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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역사] 49/52화: 이란-이라크 전쟁과 걸프전: 중동을 피로 물들인 두 전쟁

이란-이라크 전쟁과 걸프전 시대의 페르시아만

혁명의 여진이 전쟁이 되다

1979년 이란 혁명은 중동의 지정학적 판도를 한순간에 뒤흔들었습니다. 팔라비 왕정이 무너지고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공화국이 탄생하자, 주변 국가들은 불안에 휩싸였습니다. 혁명 정부는 “이슬람 혁명의 수출”을 공공연히 선언했고, 이란 내부에서는 군부 숙청과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습니다. 바로 이 틈을 노린 인물이 있었으니,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었습니다.

48화에서 살펴보았듯, 이란 혁명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중동 전체의 세력 균형을 근본적으로 재편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여진은 곧바로 20세기 중동에서 가장 길고 참혹한 두 차례의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과 걸프전(1990~1991)은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오늘날 중동 질서의 뼈대를 형성했습니다.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전쟁을 선택한 독재자

바트당과 사담의 권력 장악

이라크의 바트당(Ba’ath Party)은 아랍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한 세속 정당으로, 1968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이 당의 실질적 권력자였던 사담 후세인은 1979년 7월, 병약해진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 대통령을 밀어내고 공식적으로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취임 직후 그가 보여준 행보는 소름 끼칠 정도로 잔혹했습니다.

사담은 취임 며칠 만에 바트당 혁명지도위원회 특별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회의장에서 한 명의 “자백자”가 쿠데타 음모에 가담했다며 동료 당원 68명의 이름을 읽어 내려갔고, 호명된 이들은 하나씩 회의장 밖으로 끌려 나갔습니다. 이 중 22명이 즉결 처형되었습니다. 사담은 이 장면을 촬영해 전국에 배포함으로써 공포 정치의 서막을 알렸습니다. 그는 비밀경찰 무카바라트(Mukhabarat)를 강화하고, 군부와 관료 조직을 자신의 고향 티크리트 출신 측근들로 채웠습니다.

이라크의 전략적 계산

사담이 이란 침공을 결심한 배경에는 복합적인 동기가 얽혀 있었습니다. 첫째, 샤트알아랍(Shatt al-Arab) 수로 분쟁이었습니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합류해 페르시아만으로 흘러드는 이 수로는 양국의 핵심 석유 수출 통로였습니다. 1975년 알제 협정으로 이라크는 이 수로의 중앙선을 국경으로 인정했는데, 사담은 이란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이 “굴욕적 양보”를 되돌리고 싶었습니다.

둘째, 아랍 세계의 패권에 대한 야심이었습니다.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가 1978년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이스라엘과 단독 평화를 맺자, 아랍 연맹에서 축출되었습니다. 사담은 이 권력 공백을 메우고 자신이 아랍 세계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이란의 페르시아 민족주의에 맞선 아랍의 수호자를 자처한 것입니다.

셋째, 시아파 혁명의 전파에 대한 공포였습니다. 이라크 인구의 60~65%는 시아파 무슬림이었지만, 정치 권력은 수니파 소수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호메이니는 이라크의 시아파 주민들에게 봉기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고, 실제로 이라크 남부의 시아파 조직 다와당(Da’wa Party)이 사담 정권에 대한 저항 활동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사담은 1980년 4월 다와당의 지도자 무함마드 바키르 알사드르를 처형하는 것으로 응답했습니다.

넷째, 이란군의 와해라는 기회의 창이 열려 있었습니다. 혁명 후 이란 군부는 대규모 숙청을 겪었습니다. 팔라비 정권에 충성했던 장교 수천 명이 체포·처형·망명했고, 미국이 공급한 첨단 무기 체계의 정비와 부품 공급이 끊겼습니다. 사담은 이란이 군사적으로 가장 취약한 시점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 주요 전선과 작전 지도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 20세기의 1차 세계대전

침공의 시작: 1980년 9월

1980년 9월 17일, 사담 후세인은 텔레비전에 출연해 1975년 알제 협정의 파기를 선언하며 샤트알아랍 수로 전체에 대한 이라크의 주권을 주장했습니다. 5일 뒤인 9월 22일, 이라크 공군기들이 이란의 주요 공군 기지 10곳을 기습 폭격했습니다. 사담은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 공군을 지상에서 궤멸시킨 것을 모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이란 공군 기지들은 분산 배치되어 있었고, 방호벽이 설치되어 있었기에 피해는 제한적이었습니다.

같은 날 이라크 지상군 약 20만 명이 세 방면에서 이란 영토로 진격했습니다. 북부에서는 쿠르디스탄 지역, 중부에서는 메흐란과 데즐풀, 남부에서는 석유가 풍부한 후제스탄(Khuzestan) 주가 주요 목표였습니다. 후제스탄은 이란 석유 매장량의 90%가 집중된 곳이자, 아랍계 주민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사담은 이 지역의 아랍인들이 이라크군을 해방자로 환영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초기 이라크군의 진격은 순조로워 보였습니다. 후제스탄의 주요 도시 호람샤르르(Khorramshahr)를 향해 기갑 부대가 밀려 들어갔고, 아바단 정유 시설을 포위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심각한 오판이 드러났습니다. 첫째, 후제스탄의 아랍계 이란인들은 이라크군에 합류하는 대신 이란을 위해 싸웠습니다. 민족 정체성보다 국가 정체성이 강했던 것입니다. 둘째, 이란의 저항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호람샤르르 전투: “피의 도시”

호람샤르르 전투(1980년 9월~11월)는 이 전쟁의 성격을 예고하는 참혹한 서곡이었습니다. 인구 15만의 이 항구도시에서 이란 정규군, 혁명수비대(파스다란), 그리고 무장 시민들이 집집마다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습니다. 이라크군은 도시를 점령하는 데 34일이 걸렸고, 양측 합쳐 수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란인들은 이 도시를 “피의 도시(Khuninshahr)”라 불렀습니다.

이 전투는 전쟁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사담이 기대한 “빠른 승리”는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이란 국민들은 혁명 직후의 내부 분열을 잠시 접고 외세 침략에 맞서 단결했습니다.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이 전쟁을 “성전(지하드)”으로 규정하며 전 국민적 동원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혁명수비대(IRGC, 세파흐에 파스다란)는 기존 정규군과 별도로 급속히 확장되었고, 자원 민병대 바시즈(Basij)가 조직되어 수십만 명의 청년과 소년들이 전선으로 향했습니다.

전쟁의 교착과 참호전

1981년 말부터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의 서부 전선을 연상시키는 참호전 양상으로 변했습니다. 1,200킬로미터에 달하는 국경선을 따라 양측이 참호와 방어선을 구축하고, 몇 킬로미터의 땅을 놓고 수만 명이 목숨을 잃는 소모전이 반복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전투들은 그 규모와 잔혹함에서 세계를 경악시켰습니다.

이란의 인해전술(Human Wave Attacks)은 이 전쟁의 가장 논란적인 측면 중 하나였습니다. 이란은 장비와 기술에서 이라크에 밀렸지만, 인구에서는 세 배 가까운 우위를 점하고 있었습니다(이란 약 4,000만 대 이라크 약 1,500만). 혁명수비대와 바시즈 민병대는 종종 대규모 보병 돌격을 감행했습니다. 특히 논란이 된 것은 13~17세의 소년 바시즈 대원들이 전선에 투입된 것이었습니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이란측은 소년 병사들에게 플라스틱 열쇠(“천국의 열쇠”)를 목에 걸어주며 순교를 독려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의 정확한 범위와 맥락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지만, 미성년자의 전쟁 동원이 대규모로 이루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1982년은 전쟁의 흐름이 크게 바뀐 해였습니다. 5월, 이란군은 대규모 반격 작전 “예루살렘으로의 길(Beit ol-Moqaddas)”을 감행해 호람샤르르를 탈환했습니다. 이 작전에서 이라크군 약 19,000명이 포로로 잡혔고, 이란 국민들은 환호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사담은 휴전을 제안했으나, 호메이니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호메이니의 목표는 단순한 영토 회복이 아니라, 사담 정권의 제거와 이라크 시아파의 “해방”으로 확대되어 있었습니다.

1982년 7월, 이란군은 국경을 넘어 이라크 영토로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전쟁의 성격은 방어에서 공격으로, 그리고 이란이 침략자의 위치에 서는 것으로 역전되었습니다. 이라크군은 자국 영토에서 방어전을 치르며 더욱 결사적으로 저항했고, 국제사회의 시선도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화학무기의 악몽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가장 충격적인 측면은 이라크의 대규모 화학무기 사용이었습니다. 이라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장에서 화학무기를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1983년부터 이라크군은 겨자 가스(머스터드 가스), 타분(Tabun), 사린(Sarin) 등 다양한 신경작용제와 수포작용제를 이란군에 대해 사용했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 화학무기 사용의 비극

화학무기 공격의 규모는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유엔 조사단은 이란 전선을 방문해 화학무기 사용의 증거를 직접 확인했고, 1984~1988년 사이 여러 차례 이라크의 화학무기 사용을 공식 확인하는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대응은 미온적이었습니다. 서방 국가들은 이란의 이슬람 혁명 수출을 더 큰 위협으로 간주했고, 이라크의 화학무기 사용에 대해 실질적인 제재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화학무기의 사용은 전장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1988년 3월 16일, 이라크 공군은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마을 할라브자(Halabja)에 화학무기를 투하했습니다. 이 공격으로 민간인 약 3,200~5,000명이 사망했으며, 수천 명이 장기적인 건강 피해를 입었습니다. 할라브자 학살은 사담 정권이 자국민인 쿠르드족에 대해 벌인 “안팔(Anfal) 작전”의 일환이었습니다. 안팔 작전은 1986~1989년 사이 진행된 체계적인 쿠르드족 학살 캠페인으로, 최소 5만~18만 명의 쿠르드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작전은 후에 국제사회에서 제노사이드(집단학살)로 인정되었습니다.

유조선 전쟁과 국제 개입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양측은 상대방의 경제적 생명선인 석유 수출을 차단하기 위한 “유조선 전쟁(Tanker War)”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1984년부터 이라크는 이란의 카르그 섬(Kharg Island) 석유 터미널을 향하는 유조선을 공격했고, 이란은 보복으로 페르시아만을 통과하는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조선을 공격했습니다(양국은 이라크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조선 전쟁은 페르시아만의 해상 안보를 위협했고, 세계 석유 공급에 직접적인 충격을 주었습니다. 1987~1988년 사이 약 546척의 선박이 공격을 받았고, 이 중 상당수가 중립국 선적이었습니다. 이 위협에 대응해 미국은 쿠웨이트 유조선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리플래깅(Reflagging)” 작전을 실시하고, 페르시아만에 대규모 해군 함대를 파견했습니다(“어니스트 윌 작전”, Operation Earnest Will).

