. 동시에 이란에 대한 무기 금수를 유지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시기에 이란-콘트라 스캔들이 터졌습니다. 레이건 행정부의 일부 관리들이 비밀리에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고, 그 수익을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에게 전용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미국 중동 정책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1988년 7월 3일, 비극적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페르시아만에서 작전 중이던 미 해군 순양함 USS 빈센스(Vincennes)가 이란 민간 여객기 655편을 격추해 탑승자 290명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미국은 이 여객기를 이란 전투기로 오인했다고 주장했고, 이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이란 국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오늘날까지 이란-미국 불신의 근원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전쟁의 종결: “독배를 마시다”
1988년이 되자 양측 모두 극도의 피로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라크는 경제적으로 파탄 상태였고(전쟁 비용 약 5,610억 달러 추산), 이란 역시 국민 생활이 극도로 궁핍해졌습니다. 1988년 초 이라크군은 화학무기를 대량 투입한 반격으로 이란군을 이라크 영토에서 밀어냈고, 유조선 전쟁에서의 미국 개입은 이란에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결정적으로, 1988년 7월 이라크가 이란 도시들에 대한 개량형 스커드 미사일 공격(“도시 전쟁”)을 강화하면서, 이란 시민들의 공포와 염전 심리가 절정에 달했습니다. 1988년 7월 18일, 이란은 마침내 유엔 안보리 결의안 598호(1987년 7월 채택)의 수락을 선언했습니다. 호메이니는 이를 “독배를 마시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결정”이라 표현했습니다. 1988년 8월 20일, 공식 휴전이 발효되었습니다.
8년간의 전쟁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양측 합산 사망자는 약 50만~100만 명으로 추산되며(이란 측 사망자가 더 많음), 부상자는 수백만 명에 달했습니다. 국경선은 전쟁 전과 거의 동일하게 복원되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거대한 인명과 경제적 손실만 남긴 것입니다. 이라크는 약 800억 달러의 외채를 안게 되었고, 이 빚의 상당 부분을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에 지고 있었습니다. 이 재정적 압박이 바로 다음 전쟁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전간기(1988~1990): 전쟁에서 전쟁으로
사담의 딜레마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났을 때, 사담 후세인은 역설적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는 100만 명 규모의 세계 4위 군대를 보유한 중동 최강의 군사 강국 지도자였지만, 동시에 800억 달러의 빚더미에 앉아 있었습니다. 전쟁 중 이라크를 지원했던 걸프 아랍 국가들, 특히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에 진 빚이 막대했습니다.
사담은 이 빚이 탕감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논리는 이러했습니다 — 이라크는 시아파 혁명의 확산을 막기 위해 아랍 세계 전체를 대신해서 피를 흘렸으니, 걸프 국가들이 제공한 자금은 대출이 아니라 아랍 형제국에 대한 당연한 지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쿠웨이트는 채무 탕감을 거부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전후 석유 가격이 급락했습니다. 이라크는 국가 재건을 위해 높은 유가가 절실했는데, 쿠웨이트와 아랍에미리트가 OPEC 할당량을 초과 생산하며 유가를 끌어내리고 있었습니다. 사담은 쿠웨이트의 초과 생산이 이라크 경제를 의도적으로 파괴하려는 “경제 전쟁”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유가가 배럴당 1달러 떨어질 때마다 이라크는 연간 10억 달러의 수입을 잃었습니다.
쿠웨이트를 향한 도발
사담은 쿠웨이트에 대한 영토적 주장도 꺼내 들었습니다. 이라크는 역사적으로 쿠웨이트가 오스만 제국 시절 바스라 주(州)의 일부였으며, 영국 제국주의가 인위적으로 분리한 것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42화에서 살펴보았듯, 사이크스-피코 협정과 영국의 위임통치가 만들어낸 국경선은 이 지역의 영구적 분쟁 요인이 되었는데, 쿠웨이트의 경우가 바로 그 전형이었습니다.