미국의 개입은 사실상 이라크 편이었습니다. 이란 혁명과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1979~1981) 이후 미-이란 관계는 최악이었습니다. 미국은 이라크에 위성 정보를 제공했고, 이라크의 화학무기 사용을 알면서도 묵인했습니다. 동시에 이란에 대한 무기 금수를 유지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시기에 이란-콘트라 스캔들이 터졌습니다. 레이건 행정부의 일부 관리들이 비밀리에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고, 그 수익을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에게 전용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미국 중동 정책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1988년 7월 3일, 비극적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페르시아만에서 작전 중이던 미 해군 순양함 USS 빈센스(Vincennes)가 이란 민간 여객기 655편을 격추해 탑승자 290명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미국은 이 여객기를 이란 전투기로 오인했다고 주장했고, 이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이란 국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오늘날까지 이란-미국 불신의 근원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전쟁의 종결: “독배를 마시다”

1988년이 되자 양측 모두 극도의 피로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라크는 경제적으로 파탄 상태였고(전쟁 비용 약 5,610억 달러 추산), 이란 역시 국민 생활이 극도로 궁핍해졌습니다. 1988년 초 이라크군은 화학무기를 대량 투입한 반격으로 이란군을 이라크 영토에서 밀어냈고, 유조선 전쟁에서의 미국 개입은 이란에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결정적으로, 1988년 7월 이라크가 이란 도시들에 대한 개량형 스커드 미사일 공격(“도시 전쟁”)을 강화하면서, 이란 시민들의 공포와 염전 심리가 절정에 달했습니다. 1988년 7월 18일, 이란은 마침내 유엔 안보리 결의안 598호(1987년 7월 채택)의 수락을 선언했습니다. 호메이니는 이를 “독배를 마시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결정”이라 표현했습니다. 1988년 8월 20일, 공식 휴전이 발효되었습니다.

8년간의 전쟁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양측 합산 사망자는 약 50만~100만 명으로 추산되며(이란 측 사망자가 더 많음), 부상자는 수백만 명에 달했습니다. 국경선은 전쟁 전과 거의 동일하게 복원되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거대한 인명과 경제적 손실만 남긴 것입니다. 이라크는 약 800억 달러의 외채를 안게 되었고, 이 빚의 상당 부분을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에 지고 있었습니다. 이 재정적 압박이 바로 다음 전쟁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전간기(1988~1990): 전쟁에서 전쟁으로

사담의 딜레마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났을 때, 사담 후세인은 역설적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는 100만 명 규모의 세계 4위 군대를 보유한 중동 최강의 군사 강국 지도자였지만, 동시에 800억 달러의 빚더미에 앉아 있었습니다. 전쟁 중 이라크를 지원했던 걸프 아랍 국가들, 특히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에 진 빚이 막대했습니다.

사담은 이 빚이 탕감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논리는 이러했습니다 — 이라크는 시아파 혁명의 확산을 막기 위해 아랍 세계 전체를 대신해서 피를 흘렸으니, 걸프 국가들이 제공한 자금은 대출이 아니라 아랍 형제국에 대한 당연한 지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쿠웨이트는 채무 탕감을 거부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전후 석유 가격이 급락했습니다. 이라크는 국가 재건을 위해 높은 유가가 절실했는데, 쿠웨이트와 아랍에미리트가 OPEC 할당량을 초과 생산하며 유가를 끌어내리고 있었습니다. 사담은 쿠웨이트의 초과 생산이 이라크 경제를 의도적으로 파괴하려는 “경제 전쟁”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유가가 배럴당 1달러 떨어질 때마다 이라크는 연간 10억 달러의 수입을 잃었습니다.

쿠웨이트를 향한 도발

사담은 쿠웨이트에 대한 영토적 주장도 꺼내 들었습니다. 이라크는 역사적으로 쿠웨이트가 오스만 제국 시절 바스라 주(州)의 일부였으며, 영국 제국주의가 인위적으로 분리한 것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42화에서 살펴보았듯, 사이크스-피코 협정과 영국의 위임통치가 만들어낸 국경선은 이 지역의 영구적 분쟁 요인이 되었는데, 쿠웨이트의 경우가 바로 그 전형이었습니다.

1990년 7월,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었습니다. 사담은 쿠웨이트 국경 근처에 10만 명의 군대를 집결시켰습니다. 7월 25일, 미국 주이라크 대사 에이프릴 글라스피(April Glaspie)가 사담과 면담했습니다. 이 면담에서 글라스피는 “미국은 아랍 국가 간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는데, 사담은 이를 미국이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묵인하겠다는 신호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면담의 정확한 내용과 해석을 둘러싼 논쟁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걸프전의 서막: 쿠웨이트 침공(1990년 8월)

7시간 만의 정복

1990년 8월 2일 새벽 2시(현지 시각), 이라크군 10만 명이 쿠웨이트 국경을 넘었습니다. 쿠웨이트의 방위력은 이라크에 비해 압도적으로 열세였습니다. 쿠웨이트군은 약 16,000명에 불과했고, 이라크의 기갑 사단들이 밀려오는 것을 막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쿠웨이트 국왕 자비르 알사바흐와 왕족 대부분은 사우디아라비아로 탈출했고, 이라크군은 불과 7시간 만에 쿠웨이트 시 전체를 장악했습니다.

쿠웨이트의 저항이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스만 궁전에서는 자비르 국왕의 동생 파하드 알사바흐 왕세자가 경비대를 이끌고 최후까지 저항하다 전사했습니다. 일부 쿠웨이트 공군 조종사들은 전투기를 몰고 출격해 이라크군에 맞섰고, 여러 군부대가 산발적으로 교전했습니다. 그러나 압도적인 병력 차이 앞에서 조직적 저항은 하루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8월 8일, 사담은 쿠웨이트를 이라크의 19번째 주(州)로 합병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라크군은 쿠웨이트를 점령한 후 체계적인 약탈과 인권 유린을 자행했습니다. 쿠웨이트 시민들에 대한 자의적 체포, 고문, 처형이 이어졌고, 쿠웨이트의 인프라와 문화재가 조직적으로 파괴·약탈되었습니다. 이라크군은 쿠웨이트의 병원 인큐베이터까지 약탈했다는 증언이 미 의회에서 나오기도 했는데, 이 “인큐베이터 증언”은 나중에 쿠웨이트 대사의 딸이 홍보 회사의 코칭을 받아 행한 것으로 밝혀져 전쟁 프로파간다의 대표적 사례가 되었습니다.

걸프전 주요 타임라인과 연합군 구성

세계의 반응: 전례 없는 국제 연합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냉전 종식과 맞물려 전례 없는 국제적 단결을 이끌어냈습니다. 소련이 미국과 대립하던 냉전 시대였다면 유엔 안보리가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웠겠지만,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소련은 미국과 협조적 입장을 취했습니다. 중국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유엔 안보리는 침공 당일인 8월 2일 결의안 660호를 채택해 이라크의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이후 몇 주간 추가 결의안이 잇따랐습니다.

  • 결의안 661호(8월 6일): 이라크에 대한 포괄적 경제 제재(식품과 의약품 제외)
  • 결의안 665호(8월 25일): 해상 봉쇄 허가
  • 결의안 678호(11월 29일): 1991년 1월 15일까지 이라크가 철수하지 않으면 “필요한 모든 수단”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가맹국에 권한 부여

미국의 조지 H. W. 부시(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34개국으로 구성된 다국적 연합군을 조직했습니다. 이 연합의 구성은 냉전 후 새로운 국제 질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같은 서방 국가들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시리아, 모로코 등 아랍 국가들도 참여했습니다. 특히 시리아의 참여는 주목할 만했습니다. 시리아의 하페즈 알아사드 대통령은 같은 바트당 계열이면서도 사담과 숙적 관계였고, 이 기회를 이용해 서방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습니다.

반면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야세르 아라파트는 이라크 편에 서거나 중립적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 선택은 후에 양국/조직에 큰 외교적 비용을 치르게 됩니다. 쿠웨이트는 전쟁 후 자국 내 팔레스타인 노동자 수십만 명을 추방했고, 걸프 국가들의 PLO 지원이 크게 줄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군 주둔의 파장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 후, 사우디아라비아는 다음 목표가 될 수 있다는 공포에 빠졌습니다. 이라크군이 쿠웨이트-사우디 국경에 대규모로 배치된 상황에서, 사우디는 미국에 군사적 보호를 요청했습니다. 1990년 8월 7일, 미국은 “사막의 방패(Operation Desert Shield)” 작전을 발동해 사우디아라비아에 대규모 병력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군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둔은 중동 역사에서 거대한 파장을 일으킨 결정이었습니다. 이슬람 최고의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두 성지의 수호자의 땅”에 수십만 명의 비무슬림 군대가 주둔한다는 사실은 많은 무슬림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사우디 정부는 이 결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무프티(최고 이슬람 법학자)로부터 파트와(종교적 판결)를 얻어냈지만, 반발은 거셌습니다.

가장 격렬하게 반발한 인물 중 하나가 오사마 빈 라덴이었습니다. 사우디 출신의 부유한 청년으로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과 싸운 경험이 있던 그는, 사우디 왕실에 “이슬람 전사들로 이라크를 물리칠 수 있으니 미군 주둔은 불필요하다”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했습니다. 미군의 사우디 주둔은 빈 라덴이 사우디 왕실과 미국을 동시에 적으로 규정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분노는 훗날 알카에다의 반미 테러로 이어지게 됩니다.

걸프전: 사막의 폭풍(1991년 1~2월)

최후통첩과 개전

1991년 1월 15일 자정, 유엔 결의안 678호가 정한 최후통첩 기한이 만료되었습니다. 사담 후세인은 철수를 거부했습니다. 그의 계산은 여러 가지였을 것입니다. 첫째,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8년간 버텨낸 경험이 있는 이라크군은 연합군에도 충분히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 둘째, 미국이 “또 하나의 베트남”을 두려워해 지상전을 회피할 것이라는 기대. 셋째, 아랍 민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이 위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습니다.

1991년 1월 17일 새벽(바그다드 시각), 다국적 연합군의 “사막의 폭풍(Operation Desert Storm)”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CNN을 통해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중계된 최초의 전쟁이었습니다. 바그다드 하늘을 수놓은 대공포 화망과 정밀유도무기의 섬광은 텔레비전 역사에 남을 장면이 되었습니다.

38일간의 공중전

연합군의 공중 작전은 그 규모와 정밀도에서 전쟁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첫 24시간 동안 약 1,000회 이상의 출격이 이루어졌고, 전쟁 기간 총 10만 회 이상의 출격이 실시되었습니다. 공중전의 핵심 목표는 세 단계로 구분되었습니다.

1단계: 전략적 공습 — 이라크의 방공망, 지휘통제 체계, 통신 시설, 전력 인프라, 핵/화학/생물학무기 시설을 파괴했습니다. F-117 스텔스 전폭기와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이 선봉에 섰습니다. 이라크의 통합 방공 체계는 개전 초기에 사실상 무력화되었습니다.

2단계: 쿠웨이트 전역 공중 우세 확보 — 이라크 공군 기지와 비행장을 타격하고,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이라크 공군은 거의 교전을 시도하지 못했고, 일부 조종사들은 전투기를 몰고 이란으로 도피했습니다(이란은 이 항공기들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3단계: 쿠웨이트 점령군 타격 — 쿠웨이트와 남부 이라크에 배치된 이라크 지상군을 집중 폭격했습니다. B-52 전략폭격기가 이라크군 진지를 융단폭격했고, A-10 공격기가 이라크 기갑부대를 집중 타격했습니다.

이 공중전에서 사용된 정밀유도무기의 비율은 전체 투하 폭탄의 약 7~8%에 불과했지만, 텔레비전 화면에서 보여준 “수술적 정밀 타격”의 이미지는 전쟁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텔레비전 화면보다 훨씬 복잡했습니다. 비유도 폭탄(이른바 “덤 밤”)이 투하량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민간 피해도 적지 않았습니다. 1991년 2월 13일, 바그다드의 아미리야 방공호에 미군 폭탄이 명중해 민간인 약 408명이 사망한 사건은 전쟁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스커드 미사일과 이스라엘

사담 후세인은 전쟁의 판도를 뒤집기 위한 전략적 도발을 시도했습니다. 이라크군은 스커드(Scud) 탄도미사일을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를 향해 발사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의 목적은 명확했습니다 — 이스라엘이 보복 공격을 감행하면,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같은 편에서 아랍 형제국을 공격할 수 없다”며 연합에서 이탈할 것이라는 계산이었습니다.

이 전략은 교묘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해 전례 없이 강력한 자제 요청을 했고, 이스라엘에 패트리엇(Patriot) 미사일 방어 체계를 급파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샤미르 총리는 극도의 자제력을 발휘해 보복을 자제했고, 이는 연합군의 결속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이었습니다. 다만 패트리엇 미사일의 실제 요격 성공률은 당시 발표된 것보다 훨씬 낮았다는 것이 후에 밝혀졌습니다.

스커드 미사일은 군사적으로는 정밀도가 낮아 큰 피해를 주지 못했지만, 심리적 공포는 상당했습니다. 특히 1991년 2월 25일, 사우디아라비아 다란(Dhahran)의 미군 막사에 스커드 미사일이 명중해 미군 28명이 전사한 사건은 전쟁 중 연합군이 겪은 단일 최대 인명 피해였습니다.

100시간의 지상전

38일간의 공중전으로 이라크군의 전투력이 크게 약화된 후, 1991년 2월 24일 새벽 4시(현지 시각), 지상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다국적 연합군 총사령관 노먼 슈워츠코프(Norman Schwarzkopf) 장군은 “왼쪽 갈고리(Left Hook)”로 불리는 대담한 우회 기동 전략을 실행했습니다.

이 전략의 핵심은 이중 기만이었습니다. 정면에서는 미 해병대와 아랍 연합군이 쿠웨이트를 향해 직접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실제 주공은 훨씬 서쪽으로 우회해 이라크 남부 사막을 가로질러 이라크군의 배후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미 제7군단(VII Corps)의 중(重)기갑부대가 이 우회 기동의 핵심이었고, 프랑스 6사단과 미 101공수사단이 최서단에서 이라크군의 퇴로를 차단했습니다.

결과는 압도적이었습니다. 이라크군의 방어선은 공중 폭격으로 이미 사기가 바닥난 상태였고, 연합군의 기갑부대가 밀어닥치자 대규모 항복이 이어졌습니다. 쿠웨이트 전선에서는 미 해병대가 예상보다 빠르게 돌파했고, 서쪽 우회 부대는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Republican Guard)의 정예 기갑사단들과 충돌해 이를 격파했습니다.

73이스팅 전투(Battle of 73 Easting, 2월 26일)는 지상전의 대표적 교전으로 기록됩니다. 미 제2기갑기병연대가 이라크 타왈카나(Tawakalna) 사단과 조우해, 모래 폭풍 속에서 벌어진 기갑전에서 이라크 전차 수십 대를 파괴하며 승리했습니다. 미군의 M1A1 에이브럼스 전차와 이라크의 소련제 T-72 전차의 기술적 격차는 압도적이었고, 열영상 조준 장치를 갖춘 미군 전차는 모래 폭풍 속에서도 적을 먼저 발견하고 사격할 수 있었습니다.

지상전 개시 100시간 만인 2월 28일 오전 8시, 부시 대통령은 일방적 정전을 선언했습니다. 이라크군은 쿠웨이트에서 완전히 축출되었고, 남부 이라크의 상당 부분이 연합군에 의해 점령되었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숫자로도 극명했습니다. 연합군 전사자는 약 292명(미군 148명)이었던 반면, 이라크 측 사망자는 2만~3만 5천 명으로 추산되었습니다. 이라크 포로는 약 8만 명에 달했습니다.

“죽음의 고속도로”

전쟁의 가장 논란적인 장면 중 하나는 이른바 “죽음의 고속도로(Highway of Death)”였습니다. 쿠웨이트에서 바스라로 이어지는 80번 고속도로에서 철수하던 이라크군 차량 행렬이 연합군 공군의 집중 폭격을 받아 완전히 파괴된 것입니다. 수 킬로미터에 걸쳐 불타고 부서진 군용 차량, 트럭, 탱크, 그리고 약탈한 민간 물품을 가득 실은 차량들이 널브러진 이 광경은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전쟁의 윤리적 문제를 부각시켰습니다. 퇴각하는 적군에 대한 이 정도의 무력 사용이 정당한가, 그리고 많은 차량에 징집병이나 강제 동원된 군인들이 타고 있었다는 점에서 과도한 살상이 아니었는가 하는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예상보다 빨리 정전을 선언한 배경에는 이 장면이 만들어낸 여론의 압력도 있었습니다.

걸프전 후 쿠웨이트 유정 화재와 죽음의 고속도로

전쟁 후의 혼란: 봉기와 진압

남부 시아파와 북부 쿠르드의 봉기

걸프전이 끝난 직후, 사담 정권은 예상 밖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1991년 3월, 이라크 남부의 시아파 주민들과 북부의 쿠르드족이 동시에 대규모 봉기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 봉기에는 부시 대통령의 발언이 촉매 역할을 했습니다. 전쟁 중 부시는 이라크 국민들에게 “스스로의 운명을 자기 손에 쥐라”고 촉구했고, 많은 이라크인들은 이를 미국이 봉기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으로 해석했습니다.

남부에서는 바스라를 중심으로 시아파 반군이 정부 건물을 점거하고 바트당 관리들을 처형했습니다. 북부에서는 쿠르드 페시메르가(Peshmerga) 전사들이 키르쿠크와 술라이마니야를 포함한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습니다. 한때 이라크 18개 주 중 14개가 사담의 통제를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연합군은 봉기를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전략적 계산은 복잡했습니다. 첫째, 이라크가 완전히 분열되면 이란의 영향력이 남부 시아파 지역을 통해 확대될 수 있었습니다. 둘째, 쿠르드족의 독립은 튀르키예의 쿠르드 문제를 자극할 수 있었습니다(튀르키예는 NATO 동맹국이자 연합군 참여국이었습니다). 셋째, 사우디아라비아와 걸프 국가들도 시아파 세력의 확장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연합군이 방관하는 사이, 사담은 정예 공화국 수비대를 투입해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했습니다. 전쟁 정전 조건에서 고정익 항공기의 사용은 금지되었지만, 헬리콥터는 허용되어 있었습니다(연합군이 이 허점을 의도적으로 방치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이라크 공격 헬리콥터들이 반군 진지를 공격했고, 지상군이 도시와 마을을 초토화했습니다. 남부에서는 시아파 봉기가 수 주 내에 진압되었고, 사담의 보복은 처참했습니다. 시아파 성지와 습지대(마시 아랍, Marsh Arabs)가 파괴되었고, 수천 명이 처형당했습니다.

북부 쿠르드 지역에서도 이라크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약 150만~200만 명의 쿠르드 민간인이 튀르키예와 이란 국경으로 피난했습니다. 산악 지대에서 겨울 추위와 굶주림에 노출된 난민들의 참상이 텔레비전을 통해 보도되면서 국제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이에 미국, 영국, 프랑스는 “안식처 제공(Operation Provide Comfort)” 작전을 실시해 이라크 북부 36도선 이북에 비행금지구역(No-Fly Zone)을 설정했습니다. 이후 남부 32도선 이남에도 비행금지구역이 추가 설정되었습니다. 이 조치는 쿠르드 자치 지역의 사실상의 독립적 운영을 가능하게 한 출발점이었습니다.

경제 제재의 그늘

걸프전 이후 이라크에 부과된 유엔 경제 제재는 1990년부터 2003년까지 13년간 지속되었으며, 그 인도주의적 비용은 막대했습니다. 제재의 목적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 폐기를 강제하는 것이었지만, 가장 큰 피해는 민간인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의약품과 의료 장비의 부족, 수처리 시설의 노후화로 인한 수인성 질병의 확산, 영양실조 등으로 특히 영유아 사망률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유니세프는 1990년대 이라크의 5세 미만 아동 사망률이 제재 이전에 비해 크게 상승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정확한 수치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지만, 수만에서 수십만 명의 이라크 민간인이 제재의 직간접적 영향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산됩니다. 1996년에 도입된 “석유-식량 교환(Oil-for-Food)” 프로그램은 상황을 일부 완화했지만, 사담 정권이 이 프로그램을 조작해 자신의 권력 기반 유지에 활용한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습니다.

이라크 제재는 국제사회에서 광범위한 제재(comprehensive sanctions)의 인도주의적 비용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를 촉발했습니다. 많은 비평가들은 제재가 독재자가 아닌 민간인을 벌하는 것이라고 비판했고, 이후 유엔은 “스마트 제재(smart sanctions)” — 정권 핵심 인사와 군사 물자에만 초점을 맞추는 표적 제재 — 로 방향을 전환하게 됩니다.

두 전쟁이 중동에 남긴 유산

지정학적 재편

이란-이라크 전쟁과 걸프전은 중동의 지정학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재편했습니다. 몇 가지 핵심적인 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미국의 중동 군사 주둔이 영구화되었습니다. 걸프전 이전 미국은 중동에 대규모 상시 주둔군이 없었습니다. 걸프전 이후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등에 군사 기지를 유지했고, 이라크의 비행금지구역을 감시하기 위한 항시적 군사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이 주둔은 중동 정치의 핵심 변수가 되었고, 반미 감정과 극단주의의 성장에도 기여했습니다.