1990년 7월,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었습니다. 사담은 쿠웨이트 국경 근처에 10만 명의 군대를 집결시켰습니다. 7월 25일, 미국 주이라크 대사 에이프릴 글라스피(April Glaspie)가 사담과 면담했습니다. 이 면담에서 글라스피는 “미국은 아랍 국가 간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는데, 사담은 이를 미국이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묵인하겠다는 신호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면담의 정확한 내용과 해석을 둘러싼 논쟁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걸프전의 서막: 쿠웨이트 침공(1990년 8월)
7시간 만의 정복
1990년 8월 2일 새벽 2시(현지 시각), 이라크군 10만 명이 쿠웨이트 국경을 넘었습니다. 쿠웨이트의 방위력은 이라크에 비해 압도적으로 열세였습니다. 쿠웨이트군은 약 16,000명에 불과했고, 이라크의 기갑 사단들이 밀려오는 것을 막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쿠웨이트 국왕 자비르 알사바흐와 왕족 대부분은 사우디아라비아로 탈출했고, 이라크군은 불과 7시간 만에 쿠웨이트 시 전체를 장악했습니다.
쿠웨이트의 저항이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스만 궁전에서는 자비르 국왕의 동생 파하드 알사바흐 왕세자가 경비대를 이끌고 최후까지 저항하다 전사했습니다. 일부 쿠웨이트 공군 조종사들은 전투기를 몰고 출격해 이라크군에 맞섰고, 여러 군부대가 산발적으로 교전했습니다. 그러나 압도적인 병력 차이 앞에서 조직적 저항은 하루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8월 8일, 사담은 쿠웨이트를 이라크의 19번째 주(州)로 합병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라크군은 쿠웨이트를 점령한 후 체계적인 약탈과 인권 유린을 자행했습니다. 쿠웨이트 시민들에 대한 자의적 체포, 고문, 처형이 이어졌고, 쿠웨이트의 인프라와 문화재가 조직적으로 파괴·약탈되었습니다. 이라크군은 쿠웨이트의 병원 인큐베이터까지 약탈했다는 증언이 미 의회에서 나오기도 했는데, 이 “인큐베이터 증언”은 나중에 쿠웨이트 대사의 딸이 홍보 회사의 코칭을 받아 행한 것으로 밝혀져 전쟁 프로파간다의 대표적 사례가 되었습니다.

세계의 반응: 전례 없는 국제 연합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냉전 종식과 맞물려 전례 없는 국제적 단결을 이끌어냈습니다. 소련이 미국과 대립하던 냉전 시대였다면 유엔 안보리가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웠겠지만,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소련은 미국과 협조적 입장을 취했습니다. 중국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유엔 안보리는 침공 당일인 8월 2일 결의안 660호를 채택해 이라크의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이후 몇 주간 추가 결의안이 잇따랐습니다.
- 결의안 661호(8월 6일): 이라크에 대한 포괄적 경제 제재(식품과 의약품 제외)
- 결의안 665호(8월 25일): 해상 봉쇄 허가
- 결의안 678호(11월 29일): 1991년 1월 15일까지 이라크가 철수하지 않으면 “필요한 모든 수단”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가맹국에 권한 부여
미국의 조지 H. W. 부시(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34개국으로 구성된 다국적 연합군을 조직했습니다. 이 연합의 구성은 냉전 후 새로운 국제 질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같은 서방 국가들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시리아, 모로코 등 아랍 국가들도 참여했습니다. 특히 시리아의 참여는 주목할 만했습니다. 시리아의 하페즈 알아사드 대통령은 같은 바트당 계열이면서도 사담과 숙적 관계였고, 이 기회를 이용해 서방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습니다.