둘째, 이라크는 사실상 봉쇄 국가가 되었습니다. 비행금지구역, 경제 제재, 무기 사찰(UNSCOM/UNMOVIC)의 삼중 압박 아래 이라크는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담 정권은 놀라운 생존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내부 탄압과 부족/종파 권력 구조를 교묘히 활용해 13년간 더 집권했습니다.

셋째, 이란의 전략적 위치가 역설적으로 강화되었습니다. 이란의 최대 지역 적수였던 이라크가 전쟁과 제재로 약화되면서, 이란은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공간을 얻었습니다. 특히 이라크 남부의 시아파 네트워크와의 연결이 강화되었고, 레바논의 헤즈볼라를 통한 레반트 지역으로의 영향력 투사도 계속되었습니다.

넷째, 걸프 아랍 국가들의 안보 의존성이 심화되었습니다. 쿠웨이트의 경험은 소국들이 자체 방위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고, 걸프협력회의(GCC) 국가들은 미국과의 양자 안보 협정을 강화했습니다. 이 안보 의존은 오늘날까지 걸프 지역 정치의 기본 구조입니다.

국제법과 전쟁의 규범에 미친 영향

이 두 전쟁은 국제법과 무력 사용의 규범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라크의 화학무기 사용은 화학무기금지협약(CWC, 1993년 체결, 1997년 발효)의 제정을 촉진했습니다. 걸프전은 유엔 안보리가 집단 안보 메커니즘을 실질적으로 작동시킨 냉전 후 최초의 사례로, “새로운 세계 질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동시에, 걸프전 이후의 상황은 그 한계도 드러냈습니다. 안보리 결의로 시작된 전쟁이 이라크 민간인의 대규모 고통(제재)과 내부 봉기 진압의 방관으로 이어진 것은, 국제 개입의 선택성과 일관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전쟁 기술의 혁명

걸프전은 군사 기술의 혁명적 전환점으로 널리 인용됩니다. 정밀유도무기, 스텔스 기술, 위성 항법(GPS), 실시간 전장 정보 체계 등이 대규모로 실전에 투입된 최초의 전쟁이었습니다. 연합군과 이라크군 사이의 기술적 격차는 충격적이었고, 이는 세계 각국의 군사 교리와 국방 정책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걸프전의 “깨끗한 전쟁” 이미지는 과장된 측면이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정밀유도무기의 비율은 전체의 약 7~8%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전통적 비유도 폭탄이었습니다. 열화우라늄(DU) 탄의 사용은 이라크 남부와 쿠웨이트에 장기적 환경오염과 건강 피해를 남겼고, 연합군 참전 병사들의 “걸프전 증후군”도 논란이 되었습니다.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이 후퇴하며 방화한 유정 약 700개의 화재는 수개월간 계속되어 생태학적 재앙을 초래했습니다.

아랍 정치의 변화

걸프전은 아랍 세계의 정치 지형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라크 편에 섰던 요르단과 PLO는 걸프 국가들로부터 경제적·외교적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쿠웨이트에 거주하던 팔레스타인 노동자 약 30만~40만 명이 추방되었고, 예멘 역시 유엔에서 이라크 제재에 반대표를 던진 대가로 사우디로부터 약 80만 명의 예멘인 노동자가 추방당하는 경제적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 위기는 아랍 연대(Arab solidarity)의 신화를 깨뜨렸습니다. 아랍 국가가 아랍 국가를 침략하고, 아랍 국가들이 서방 군대를 불러 같은 아랍 국가를 공격한 것은 범아랍주의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나세르주의 시대(47화 참조)의 아랍 통합 이상은 이미 퇴색해가고 있었지만, 걸프전은 그 마지막 잔재마저 청산한 사건이었습니다.

극단주의의 씨앗

앞서 언급했듯, 미군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둔은 이슬람 극단주의 운동에 결정적인 동력을 제공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은 1990년대 내내 “두 성지의 땅에서 십자군을 몰아내라”는 메시지를 반복했고, 1996년에는 미국에 대한 “전쟁 선포”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1998년에는 이집트의 아이만 알자와히리와 함께 “유대인과 십자군에 대한 지하드를 위한 세계이슬람전선”을 결성하며 미국 민간인도 공격 대상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걸프전에서 미국이 보여준 압도적 군사력은 역설적으로 비대칭 전쟁(asymmetric warfare)과 테러리즘의 논리를 강화했습니다. 재래식 군사력으로는 미국에 대항할 수 없다는 인식이, 테러를 “약자의 무기”로 정당화하는 극단주의 논리와 결합한 것입니다. 이 흐름은 2001년 9·11 테러로 이어지게 되며, 이는 다시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연결됩니다.

기억해야 할 목소리들

전쟁의 인간적 비용

두 전쟁의 통계는 그 자체로 충격적이지만, 숫자 뒤에는 개인의 비극이 있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란 측 사망자는 약 18만~50만 명, 이라크 측은 10만~37만 5천 명으로 추산됩니다. 부상자, 실종자, 포로를 합치면 양측 합산 200만 명 이상이 직접적 피해를 입었습니다. 걸프전에서의 이라크 측 사망자는 2만~3만 5천 명, 쿠웨이트 민간인 사망자는 약 1,000명으로 추산됩니다.

이란에는 오늘날 “성스러운 방어(Defa-e Moqaddas)”라 불리는 이란-이라크 전쟁의 기억이 국가 정체성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전국에 전사자 추모비가 세워져 있고, 전쟁 관련 기념일은 국가 행사로 치러집니다. 이라크에서는 전쟁의 기억이 더 복잡합니다. 사담 정권은 이란-이라크 전쟁을 “카디시야(Qadisiyyah) 전투”에 비유하며 아랍의 승리로 선전했지만(카디시야는 636년 아랍 무슬림 군대가 사산조 페르시아를 꺾은 전투), 평범한 이라크인들에게 이 전쟁은 무의미한 파괴의 기억일 뿐이었습니다.

쿠웨이트에서는 1990년 8월 2일이 국가적 트라우마의 날짜입니다. 7개월간의 점령 동안 약 600명의 쿠웨이트 시민이 실종되었고(이들 중 다수는 이라크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 체계적인 고문과 처형이 자행되었습니다. 쿠웨이트는 매년 2월 25일을 “해방의 날(Liberation Day)”로, 2월 26일을 “국민의 날”로 기념합니다.

화학무기 피해자들

이란-이라크 전쟁의 화학무기 피해자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수십 년간 고통받고 있습니다. 이란 정부는 화학무기 공격 생존자 수를 약 10만 명으로 추산하며, 이들 중 상당수가 만성 호흡기 질환, 피부 질환, 안과 질환, 신경계 장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할라브자의 쿠르드족 생존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화학무기 피해의 장기적 건강 영향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진행 중이며, 세대를 넘어 유전적 영향이 나타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역사적 교훈: 전쟁은 누구의 목적에 봉사했는가

독재자의 전쟁, 민중의 고통

이란-이라크 전쟁과 걸프전이 남긴 가장 뼈아픈 교훈은, 전쟁의 결정은 권력자가 하지만 그 대가는 민중이 치른다는 사실입니다. 사담 후세인의 두 차례의 전쟁 도발 — 이란 침공과 쿠웨이트 침공 — 은 모두 한 독재자의 야심과 오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란 역시 호람샤르르 탈환 후 휴전을 받아들이는 대신 이라크 영토로 진격하는 선택을 함으로써 6년의 추가 전쟁과 수십만 명의 추가 희생을 초래했습니다.

국제사회의 역할도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 동안 서방 국가들과 소련은 양측 모두에 무기를 판매하며 전쟁을 부추겼습니다. 미국은 이라크의 화학무기 사용을 알면서도 묵인했고, 걸프전 이후에는 봉기한 이라크 국민들을 방관하며 학살에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어진 13년간의 경제 제재는 사담이 아닌 이라크 민간인들을 벌했습니다.

미완의 전쟁, 반복되는 비극

걸프전은 흔히 “미완의 전쟁(Unfinished War)”으로 불립니다. 사담 정권을 제거하지 않은 채 전쟁을 끝냄으로써, 이라크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다음 세대로 이월되었습니다. 비행금지구역, 무기 사찰, 경제 제재라는 “봉쇄(containment)” 전략은 13년간 유지되었지만, 궁극적으로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리고 2003년 전쟁과 그 이후의 혼란은 걸프전보다 훨씬 더 파괴적인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란-이라크 전쟁의 유산 역시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쟁은 이란의 정치 문화에 깊이 각인되어, 혁명수비대(IRGC)의 정치적·경제적 영향력 확대와 안보 우선주의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이라크에서는 전쟁과 제재로 파괴된 사회 인프라와 종파 간 불신이 2003년 이후의 내전과 IS(이슬람국가)의 부상을 위한 토양이 되었습니다.

이 두 전쟁은 결국 하나의 연속된 서사입니다. 1979년 이란 혁명이 촉발한 지정학적 불안정이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이 전쟁의 경제적 후유증이 걸프전으로, 걸프전의 미완의 결말이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이어지는 인과의 사슬입니다. 중동 현대사를 이해하려면 이 사슬의 각 고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마무리: 전쟁 너머의 중동

1980년부터 1991년까지, 중동은 두 차례의 대규모 전쟁으로 피로 물들었습니다. 이 전쟁들은 수백만 명의 삶을 파괴했고, 중동의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재편했으며, 그 여파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시아파-수니파 경쟁 구도를 심화시켰고, 걸프전은 미국의 중동 군사 주둔을 영구화하며 새로운 갈등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들만이 1980~90년대 중동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고, 레바논은 15년간의 내전(1975~1990)의 상처를 봉합하고 있었으며,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소련 철수 후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걸프전 이후의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오슬로 평화 프로세스라는 희망의 불꽃이 잠시 타올랐습니다.

다음 화에서는 오슬로 합의와 중동 평화 프로세스의 희망과 좌절,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현재를 살펴보겠습니다. 전쟁의 연속 속에서도 평화를 향한 시도는 계속되었고, 그 성공과 실패의 교훈은 오늘날의 중동을 이해하는 데 여전히 핵심적입니다.

이미지는 Leonardo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이미지는 Claude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 시리즈: 중동의 역사 (총 52화 중 4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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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역사] 47/52화: 중동전쟁 4차례 총정리: 1948~1973 지도를 바꾼 전쟁들

중동전쟁 4차례 역사 일러스트

들어가며 — 건국 다음 날 시작된 전쟁의 시대

지난 46화에서 우리는 1948년 5월 14일이라는 하루가 어떻게 두 민족에게 완전히 다른 의미로 새겨졌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2천 년 만의 독립 선언이었고,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는 70만 명 이상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나크바(대재앙)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역사적인 하루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중동 전체를 뒤흔들 거대한 전쟁의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1948년부터 1973년까지, 불과 25년 사이에 중동에서는 네 차례의 대규모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전쟁들은 단순한 군사 충돌이 아니었습니다. 매번 전쟁이 끝날 때마다 중동의 지도가 다시 그려졌고, 수백만 명의 운명이 바뀌었으며, 세계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뒤엉켰습니다. 냉전이라는 거대한 그림자 아래에서 미국과 소련은 각각의 대리인을 통해 영향력을 경쟁했고, 석유라는 전략 자원은 전쟁의 결과를 넘어 세계 경제의 판도까지 흔들었습니다.