반면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야세르 아라파트는 이라크 편에 서거나 중립적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 선택은 후에 양국/조직에 큰 외교적 비용을 치르게 됩니다. 쿠웨이트는 전쟁 후 자국 내 팔레스타인 노동자 수십만 명을 추방했고, 걸프 국가들의 PLO 지원이 크게 줄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군 주둔의 파장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 후, 사우디아라비아는 다음 목표가 될 수 있다는 공포에 빠졌습니다. 이라크군이 쿠웨이트-사우디 국경에 대규모로 배치된 상황에서, 사우디는 미국에 군사적 보호를 요청했습니다. 1990년 8월 7일, 미국은 “사막의 방패(Operation Desert Shield)” 작전을 발동해 사우디아라비아에 대규모 병력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군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둔은 중동 역사에서 거대한 파장을 일으킨 결정이었습니다. 이슬람 최고의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두 성지의 수호자의 땅”에 수십만 명의 비무슬림 군대가 주둔한다는 사실은 많은 무슬림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사우디 정부는 이 결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무프티(최고 이슬람 법학자)로부터 파트와(종교적 판결)를 얻어냈지만, 반발은 거셌습니다.
가장 격렬하게 반발한 인물 중 하나가 오사마 빈 라덴이었습니다. 사우디 출신의 부유한 청년으로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과 싸운 경험이 있던 그는, 사우디 왕실에 “이슬람 전사들로 이라크를 물리칠 수 있으니 미군 주둔은 불필요하다”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했습니다. 미군의 사우디 주둔은 빈 라덴이 사우디 왕실과 미국을 동시에 적으로 규정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분노는 훗날 알카에다의 반미 테러로 이어지게 됩니다.
걸프전: 사막의 폭풍(1991년 1~2월)
최후통첩과 개전
1991년 1월 15일 자정, 유엔 결의안 678호가 정한 최후통첩 기한이 만료되었습니다. 사담 후세인은 철수를 거부했습니다. 그의 계산은 여러 가지였을 것입니다. 첫째,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8년간 버텨낸 경험이 있는 이라크군은 연합군에도 충분히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 둘째, 미국이 “또 하나의 베트남”을 두려워해 지상전을 회피할 것이라는 기대. 셋째, 아랍 민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이 위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습니다.
1991년 1월 17일 새벽(바그다드 시각), 다국적 연합군의 “사막의 폭풍(Operation Desert Storm)”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CNN을 통해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중계된 최초의 전쟁이었습니다. 바그다드 하늘을 수놓은 대공포 화망과 정밀유도무기의 섬광은 텔레비전 역사에 남을 장면이 되었습니다.
38일간의 공중전
연합군의 공중 작전은 그 규모와 정밀도에서 전쟁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첫 24시간 동안 약 1,000회 이상의 출격이 이루어졌고, 전쟁 기간 총 10만 회 이상의 출격이 실시되었습니다. 공중전의 핵심 목표는 세 단계로 구분되었습니다.
1단계: 전략적 공습 — 이라크의 방공망, 지휘통제 체계, 통신 시설, 전력 인프라, 핵/화학/생물학무기 시설을 파괴했습니다. F-117 스텔스 전폭기와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이 선봉에 섰습니다. 이라크의 통합 방공 체계는 개전 초기에 사실상 무력화되었습니다.
2단계: 쿠웨이트 전역 공중 우세 확보 — 이라크 공군 기지와 비행장을 타격하고,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이라크 공군은 거의 교전을 시도하지 못했고, 일부 조종사들은 전투기를 몰고 이란으로 도피했습니다(이란은 이 항공기들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3단계: 쿠웨이트 점령군 타격 — 쿠웨이트와 남부 이라크에 배치된 이라크 지상군을 집중 폭격했습니다. B-52 전략폭격기가 이라크군 진지를 융단폭격했고, A-10 공격기가 이라크 기갑부대를 집중 타격했습니다.