오늘 47화에서는 이 네 차례의 중동전쟁을 하나의 연속된 서사로 읽어보겠습니다. 각 전쟁의 원인과 전개, 결과를 면밀히 살펴보면서, 왜 이 지역이 20세기 후반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화약고가 되었는지, 그리고 이 전쟁들이 오늘날의 중동에 어떤 유산을 남겼는지 팩트에 기반해 고찰하겠습니다.

제1차 중동전쟁(1948~1949) — 독립 선언 다음 날의 총성

전쟁의 배경: UN 분할안과 아랍 세계의 거부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결의안 181호를 통과시켰습니다.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와 아랍 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을 국제 관리 지역으로 두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찬성 33, 반대 13, 기권 10이었습니다. 유대 측 지도부는 이를 수용했으나, 아랍 측은 전면 거부했습니다.

아랍 측의 거부에는 나름의 논리가 있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인구의 약 3분의 2가 아랍인이었는데, 분할안은 전체 영토의 약 56%를 인구의 3분의 1에 불과한 유대인 측에 배정했습니다. 더구나 유대인의 상당수는 최근 수십 년 사이에 이주해 온 이민자들이었습니다. 아랍 세계의 시각에서 이것은 외부 세력이 강제한 부당한 분할이었습니다.

분할안 통과 직후부터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에 무력 충돌이 격화되었습니다. 아직 영국군이 철수하기 전인 1947년 12월부터 1948년 5월까지의 이 기간을 흔히 ‘내전 단계’라고 부릅니다. 양측 민병대가 도로 통제권과 전략적 마을을 놓고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유대 측의 주요 무장 조직인 하가나(Haganah), 이르군(Irgun), 레히(Lehi)는 점차 조직적인 군사 작전을 펼쳤고, 아랍 측도 아랍해방군(Arab Liberation Army)과 지역 민병대를 중심으로 저항했습니다.

이 내전 단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사건 중 하나가 1948년 4월 9일의 데이르 야신 학살입니다. 이르군과 레히 소속 전투원들이 예루살렘 인근 데이르 야신 마을을 공격해 100명 이상의 아랍 민간인을 살해한 이 사건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 사이에 극심한 공포를 퍼뜨렸고, 대규모 피난의 촉매가 되었습니다. 반면 며칠 후인 4월 13일에는 아랍 세력이 하다사 의료 호송대를 매복 공격해 유대인 의사·간호사 등 78명을 살해하는 사건도 벌어졌습니다. 전쟁의 잔혹함은 어느 한쪽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1948년 중동전쟁 영토 변화 지도

아랍 5개국의 침공

1948년 5월 14일, 다비드 벤-구리온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바로 다음 날인 5월 15일, 이집트·트랜스요르단(현 요르단)·시리아·이라크·레바논의 군대가 일제히 신생 이스라엘로 진격했습니다. 아랍연맹 사무총장 압둘 라흐만 하산 아잠은 “이것은 몽골의 학살이나 십자군의 전쟁과 비교될 섬멸 전쟁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겉보기에는 압도적인 아랍 측의 승리가 예상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아랍 연합군의 총병력은 약 2만 5천에서 5만 명 사이로 추산되었지만, 통합된 지휘 체계가 없었습니다. 각국은 서로 다른 정치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트랜스요르단의 압둘라 1세 국왕은 팔레스타인 아랍 영토를 자국에 합병하려 했고, 이집트의 파루크 왕은 팔레스타인에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으며, 시리아와 이라크도 각자의 이해관계를 따랐습니다. 공동의 적을 상대했지만 공동의 전략은 없었던 셈입니다.

반면 이스라엘 측은 초기에 약 3만 명의 병력으로 시작했지만, 전쟁 중 동원과 해외 유대인 지원병(마할) 유입으로 병력을 빠르게 늘렸습니다. 무엇보다 하가나를 전신으로 한 이스라엘 방위군(IDF)은 위임통치 시기부터 축적한 조직력과 전투 경험을 갖고 있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긴급 수입한 무기도 결정적 도움이 되었습니다. 당시 소련은 영국의 중동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전략적 판단에서 체코를 통한 이스라엘 무기 지원을 묵인했습니다.

전쟁의 전개와 휴전

전쟁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뉩니다. 첫 번째 단계(5월 15일~6월 11일)에서 아랍 연합군은 여러 전선에서 공세를 취했습니다. 이집트군은 남부 네게브 사막을 거쳐 북상했고, 트랜스요르단의 아랍군단은 동쪽에서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을 장악했으며, 시리아군은 북부 갈릴리 지역에서 공격했습니다. 특히 아랍군단은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유대인 지구를 점령하고, 서예루살렘으로 통하는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은 각 전선에서 결정적 붕괴를 막아냈습니다. 6월 11일 UN 중재자 폴케 베르나도테 백작의 주선으로 4주간의 첫 번째 휴전이 성립되었습니다. 이 휴전 기간은 이스라엘에 결정적으로 유리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시간을 이용해 대규모로 병력을 동원하고, 해외에서 무기를 반입했습니다. 반면 아랍 측은 조율 실패와 보급 한계에 직면했습니다.

7월 8일부터 시작된 두 번째 단계(’10일 전투’)에서 이스라엘군은 공세로 전환했습니다. 중부의 리다(라믈라 포함)와 나사렛을 포함한 갈릴리 지역을 장악하며 점령 지역을 크게 확대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리다와 라믈라에서 수만 명의 아랍 주민이 추방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7월 18일 두 번째 휴전이 발효되었습니다.

세 번째 단계(10월~1949년 3월)에서 이스라엘군은 남부 네게브에서 이집트군을 격파하고, 북부에서 시리아·레바논군을 밀어냈습니다. 이 무렵 이스라엘의 군사적 우위는 확실해졌습니다.

전쟁의 결과: 새로운 지도

1949년 2월부터 7월까지 이스라엘은 이집트·레바논·트랜스요르단·시리아와 각각 개별 정전 협정을 체결했습니다(로도스 정전협정). 이 협정의 결과로 그어진 정전선(그린 라인)은 UN 분할안이 유대 국가에 배정한 영역보다 약 50% 넓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분할안 기준 56%가 아닌, 전체 팔레스타인 영토의 약 78%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영토의 운명도 분할안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서안지구(웨스트뱅크)와 동예루살렘은 트랜스요르단이 합병했고(1950년 공식 병합, 국제사회 대부분 미승인), 가자지구는 이집트의 군사 관리 하에 놓였습니다. 분할안이 약속했던 독립 아랍 국가는 탄생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비극적 핵심 중 하나입니다. 아랍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을 위해 전쟁했다고 했지만, 정작 전쟁 후 그 땅을 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인적 피해도 컸습니다. 이스라엘 측 사망자는 약 6,373명(전체 유대인 인구의 약 1%)이었고, 아랍 측 사망자는 수천에서 만 명 이상으로 추산됩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인도적 결과는 약 70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난민이 된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귀환 문제는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제1차 중동전쟁은 여러 면에서 이후의 분쟁 구조를 결정지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건국 초기의 생존 위기를 극복하며 군사력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고, 아랍 세계는 패배의 충격 속에서 내부 정치 격변을 겪었습니다. 이집트에서 파루크 왕정이 무너지고 1952년 나세르의 자유장교단 혁명이 일어난 것도, 시리아에서 잇따른 쿠데타가 발생한 것도 이 패배의 직간접적 결과였습니다.

제2차 중동전쟁(1956) — 수에즈 위기: 제국의 황혼

나세르의 등장과 새로운 중동

1952년 7월, 이집트에서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로 파루크 왕을 축출했습니다. 1954년 실권을 잡은 나세르는 곧 아랍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과 반제국주의 노선으로 아랍 세계 전체에서 열광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나세르의 비전은 명확했습니다. 아랍의 통합, 서구 제국주의의 완전한 청산, 그리고 비동맹 운동을 통한 독자 노선이었습니다.

나세르는 1955년 반둥회의에 참석하며 비동맹 운동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습니다. 이어 체코슬로바키아(실질적으로 소련)로부터 대규모 무기 구매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냉전 구도에서 미국과 영국은 이를 경계했습니다. 미국은 나세르를 달래려 아스완 하이댐 건설에 대한 재정 지원을 약속했다가, 나세르의 중국 공산정권 승인 등을 이유로 1956년 7월 19일 지원을 철회했습니다.

나세르의 대응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1956년 7월 26일,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행한 연설에서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했습니다. 수에즈 운하는 1869년 개통 이래 수에즈 운하 회사(Suez Canal Company)가 운영했으며, 이 회사의 최대 주주는 영국 정부와 프랑스 투자자들이었습니다. 운하의 통행료 수입은 막대했고, 무엇보다 이 좁은 수로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세계 해상 무역의 핵심 동맥이었습니다.

나세르는 국유화의 대가로 주주들에게 보상을 약속했고, 국제법적으로도 자국 영토 내 기간시설의 국유화는 정당한 주권 행사라는 논리를 폈습니다. 그러나 영국 총리 앤서니 이든은 이를 국제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든은 나세르를 1930년대의 히틀러에 비유하며, 유화 정책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1956년 수에즈 위기 일러스트

세브르 밀약: 삼국의 공모

1956년 10월 22~24일, 파리 외곽의 세브르에서 극비 회담이 열렸습니다. 참석자는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의 고위 관료와 군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세 나라는 정교한 시나리오를 짰습니다.

계획은 이러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침공한다. 둘째, 영국과 프랑스가 운하의 안전을 핑계로 양측(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운하에서 물러나라는 최후통첩을 보낸다. 셋째, 이집트가 거부하면(당연히 거부할 것이므로) 영·프가 운하 지대에 군사 개입한다. 이 시나리오의 진짜 목표는 나세르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이 공모에 참여할 별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1949년 정전 이후에도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에서 이스라엘 선박과 이스라엘 향 화물의 통과를 금지했고, 아카바만 입구의 티란 해협도 봉쇄했습니다. 가자지구에서는 이집트가 지원하는 무장 세력(페다인)이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공격을 반복했습니다. 이스라엘 총리 벤-구리온은 이번 기회에 시나이 반도를 확보하고 안보 위협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전쟁의 전개: 군사적 성공, 정치적 재앙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군이 시나리오대로 시나이 반도를 침공했습니다. 아리엘 샤론이 지휘한 202공수여단이 미틀라 고개에 공수부대를 투입하며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은 100시간 만에 시나이 반도 거의 전역을 장악하는 놀라운 속도전을 펼쳤습니다. 이집트군은 시나이의 광대한 사막에서 제대로 된 방어선을 구축하지 못한 채 후퇴했습니다.