이 공중전에서 사용된 정밀유도무기의 비율은 전체 투하 폭탄의 약 7~8%에 불과했지만, 텔레비전 화면에서 보여준 “수술적 정밀 타격”의 이미지는 전쟁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텔레비전 화면보다 훨씬 복잡했습니다. 비유도 폭탄(이른바 “덤 밤”)이 투하량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민간 피해도 적지 않았습니다. 1991년 2월 13일, 바그다드의 아미리야 방공호에 미군 폭탄이 명중해 민간인 약 408명이 사망한 사건은 전쟁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스커드 미사일과 이스라엘
사담 후세인은 전쟁의 판도를 뒤집기 위한 전략적 도발을 시도했습니다. 이라크군은 스커드(Scud) 탄도미사일을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를 향해 발사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의 목적은 명확했습니다 — 이스라엘이 보복 공격을 감행하면,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같은 편에서 아랍 형제국을 공격할 수 없다”며 연합에서 이탈할 것이라는 계산이었습니다.
이 전략은 교묘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해 전례 없이 강력한 자제 요청을 했고, 이스라엘에 패트리엇(Patriot) 미사일 방어 체계를 급파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샤미르 총리는 극도의 자제력을 발휘해 보복을 자제했고, 이는 연합군의 결속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이었습니다. 다만 패트리엇 미사일의 실제 요격 성공률은 당시 발표된 것보다 훨씬 낮았다는 것이 후에 밝혀졌습니다.
스커드 미사일은 군사적으로는 정밀도가 낮아 큰 피해를 주지 못했지만, 심리적 공포는 상당했습니다. 특히 1991년 2월 25일, 사우디아라비아 다란(Dhahran)의 미군 막사에 스커드 미사일이 명중해 미군 28명이 전사한 사건은 전쟁 중 연합군이 겪은 단일 최대 인명 피해였습니다.
100시간의 지상전
38일간의 공중전으로 이라크군의 전투력이 크게 약화된 후, 1991년 2월 24일 새벽 4시(현지 시각), 지상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다국적 연합군 총사령관 노먼 슈워츠코프(Norman Schwarzkopf) 장군은 “왼쪽 갈고리(Left Hook)”로 불리는 대담한 우회 기동 전략을 실행했습니다.
이 전략의 핵심은 이중 기만이었습니다. 정면에서는 미 해병대와 아랍 연합군이 쿠웨이트를 향해 직접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실제 주공은 훨씬 서쪽으로 우회해 이라크 남부 사막을 가로질러 이라크군의 배후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미 제7군단(VII Corps)의 중(重)기갑부대가 이 우회 기동의 핵심이었고, 프랑스 6사단과 미 101공수사단이 최서단에서 이라크군의 퇴로를 차단했습니다.
결과는 압도적이었습니다. 이라크군의 방어선은 공중 폭격으로 이미 사기가 바닥난 상태였고, 연합군의 기갑부대가 밀어닥치자 대규모 항복이 이어졌습니다. 쿠웨이트 전선에서는 미 해병대가 예상보다 빠르게 돌파했고, 서쪽 우회 부대는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Republican Guard)의 정예 기갑사단들과 충돌해 이를 격파했습니다.
73이스팅 전투(Battle of 73 Easting, 2월 26일)는 지상전의 대표적 교전으로 기록됩니다. 미 제2기갑기병연대가 이라크 타왈카나(Tawakalna) 사단과 조우해, 모래 폭풍 속에서 벌어진 기갑전에서 이라크 전차 수십 대를 파괴하며 승리했습니다. 미군의 M1A1 에이브럼스 전차와 이라크의 소련제 T-72 전차의 기술적 격차는 압도적이었고, 열영상 조준 장치를 갖춘 미군 전차는 모래 폭풍 속에서도 적을 먼저 발견하고 사격할 수 있었습니다.
지상전 개시 100시간 만인 2월 28일 오전 8시, 부시 대통령은 일방적 정전을 선언했습니다. 이라크군은 쿠웨이트에서 완전히 축출되었고, 남부 이라크의 상당 부분이 연합군에 의해 점령되었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숫자로도 극명했습니다. 연합군 전사자는 약 292명(미군 148명)이었던 반면, 이라크 측 사망자는 2만~3만 5천 명으로 추산되었습니다. 이라크 포로는 약 8만 명에 달했습니다.
“죽음의 고속도로”
전쟁의 가장 논란적인 장면 중 하나는 이른바 “죽음의 고속도로(Highway of Death)”였습니다. 쿠웨이트에서 바스라로 이어지는 80번 고속도로에서 철수하던 이라크군 차량 행렬이 연합군 공군의 집중 폭격을 받아 완전히 파괴된 것입니다. 수 킬로미터에 걸쳐 불타고 부서진 군용 차량, 트럭, 탱크, 그리고 약탈한 민간 물품을 가득 실은 차량들이 널브러진 이 광경은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전쟁의 윤리적 문제를 부각시켰습니다. 퇴각하는 적군에 대한 이 정도의 무력 사용이 정당한가, 그리고 많은 차량에 징집병이나 강제 동원된 군인들이 타고 있었다는 점에서 과도한 살상이 아니었는가 하는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예상보다 빨리 정전을 선언한 배경에는 이 장면이 만들어낸 여론의 압력도 있었습니다.

전쟁 후의 혼란: 봉기와 진압
남부 시아파와 북부 쿠르드의 봉기
걸프전이 끝난 직후, 사담 정권은 예상 밖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1991년 3월, 이라크 남부의 시아파 주민들과 북부의 쿠르드족이 동시에 대규모 봉기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 봉기에는 부시 대통령의 발언이 촉매 역할을 했습니다. 전쟁 중 부시는 이라크 국민들에게 “스스로의 운명을 자기 손에 쥐라”고 촉구했고, 많은 이라크인들은 이를 미국이 봉기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으로 해석했습니다.
남부에서는 바스라를 중심으로 시아파 반군이 정부 건물을 점거하고 바트당 관리들을 처형했습니다. 북부에서는 쿠르드 페시메르가(Peshmerga) 전사들이 키르쿠크와 술라이마니야를 포함한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습니다. 한때 이라크 18개 주 중 14개가 사담의 통제를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연합군은 봉기를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전략적 계산은 복잡했습니다. 첫째, 이라크가 완전히 분열되면 이란의 영향력이 남부 시아파 지역을 통해 확대될 수 있었습니다. 둘째, 쿠르드족의 독립은 튀르키예의 쿠르드 문제를 자극할 수 있었습니다(튀르키예는 NATO 동맹국이자 연합군 참여국이었습니다). 셋째, 사우디아라비아와 걸프 국가들도 시아파 세력의 확장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연합군이 방관하는 사이, 사담은 정예 공화국 수비대를 투입해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했습니다. 전쟁 정전 조건에서 고정익 항공기의 사용은 금지되었지만, 헬리콥터는 허용되어 있었습니다(연합군이 이 허점을 의도적으로 방치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이라크 공격 헬리콥터들이 반군 진지를 공격했고, 지상군이 도시와 마을을 초토화했습니다. 남부에서는 시아파 봉기가 수 주 내에 진압되었고, 사담의 보복은 처참했습니다. 시아파 성지와 습지대(마시 아랍, Marsh Arabs)가 파괴되었고, 수천 명이 처형당했습니다.
북부 쿠르드 지역에서도 이라크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약 150만~200만 명의 쿠르드 민간인이 튀르키예와 이란 국경으로 피난했습니다. 산악 지대에서 겨울 추위와 굶주림에 노출된 난민들의 참상이 텔레비전을 통해 보도되면서 국제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이에 미국, 영국, 프랑스는 “안식처 제공(Operation Provide Comfort)” 작전을 실시해 이라크 북부 36도선 이북에 비행금지구역(No-Fly Zone)을 설정했습니다. 이후 남부 32도선 이남에도 비행금지구역이 추가 설정되었습니다. 이 조치는 쿠르드 자치 지역의 사실상의 독립적 운영을 가능하게 한 출발점이었습니다.