10월 30일, 예정대로 영국과 프랑스가 최후통첩을 발표했습니다. 양측에 운하에서 16km씩 물러나라는 요구였지만, 이스라엘군은 아직 운하에서 수십 km 떨어져 있었으므로 이 통첩은 사실상 이집트에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나세르가 당연히 거부하자, 10월 31일부터 영·프 공군이 이집트 비행장을 폭격하기 시작했습니다. 11월 5~6일에는 포트사이드에 공수·상륙 작전을 감행했습니다.

군사적으로 작전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영·프 연합군은 포트사이드를 점령하고 운하를 따라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완전한 재앙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격분했습니다. 사전 통보도 받지 못했고, 마침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둔 시점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이 소련의 헝가리 침공(10월 23일 시작)을 비난하는 마당에 동맹국인 영·프의 이집트 침공을 묵인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국제법과 유엔 헌장에 대한 이중잣대가 될 것이었습니다.

소련도 강경하게 나왔습니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영국과 프랑스에 핵무기 사용 가능성까지 암시하는 서한을 보냈습니다. 이것은 허세에 가까웠지만 당시의 긴장을 높이는 데는 효과적이었습니다.

결정적 타격은 미국의 경제적 압박이었습니다. 워싱턴은 영국 파운드화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겠다고 위협했고, IMF를 통한 긴급 대출도 막았습니다. 전후 재건에서 아직 회복 중이던 영국 경제는 이 압박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11월 6일, 이든은 굴욕적으로 정전을 수용했고, 프랑스도 뒤따랐습니다.

전쟁의 결과: 두 제국의 퇴장, 두 초강대국의 등장

수에즈 위기의 결과는 군사적 결과와 정치적 결과가 정반대였습니다. 전장에서는 이스라엘·영·프가 이겼지만, 외교무대에서는 나세르가 승리했습니다.

영·프군은 12월까지 철수를 완료했고, 이스라엘도 미국의 압박과 유엔긴급군(UNEF) 배치를 조건으로 1957년 3월까지 시나이에서 물러났습니다. 수에즈 운하는 나세르의 손에 남았습니다. 영국의 이든 총리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1957년 1월 사임했지만, 실질적 원인은 수에즈의 정치적 패배였습니다.

이 전쟁은 세계사적으로 중대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의 허락 없이는 더 이상 독자적 군사 행동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대영제국의 시대가 사실상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였습니다. 이후 중동의 세력 구도는 영·프 대신 미국과 소련의 경쟁으로 재편되었습니다.

나세르는 비록 군사적으로 패배했지만, 초강대국의 개입 덕에 영토를 지켜냈고, 아랍 세계에서 서구 제국주의에 맞선 영웅으로 추앙받았습니다. 아랍 민족주의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고, 그 영향은 1958년 이라크 혁명(하심 왕조 타도)과 시리아-이집트 통합(아랍연합공화국, 1958~1961)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영토를 반환했지만 두 가지를 얻었습니다. 첫째, 티란 해협의 자유 항행이 보장되었습니다. 둘째, 시나이에 UNEF가 배치되어 남부 국경의 안보가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또한 전투에서 보여준 군사력은 이스라엘군의 명성을 높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과들은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11년 후, 나세르가 UNEF 철수와 해협 봉쇄를 선언하면서 더 큰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제3차 중동전쟁(1967) — 6일 전쟁: 지도가 다시 그려지다

전쟁으로 가는 길: 1967년의 위기 고조

1960년대 중반, 중동의 긴장은 다시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첫째, 수자원 분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1964년 국가수로(National Water Carrier)를 완공해 갈릴리 호수의 물을 네게브 사막까지 끌어가는 대규모 관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시리아와 요르단은 이에 맞서 요르단 강 상류의 물줄기를 돌리는 전환 공사를 추진했고, 이스라엘은 이를 군사적으로 저지했습니다.

둘째, 시리아-이스라엘 국경의 골란고원에서 간헐적 포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시리아는 팔레스타인 게릴라(파타흐 등)의 이스라엘 공격을 지원하거나 묵인했고, 이스라엘은 보복 공습으로 대응했습니다. 1967년 4월 7일에는 이스라엘 공군이 시리아 전투기 6대를 격추하는 대규모 공중전이 벌어졌습니다.

셋째, 아랍 국가 간의 경쟁이 상황을 악화시켰습니다. 나세르는 1962년부터 예멘 내전에 개입해 수만 명의 이집트군을 파병한 상태였고, 이로 인해 사우디아라비아와 대립했습니다. 보수 왕정 국가들과 급진 공화국 진영 사이의 갈등이 깊어졌고,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과 사우디는 나세르가 이스라엘에 대해 구호만 외칠 뿐 실제 행동은 하지 않는다고 비난했습니다. 이 비난은 나세르를 점점 더 과감한 행동으로 내몰았습니다.

결정적 촉발은 1967년 5월에 일어났습니다. 소련이 이집트에 “이스라엘이 시리아 국경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다”는 정보를 전달한 것입니다. 이 정보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시리아 국경에 특별한 병력 증강을 하지 않았고, 유엔 감시단도 이를 확인했습니다. 소련이 왜 이런 오보를 전달했는지는 아직 논쟁 중입니다. 중동의 긴장을 높여 자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다는 설, 관료적 오판이라는 설 등이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나세르는 이 정보에 기반해 행동했습니다. 5월 16일, 시나이 반도에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켰습니다. 5월 18일, 시나이에 주둔하던 유엔긴급군(UNEF)에 철수를 요구했고, 유엔 사무총장 우 탄트는 논란 속에 이를 수용했습니다. 5월 22일, 나세르는 이스라엘 선박에 대한 티란 해협 봉쇄를 선언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사전에 ‘전쟁 행위(casus belli)’로 규정한 바로 그 조치였습니다.

5월 30일에는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이 카이로를 방문해 이집트-요르단 상호방위조약에 서명했습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 나세르를 비난하던 후세인이었지만, 아랍 연대의 압력과 국내 팔레스타인계 주민들의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6월 4일에는 이라크도 이 동맹에 합류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실상 사방에서 포위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2~3주간의 기다림이 극심한 긴장을 야기했습니다. 시민들은 전쟁을 예감하고 공원에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레비 에슈콜 총리는 외교적 해결을 모색했지만 진전이 없었고, 군부의 압박과 국민의 불안 속에서 모셰 다얀을 국방장관으로 기용했습니다. 이스라엘 군부는 선제공격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1967년 6일전쟁 전선 다이어그램

6일간의 전쟁

1일차 — 6월 5일: 전쟁의 운명을 결정한 3시간

1967년 6월 5일 아침 7시 45분(이스라엘 시간), 이스라엘 공군(IAF)의 거의 전 전력이 이집트를 향해 출격했습니다. ‘모케드(Moked, 초점)’ 작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공군은 이집트의 주요 공군 기지 11곳을 동시에 기습했습니다. 이집트 조종사들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일상적 순찰을 시작하기 직전의 시각을 정밀하게 노렸습니다.

결과는 파괴적이었습니다. 개전 첫 3시간 만에 이집트 공군은 사실상 전멸했습니다. 활주로를 먼저 파괴해 이착륙을 불가능하게 만든 뒤, 지상에 주기된 항공기를 체계적으로 폭격했습니다. 이날 하루 동안 이집트 항공기 약 300여 대(전투기·폭격기 포함)가 파괴되었고, 대부분은 이륙조차 하지 못한 채 지상에서 불탔습니다. 이집트 공군 사령관 시드키 마흐무드 원수는 나세르에게 보고하면서 실제 피해를 축소했고, 나세르는 한동안 전쟁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같은 날 오후, 요르단이 서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중부에 포격을 시작하자 이스라엘 공군은 요르단과 시리아 공군 기지도 공격해 양국 공군을 무력화했습니다. 이라크 공군 기지 H-3도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 하루 만에 이스라엘은 전장의 완전한 제공권을 확보했습니다. 이것은 이후 5일간의 지상전 결과를 사실상 결정지었습니다.

시나이 전선 (이집트)

제공권을 확보한 이스라엘군은 시나이 반도에서 세 축으로 공세를 펼쳤습니다. 이스라엘 탈(Israel Tal) 장군의 기갑부대가 북부 해안 도로를 따라 진격했고, 아리엘 샤론 장군의 부대가 중앙의 아부 아게일라-움 카테프 방어선을 돌파했으며, 남부에서도 진격이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샤론의 움 카테프 전투는 현대 합동 작전의 교과서적 사례로 꼽힙니다. 보병·기갑·포병·공수·공군을 동시에 투입해 견고한 방어선을 야간 작전으로 돌파했습니다. 이집트군의 사기는 공군 상실과 급속한 이스라엘군의 진격으로 급락했고, 나세르는 6월 6일 시나이에서의 총퇴각을 명령했습니다. 이 퇴각은 조직적이지 못했고, 시나이의 사막 도로에서 많은 이집트 병사들이 갈증과 폭격으로 사망했습니다.

6월 8일까지 이스라엘군은 수에즈 운하 동안에 도달해 시나이 반도 전체를 점령했습니다. 이집트는 사실상 궤멸적 패배를 당했습니다.

서안지구와 예루살렘 전선 (요르단)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개전 직후 전쟁 참여 여부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비밀 채널을 통해 “요르단이 참전하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로부터 “이집트 공군이 이스라엘을 폭격하고 있다”는 허위 정보를 받은 후세인(나세르 자신도 실상을 몰랐다)은 참전을 결정했고, 아랍 연대의 의무와 국내 여론의 압력도 작용했습니다.

요르단군의 예루살렘 포격이 시작되자 이스라엘군은 반격에 나섰습니다. 6월 5~6일 서안지구 북부와 중부의 요르단군 방어선이 돌파되었습니다. 6월 7일 아침, 모타 구르(Motta Gur) 대령이 이끄는 이스라엘 공수여단이 동예루살렘의 구시가지에 진입했습니다. 무전으로 전해진 “신전산이 우리 수중에 있다(Har haBayit beyadeinu)”는 보고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유대교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인 서쪽 벽(통곡의 벽) 앞에 이스라엘 군인들이 선 모습은 전 세계에 송출되었습니다. 1948년 이후 19년 만에 유대인들이 이 성지에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요르단 통치 기간 유대인의 접근은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사건은 팔레스타인과 무슬림 세계에게는 성지의 점령을 의미했습니다. 신전산(하람 알-샤리프)에는 이슬람의 세 번째 성소인 알아크사 모스크와 바위의 돔이 위치해 있었습니다.

6월 7일까지 이스라엘군은 서안지구 전체를 점령했습니다. 수만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요르단 강을 건너 피난했고, 그중 상당수는 1948년에 이미 한 번 난민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골란고원 전선 (시리아)

시리아 전선은 가장 나중에 열렸습니다. 시리아군은 개전 초부터 갈릴리 북부의 이스라엘 정착촌을 포격했지만, 본격적 지상 침공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요르단 전선을 먼저 정리한 뒤, 6월 9일에야 골란고원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골란고원은 해발 약 1,000m의 현무암 고원으로, 이스라엘 갈릴리 지역을 내려다보는 천연 요새였습니다. 시리아군은 수년간 이곳에 견고한 방어 진지를 구축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은 항공 지원과 보병-기갑 협동으로 급경사면을 올라 방어선을 돌파했습니다. 시리아군의 저항은 곳곳에서 치열했지만, 공군력 없이 지상군만으로는 이스라엘의 공세를 막기 어려웠습니다.

6월 10일, 유엔의 정전이 발효되기 직전 이스라엘군은 골란고원의 주요 지점을 확보했습니다. 쿠네이트라 시가 함락되면서 시리아군은 다마스쿠스 방면으로 퇴각했습니다.

6일차 — 6월 10일: 정전과 새로운 현실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6월 10일 정전이 발효되었습니다. 단 6일 만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와 가자지구, 요르단의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점령했습니다. 전쟁 전 이스라엘 영토의 약 3.5배에 달하는 지역이었습니다.

6일 전쟁의 결과와 유산

인적 피해에서 이스라엘은 약 776명이 전사했고, 아랍 측은 이집트 약 1만~1만 5천 명, 요르단 약 6천 명, 시리아 약 2천 5백 명 등 총 2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됩니다. 물적 피해와 포로 수는 더욱 비대칭적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중동의 지정학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꿨습니다. 1967년 11월 22일 유엔 안보리 결의안 242호가 채택되었습니다. 이 결의안은 “최근 분쟁에서 점령된 영토에서의 이스라엘 군대 철수”(영문: “withdrawal of Israeli armed forces from territories occupied in the recent conflict”)와 “이 지역 모든 국가의 주권·영토적 보전·정치적 독립” 인정을 동시에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영어판에 정관사 “the”가 빠져 있어(“from territories” vs “from the territories”), 이것이 “모든 점령지”를 의미하는지 “일부 점령지”를 의미하는지를 놓고 수십 년간 해석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프랑스어판에는 정관사가 포함되어 있어 이 모호성을 더했습니다.

전쟁 직후인 1967년 8월 말~9월 초, 수단 하르툼에서 열린 아랍연맹 정상회담은 유명한 ‘세 가지 거부(Three Nos)’를 선언했습니다. 이스라엘과의 평화 없다(No peace), 승인 없다(No recognition), 협상 없다(No negotiation). 이 선언은 아랍 측의 강경한 입장을 보여주었지만, 동시에 군사적 수단으로는 이스라엘을 제거할 수 없다는 현실을 암묵적으로 인정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르툼 결의는 ‘전쟁도 평화도 아닌’ 교착 상태의 시작이었습니다.

나세르의 아랍 민족주의 프로젝트는 이 패배로 치명적 타격을 입었습니다. “세 나라 군대를 6일 만에 분쇄한” 이스라엘의 승리는 아랍 세계에 깊은 충격과 좌절을 안겼습니다. 이집트 작가 나기브 마흐푸즈와 시리아 시인 니자르 카바니 등 당대의 지식인들은 이 패배를 아랍 사회 전체의 자기성찰 계기로 삼았습니다. 나세르는 패배 직후 사임을 선언했지만, 대규모 군중 시위에 의해 번복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카리스마와 비전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손상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승리의 도취가 대단했지만, 이 전쟁은 풀기 어려운 새로운 문제들을 안겨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갑자기 100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아랍인을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점령지의 지위와 정착촌 문제는 이후 반세기 넘게 중동 분쟁의 핵심 쟁점이 되었습니다. 전쟁에서 이기기는 쉬웠지만, 전쟁의 결과를 평화로 바꾸기는 훨씬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두 전쟁 사이의 시간: 1967~1973

소모전(1967~1970) — 운하 너머의 일상적 전쟁

1967년의 정전은 평화를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수에즈 운하를 사이에 두고 이집트군과 이스라엘군이 대치했고, 1968년 3월부터 본격적인 소모전(War of Attrition)이 시작되었습니다. 나세르의 전략은 포격과 특공작전을 통해 이스라엘에 지속적 인명 피해를 가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시나이 점령을 유지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집트는 소련의 대규모 군사 원조를 받아 방공망을 재건하고, 운하 서안에서 이스라엘 진지에 포격을 퍼부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공군력으로 대응했고, 1969~1970년에는 이집트 내륙까지 전략 폭격을 확대했습니다. 소련은 이집트에 최신 방공 미사일(SA-3, SA-6)과 함께 소련군 조종사와 방공 요원을 직접 파견하는 극단적 조치를 취했습니다. 1970년 7월에는 이스라엘 전투기와 소련 조종사가 공중전을 벌이는 위기 상황까지 발생했습니다.

1970년 8월, 미국의 중재로 정전이 성립되었습니다(로저스 계획). 한 달 뒤인 9월 28일, 나세르가 심장마비로 급사했습니다. 52세의 나이였습니다. 카이로의 장례식에는 500만 명이 운집했고, 아랍 민족주의의 한 시대가 저물었습니다. 후임자 안와르 사다트가 이집트의 새로운 지도자로 취임했습니다.

사다트의 전략적 전환

사다트는 처음에 “나세르의 그림자” 속 과도기 인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독자적이고 대담한 전략가임을 입증했습니다. 사다트의 분석은 냉철했습니다. 군사적으로 이스라엘을 완전히 격파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외교적 교착을 깨려면 제한적이라도 군사적 성공이 필요하며, 그것을 통해 협상 테이블에서의 입지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다트는 1971년 이른바 “결정의 해(Year of Decision)”를 선포하고 전쟁을 암시했지만, 실제로는 준비에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1972년 7월에는 약 1만 5천 명에 달하던 소련 군사 고문단의 추방을 명령했습니다. 이것은 미국에 대한 외교적 신호이자, 소련 의존에서 벗어나 독자적 결정권을 확보하려는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소련제 무기의 수입은 계속되었습니다.

한편 시리아에서는 1970년 하페즈 알-아사드가 쿠데타로 집권했습니다. 아사드도 사다트와 마찬가지로 골란고원 탈환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73년 1월, 사다트와 아사드는 이스라엘에 대한 양면 동시 공격을 합의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안주: 바-레브 라인과 ‘개념’

6일 전쟁의 압도적 승리는 이스라엘에 자만감을 심어주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은 수에즈 운하 동안을 따라 바-레브 라인(Bar-Lev Line)이라는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모래와 콘크리트로 만든 방벽과 약 30개의 거점(마오짐)으로 이루어진 이 방어선은 이집트군의 운하 도하를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사 정보국(아만)에는 이른바 ‘개념(Ha-Konseptziya)’이라는 지배적 판단 틀이 자리 잡았습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 공군을 무력화할 수 있는 장거리 공격 능력(구체적으로 스커드 미사일이나 전략 폭격기)을 갖추기 전에는 전쟁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며, 시리아는 이집트 없이 단독으로 전쟁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었습니다. 이 ‘개념’은 이집트 고위 정보원(마르완이라는 코드명의 이중 스파이로, 정체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음)의 정보에 의해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다트와 이집트 군부는 이 ‘개념’의 맹점을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이스라엘 공군을 제압할 필요 없이, 운하를 건너 제한된 거리만 전진하면 소련제 지대공 미사일(SAM)의 우산 아래서 싸울 수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목표는 시나이 전체를 탈환하는 것이 아니라, 운하를 건너 교두보를 확보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무적’이라는 신화를 깨고 외교적 협상의 지렛대를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제4차 중동전쟁(1973) — 욤 키푸르/라마단 전쟁

기습의 완성

1973년 10월 6일, 사다트와 아사드가 선택한 D-데이는 치밀하게 계산된 날짜였습니다. 이날은 유대교의 가장 성스러운 날인 욤 키푸르(속죄일)이자, 이슬람력으로 라마단 기간이었습니다. 욤 키푸르에 이스라엘의 모든 활동이 멈춘다는 점은 기습의 효과를 극대화했습니다. 도로는 비어 있고, 방송은 중단되며, 대부분의 예비군이 가정과 회당에 있었습니다. 라마단 기간에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이슬람 역사에서 전례가 있었고(무함마드의 바드르 전투도 라마단에 벌어졌습니다), 아랍 측에게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기만 작전은 매우 정교했습니다. 이집트군은 운하 인근에서 반복적으로 대규모 훈련을 실시해 이스라엘의 경계를 둔화시켰습니다. 실제 공격 이동도 ‘연례 가을 훈련’으로 위장되었습니다. 사다트는 언론에 평화적 해결 의지를 밝히고, 이집트 장교들에게 순례 휴가를 공개적으로 허가했습니다.

이스라엘 정보부에도 경고 신호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전쟁 전날인 10월 5일 밤~6일 새벽, 정보 출처(논란의 마르완 포함)로부터 공격 임박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군사 정보국장 엘리 제이라 소장은 이를 보고했지만, 참모총장 다비드 엘라자르와 국방장관 모셰 다얀, 총리 골다 메이어는 판단을 놓고 의견이 갈렸습니다. 엘라자르는 선제공격을 건의했지만, 메이어와 다얀은 국제 여론을 고려해 선제공격을 거부했습니다. 미국의 키신저 국무장관도 “이스라엘이 먼저 쏘면 총 한 자루도 지원하지 않겠다”고 경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예비군 동원만 일부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 운하 도하 장면

시나이 전선: 운하를 건넌 이집트군

1973년 10월 6일 오후 2시(현지시간), 이집트군 약 240문의 야포가 바-레브 라인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개시했습니다. 동시에 수천 명의 이집트 공병이 고압 수류 펌프를 이용해 수에즈 운하 동안의 거대한 모래 방벽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이집트군의 가장 창의적인 전술적 혁신 중 하나였습니다. 불도저로 수일이 걸릴 작업을 수류 펌프로 단 5~6시간 만에 완성한 것입니다.

첫 24시간 동안 약 8만 명의 이집트 보병이 운하를 건넜습니다. 바-레브 라인의 이스라엘 수비대(약 450명)는 압도적 물량 앞에 무너졌습니다. 이집트군은 개전 이틀 만에 운하 동안을 따라 깊이 5~10km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공고화했습니다. 소련제 AT-3 새거 대전차 미사일과 RPG-7은 이스라엘 기갑부대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역습은 재앙적이었습니다. 10월 8일, 아리엘 샤론 사단과 아브라함 아단 사단이 조율 없이 각각 역습을 시도했지만, 이집트군의 대전차 미사일과 보병 진지에 부딪혀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날 하루에만 이스라엘 전차 수십 대가 파괴되었습니다. ‘무적 이스라엘군’이라는 신화가 흔들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시나이와 골란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받고, 예비군 동원이 아직 완료되지 않았으며, 무기 손실이 예상을 초과했습니다. 다얀 국방장관은 극도로 비관적이 되어 핵무기 사용 가능성까지 논의했다는 증언이 있습니다(이스라엘은 핵보유를 공식 확인한 적 없지만, 1960년대 말에 핵능력을 확보한 것으로 널리 추정됩니다).