경제 제재의 그늘
걸프전 이후 이라크에 부과된 유엔 경제 제재는 1990년부터 2003년까지 13년간 지속되었으며, 그 인도주의적 비용은 막대했습니다. 제재의 목적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 폐기를 강제하는 것이었지만, 가장 큰 피해는 민간인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의약품과 의료 장비의 부족, 수처리 시설의 노후화로 인한 수인성 질병의 확산, 영양실조 등으로 특히 영유아 사망률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유니세프는 1990년대 이라크의 5세 미만 아동 사망률이 제재 이전에 비해 크게 상승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정확한 수치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지만, 수만에서 수십만 명의 이라크 민간인이 제재의 직간접적 영향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산됩니다. 1996년에 도입된 “석유-식량 교환(Oil-for-Food)” 프로그램은 상황을 일부 완화했지만, 사담 정권이 이 프로그램을 조작해 자신의 권력 기반 유지에 활용한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습니다.
이라크 제재는 국제사회에서 광범위한 제재(comprehensive sanctions)의 인도주의적 비용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를 촉발했습니다. 많은 비평가들은 제재가 독재자가 아닌 민간인을 벌하는 것이라고 비판했고, 이후 유엔은 “스마트 제재(smart sanctions)” — 정권 핵심 인사와 군사 물자에만 초점을 맞추는 표적 제재 — 로 방향을 전환하게 됩니다.
두 전쟁이 중동에 남긴 유산
지정학적 재편
이란-이라크 전쟁과 걸프전은 중동의 지정학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재편했습니다. 몇 가지 핵심적인 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미국의 중동 군사 주둔이 영구화되었습니다. 걸프전 이전 미국은 중동에 대규모 상시 주둔군이 없었습니다. 걸프전 이후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등에 군사 기지를 유지했고, 이라크의 비행금지구역을 감시하기 위한 항시적 군사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이 주둔은 중동 정치의 핵심 변수가 되었고, 반미 감정과 극단주의의 성장에도 기여했습니다.
둘째, 이라크는 사실상 봉쇄 국가가 되었습니다. 비행금지구역, 경제 제재, 무기 사찰(UNSCOM/UNMOVIC)의 삼중 압박 아래 이라크는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담 정권은 놀라운 생존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내부 탄압과 부족/종파 권력 구조를 교묘히 활용해 13년간 더 집권했습니다.
셋째, 이란의 전략적 위치가 역설적으로 강화되었습니다. 이란의 최대 지역 적수였던 이라크가 전쟁과 제재로 약화되면서, 이란은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공간을 얻었습니다. 특히 이라크 남부의 시아파 네트워크와의 연결이 강화되었고, 레바논의 헤즈볼라를 통한 레반트 지역으로의 영향력 투사도 계속되었습니다.
넷째, 걸프 아랍 국가들의 안보 의존성이 심화되었습니다. 쿠웨이트의 경험은 소국들이 자체 방위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고, 걸프협력회의(GCC) 국가들은 미국과의 양자 안보 협정을 강화했습니다. 이 안보 의존은 오늘날까지 걸프 지역 정치의 기본 구조입니다.
국제법과 전쟁의 규범에 미친 영향
이 두 전쟁은 국제법과 무력 사용의 규범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라크의 화학무기 사용은 화학무기금지협약(CWC, 1993년 체결, 1997년 발효)의 제정을 촉진했습니다. 걸프전은 유엔 안보리가 집단 안보 메커니즘을 실질적으로 작동시킨 냉전 후 최초의 사례로, “새로운 세계 질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동시에, 걸프전 이후의 상황은 그 한계도 드러냈습니다. 안보리 결의로 시작된 전쟁이 이라크 민간인의 대규모 고통(제재)과 내부 봉기 진압의 방관으로 이어진 것은, 국제 개입의 선택성과 일관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전쟁 기술의 혁명
걸프전은 군사 기술의 혁명적 전환점으로 널리 인용됩니다. 정밀유도무기, 스텔스 기술, 위성 항법(GPS), 실시간 전장 정보 체계 등이 대규모로 실전에 투입된 최초의 전쟁이었습니다. 연합군과 이라크군 사이의 기술적 격차는 충격적이었고, 이는 세계 각국의 군사 교리와 국방 정책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걸프전의 “깨끗한 전쟁” 이미지는 과장된 측면이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정밀유도무기의 비율은 전체의 약 7~8%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전통적 비유도 폭탄이었습니다. 열화우라늄(DU) 탄의 사용은 이라크 남부와 쿠웨이트에 장기적 환경오염과 건강 피해를 남겼고, 연합군 참전 병사들의 “걸프전 증후군”도 논란이 되었습니다.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이 후퇴하며 방화한 유정 약 700개의 화재는 수개월간 계속되어 생태학적 재앙을 초래했습니다.
아랍 정치의 변화
걸프전은 아랍 세계의 정치 지형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라크 편에 섰던 요르단과 PLO는 걸프 국가들로부터 경제적·외교적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쿠웨이트에 거주하던 팔레스타인 노동자 약 30만~40만 명이 추방되었고, 예멘 역시 유엔에서 이라크 제재에 반대표를 던진 대가로 사우디로부터 약 80만 명의 예멘인 노동자가 추방당하는 경제적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 위기는 아랍 연대(Arab solidarity)의 신화를 깨뜨렸습니다. 아랍 국가가 아랍 국가를 침략하고, 아랍 국가들이 서방 군대를 불러 같은 아랍 국가를 공격한 것은 범아랍주의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나세르주의 시대(47화 참조)의 아랍 통합 이상은 이미 퇴색해가고 있었지만, 걸프전은 그 마지막 잔재마저 청산한 사건이었습니다.
극단주의의 씨앗
앞서 언급했듯, 미군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둔은 이슬람 극단주의 운동에 결정적인 동력을 제공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은 1990년대 내내 “두 성지의 땅에서 십자군을 몰아내라”는 메시지를 반복했고, 1996년에는 미국에 대한 “전쟁 선포”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1998년에는 이집트의 아이만 알자와히리와 함께 “유대인과 십자군에 대한 지하드를 위한 세계이슬람전선”을 결성하며 미국 민간인도 공격 대상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걸프전에서 미국이 보여준 압도적 군사력은 역설적으로 비대칭 전쟁(asymmetric warfare)과 테러리즘의 논리를 강화했습니다. 재래식 군사력으로는 미국에 대항할 수 없다는 인식이, 테러를 “약자의 무기”로 정당화하는 극단주의 논리와 결합한 것입니다. 이 흐름은 2001년 9·11 테러로 이어지게 되며, 이는 다시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연결됩니다.
기억해야 할 목소리들
전쟁의 인간적 비용
두 전쟁의 통계는 그 자체로 충격적이지만, 숫자 뒤에는 개인의 비극이 있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란 측 사망자는 약 18만~50만 명, 이라크 측은 10만~37만 5천 명으로 추산됩니다. 부상자, 실종자, 포로를 합치면 양측 합산 200만 명 이상이 직접적 피해를 입었습니다. 걸프전에서의 이라크 측 사망자는 2만~3만 5천 명, 쿠웨이트 민간인 사망자는 약 1,000명으로 추산됩니다.
이란에는 오늘날 “성스러운 방어(Defa-e Moqaddas)”라 불리는 이란-이라크 전쟁의 기억이 국가 정체성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전국에 전사자 추모비가 세워져 있고, 전쟁 관련 기념일은 국가 행사로 치러집니다. 이라크에서는 전쟁의 기억이 더 복잡합니다. 사담 정권은 이란-이라크 전쟁을 “카디시야(Qadisiyyah) 전투”에 비유하며 아랍의 승리로 선전했지만(카디시야는 636년 아랍 무슬림 군대가 사산조 페르시아를 꺾은 전투), 평범한 이라크인들에게 이 전쟁은 무의미한 파괴의 기억일 뿐이었습니다.
쿠웨이트에서는 1990년 8월 2일이 국가적 트라우마의 날짜입니다. 7개월간의 점령 동안 약 600명의 쿠웨이트 시민이 실종되었고(이들 중 다수는 이라크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 체계적인 고문과 처형이 자행되었습니다. 쿠웨이트는 매년 2월 25일을 “해방의 날(Liberation Day)”로, 2월 26일을 “국민의 날”로 기념합니다.
화학무기 피해자들
이란-이라크 전쟁의 화학무기 피해자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수십 년간 고통받고 있습니다. 이란 정부는 화학무기 공격 생존자 수를 약 10만 명으로 추산하며, 이들 중 상당수가 만성 호흡기 질환, 피부 질환, 안과 질환, 신경계 장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할라브자의 쿠르드족 생존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화학무기 피해의 장기적 건강 영향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진행 중이며, 세대를 넘어 유전적 영향이 나타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역사적 교훈: 전쟁은 누구의 목적에 봉사했는가
독재자의 전쟁, 민중의 고통
이란-이라크 전쟁과 걸프전이 남긴 가장 뼈아픈 교훈은, 전쟁의 결정은 권력자가 하지만 그 대가는 민중이 치른다는 사실입니다. 사담 후세인의 두 차례의 전쟁 도발 — 이란 침공과 쿠웨이트 침공 — 은 모두 한 독재자의 야심과 오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란 역시 호람샤르르 탈환 후 휴전을 받아들이는 대신 이라크 영토로 진격하는 선택을 함으로써 6년의 추가 전쟁과 수십만 명의 추가 희생을 초래했습니다.
국제사회의 역할도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 동안 서방 국가들과 소련은 양측 모두에 무기를 판매하며 전쟁을 부추겼습니다. 미국은 이라크의 화학무기 사용을 알면서도 묵인했고, 걸프전 이후에는 봉기한 이라크 국민들을 방관하며 학살에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어진 13년간의 경제 제재는 사담이 아닌 이라크 민간인들을 벌했습니다.
미완의 전쟁, 반복되는 비극
걸프전은 흔히 “미완의 전쟁(Unfinished War)”으로 불립니다. 사담 정권을 제거하지 않은 채 전쟁을 끝냄으로써, 이라크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다음 세대로 이월되었습니다. 비행금지구역, 무기 사찰, 경제 제재라는 “봉쇄(containment)” 전략은 13년간 유지되었지만, 궁극적으로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리고 2003년 전쟁과 그 이후의 혼란은 걸프전보다 훨씬 더 파괴적인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란-이라크 전쟁의 유산 역시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쟁은 이란의 정치 문화에 깊이 각인되어, 혁명수비대(IRGC)의 정치적·경제적 영향력 확대와 안보 우선주의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이라크에서는 전쟁과 제재로 파괴된 사회 인프라와 종파 간 불신이 2003년 이후의 내전과 IS(이슬람국가)의 부상을 위한 토양이 되었습니다.
이 두 전쟁은 결국 하나의 연속된 서사입니다. 1979년 이란 혁명이 촉발한 지정학적 불안정이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이 전쟁의 경제적 후유증이 걸프전으로, 걸프전의 미완의 결말이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이어지는 인과의 사슬입니다. 중동 현대사를 이해하려면 이 사슬의 각 고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마무리: 전쟁 너머의 중동
1980년부터 1991년까지, 중동은 두 차례의 대규모 전쟁으로 피로 물들었습니다. 이 전쟁들은 수백만 명의 삶을 파괴했고, 중동의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재편했으며, 그 여파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시아파-수니파 경쟁 구도를 심화시켰고, 걸프전은 미국의 중동 군사 주둔을 영구화하며 새로운 갈등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들만이 1980~90년대 중동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고, 레바논은 15년간의 내전(1975~1990)의 상처를 봉합하고 있었으며,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소련 철수 후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걸프전 이후의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오슬로 평화 프로세스라는 희망의 불꽃이 잠시 타올랐습니다.
다음 화에서는 오슬로 합의와 중동 평화 프로세스의 희망과 좌절,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현재를 살펴보겠습니다. 전쟁의 연속 속에서도 평화를 향한 시도는 계속되었고, 그 성공과 실패의 교훈은 오늘날의 중동을 이해하는 데 여전히 핵심적입니다.
이미지는 Leonardo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이미지는 Claude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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