골란고원 전선: 벼랑 끝의 방어전

골란고원의 상황은 시나이보다 더 위급했습니다. 시리아군은 약 1,400대의 전차를 앞세워 골란고원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이를 맞은 이스라엘군은 약 180대의 전차뿐이었습니다. 약 7.5:1의 수적 열세였습니다.

10월 6일 오후 2시 시리아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이스라엘의 두 개 기갑여단 — 북부의 제7기갑여단과 남부의 제188(바라크) 기갑여단 — 이 방어에 나섰습니다. 남부의 바라크 여단은 압도적 수적 열세 속에서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여단장과 부여단장이 모두 전사했고, 10월 7일 밤까지 작전 가능한 전차가 십여 대로 줄었습니다. 시리아군이 갈릴리를 향해 내리막길을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 이스라엘의 심장부가 위협받았습니다.

북부의 제7기갑여단은 후에 ‘눈물의 계곡(Valley of Tears)’이라 불리게 되는 지역에서 처절한 방어전을 벌였습니다. 아비그도르 벤-갈 대령이 지휘한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 전차들은 고지에서 시리아 기갑 종대를 맞아 지형의 이점을 극대화한 사격으로 수백 대의 시리아 전차를 격파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측 손실도 극심했고, 전투 후 이 계곡은 수백 대의 불탄 전차 잔해로 뒤덮였습니다.

10월 8~9일, 급히 동원된 이스라엘 예비군 기갑사단들이 골란에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곧바로 전투에 투입되어 시리아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반격에 나섰습니다. 10월 10일까지 이스라엘군은 전쟁 전 정전선을 회복했고, 시리아군을 몰아낸 뒤 역공으로 시리아 영토 깊숙이 진격해 다마스쿠스에서 약 40km 지점까지 도달했습니다. 이라크·요르단의 지원군이 도착해 반격했지만, 이스라엘의 진출을 완전히 밀어내지는 못했습니다.

시나이의 전환: 이스라엘의 역습과 운하 도하

골란에서 상황을 안정시킨 이스라엘은 시나이에 전력을 집중했습니다. 사다트는 10월 14일, 이집트군에 교두보를 넘어 시나이 깊숙이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결정은 군사적으로 비판받는 판단이었습니다. 방공 미사일 우산 밖으로 나온 이집트 기갑부대는 이스라엘 공군과 기갑부대의 집중 타격에 노출되었습니다. 10월 14일의 대규모 기갑전에서 이집트군은 200대 이상의 전차를 잃었고, 이스라엘은 약 20대를 잃었습니다. 전쟁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아리엘 샤론 사단은 이집트 제2군과 제3군 사이의 이음새를 파고들어, 10월 15~16일 밤 수에즈 운하를 역도하하는 대담한 작전을 감행했습니다. ‘용감한 심장(Stouthearted Men)’ 또는 ‘아비레이 레브’ 작전이었습니다. 최초에는 소수의 공수부대가 고무보트로 건넜고, 이어 부교(浮橋)와 조립식 다리가 설치되어 기갑부대가 서안으로 넘어갔습니다.

이 도하 작전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교두보 주변에서 이집트군의 격렬한 저항이 이어졌고, 특히 ‘중국인 농장(Chinese Farm)’이라 불리는 지역의 야간 전투는 전쟁 전체에서 가장 치열한 접전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은 교두보를 유지했고, 점차 서안에서의 전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10월 19일부터 이스라엘군은 서안에서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며 이집트의 방공 미사일 기지들을 하나씩 파괴했고, 이집트 제3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에즈 시(市) 공략은 시가전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제3군 약 2만 명은 점차 고립되었습니다.

초강대국의 개입과 핵 위기

전쟁은 곧 미국과 소련의 직접적 대리전 양상을 띠었습니다. 10월 9일, 소련은 시리아와 이집트에 대규모 공수 보급(에어리프트)을 시작했습니다. 이에 맞서 미국은 10월 13일 이스라엘에 대한 대규모 군사 공수 작전(니켈 그래스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C-5 갤럭시와 C-141 스타리프터 수송기들이 미군 기지에서 직접 이스라엘로 전차·포탄·미사일을 실어 날랐습니다. 유럽 동맹국 대부분이 영공 통과와 중간 기착을 거부한 가운데, 포르투갈만이 아조레스 기지 사용을 허용했습니다. 이 공수 보급은 이스라엘의 전쟁 지속 능력에 결정적이었습니다.

10월 22일, 유엔 안보리 결의 338호가 채택되어 즉각적 정전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정전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고, 이스라엘군은 이집트 제3군 포위를 강화했습니다.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미국에 “양측이 합동으로 군대를 파견해 정전을 집행하자”고 제안하면서, 미국이 거부하면 “일방적 행동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습니다.

이 서한을 받은 키신저와 닉슨 행정부(워터게이트 스캔들로 닉슨은 사실상 기능이 마비된 상태였습니다)는 10월 25일 미군의 전 세계 핵경보 태세를 DEFCON 3로 격상했습니다. 이것은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가장 높은 경보 수준이었습니다. 핵전쟁의 그림자가 다시 한번 세계를 덮었습니다.

다행히 위기는 빠르게 해소되었습니다. 미국의 강경 대응에 소련이 물러섰고, 유엔 비상군(UNEF II)이 파견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강력한 압박 아래 이집트 제3군에 대한 보급 차단을 풀었습니다. 10월 28일까지 전투가 완전히 멈추었습니다.

석유 무기: 전쟁터를 넘어선 충격파

제4차 중동전쟁의 가장 광범위한 영향은 전장 밖에서 나왔습니다. 10월 17일,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 회원국들이 석유 무기를 발동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국가들에 대한 석유 수출 금지(엠바고)와 매월 5%씩의 원유 감산을 선언한 것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살 국왕이 핵심 역할을 했습니다. 미국과 네덜란드가 1차 금수 대상이었습니다.

효과는 즉각적이고 파괴적이었습니다. 원유 가격이 배럴당 약 3달러에서 12달러로 네 배 가까이 치솟았습니다. 이른바 ‘제1차 오일 쇼크’였습니다. 서구 선진국들은 에너지 위기에 빠졌고, 미국에서는 주유소 앞에 차량이 길게 줄을 서는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일본과 유럽의 경제도 심각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석유가 현대 세계의 아킬레스건임이 만천하에 드러난 순간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세계 경제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산유국들은 석유라는 전략 자원의 가치와 정치적 위력을 깨달았고, 이후 OPEC의 영향력이 급격히 커졌습니다. 서구 국가들은 에너지 안보와 중동 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되었습니다. 45화에서 다루었던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발견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이 전쟁에서 그 답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4차 중동전쟁의 결과

인적 피해는 이전 전쟁들보다 훨씬 컸습니다. 이스라엘은 약 2,656명이 전사하고 7,250여 명이 부상했습니다. 인구 비례로 보면 미국이 베트남 전쟁 전체에서 잃은 병력에 맞먹는 충격이었습니다. 아랍 측의 손실은 이집트 약 5,000~15,000명, 시리아 약 3,000~3,500명 전사로 추산됩니다(정확한 수치는 출처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군사적으로 이스라엘은 최종적으로 전세를 뒤집었지만, 초기의 기습과 패배는 이스라엘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습니다. ‘무적 이스라엘군’이라는 1967년의 신화는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전쟁 후 아그라나트 위원회가 정보 실패를 조사했고, 군사 정보국장 제이라와 참모총장 엘라자르가 사임했습니다. 다얀 국방장관에 대한 비판도 거셌습니다. 골다 메이어 정부는 1974년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여론의 압력 속에 결국 사임했습니다.

반면 아랍 측, 특히 이집트에게 이 전쟁은 심리적 승리였습니다. 운하 도하 성공과 바-레브 라인 돌파는 1967년의 치욕을 씻어주었습니다. 이집트 군대가 이스라엘군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10월 6일은 ‘승리의 날’로 기념되며, 카이로의 주요 다리와 도시에 ’10월’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사다트가 처음부터 추구했던 ‘명예의 회복’과 ‘협상의 지렛대 확보’라는 목표는 달성된 셈이었습니다.

네 차례 전쟁의 비교와 종합

전쟁의 성격 변화

네 차례의 전쟁을 관통하는 하나의 서사를 추출한다면, 그것은 ‘힘의 균형과 인식의 변화’입니다.

1948년 전쟁은 신생국의 생존 전쟁이었습니다. 아랍 측은 이스라엘을 태어나기 전에 없앨 수 있다고 확신했고, 이스라엘은 절박한 생존 의지로 이를 막아냈습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기정사실로 만들었지만, 평화는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1956년 전쟁은 제국주의 시대의 마지막 발악이자, 냉전이 중동에 본격 투영되기 시작한 전환점이었습니다. 군사적 결과보다 정치적 결과가 더 중요했던 이 전쟁은 영·프의 퇴장과 미·소의 등장을 알렸습니다.

1967년 전쟁은 이스라엘의 군사적 압도성을 보여준 정점이자, 동시에 점령이라는 새로운 딜레마를 안긴 전쟁이었습니다. 아랍 민족주의의 좌절과 팔레스타인 독자 운동의 부상이라는 이중적 결과를 낳았습니다.

1973년 전쟁은 아랍 측이 군사적으로 이스라엘에 충격을 가할 수 있음을 증명한 전쟁이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전쟁의 결과가 이집트-이스라엘 평화 협상의 길을 열었습니다. 전쟁에서 명예를 회복한 사다트만이 평화 협상을 제안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냉전 구도와 무기 경쟁

네 차례의 전쟁은 냉전의 축소판이기도 했습니다. 소련은 이집트·시리아·이라크에 무기와 군사 고문단을 지원했고, 미국은(그리고 초기에는 프랑스가) 이스라엘에 첨단 무기를 공급했습니다. 전쟁이 거듭될수록 양측의 무기는 정교해졌고, 중동은 냉전 양 진영 무기의 성능을 검증하는 실험장이 되었습니다.

1973년 전쟁에서 소련제 대전차 미사일과 지대공 미사일이 위력을 보인 것은 서방 군사 전략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전차와 전투기라는 고가 재래식 무기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미사일에 의해 무력화될 수 있다는 사실은 군사 교리의 재검토를 촉발했습니다.

팔레스타인 문제의 심화

네 차례의 전쟁을 거치면서 팔레스타인 문제는 점점 더 복잡해졌습니다. 1948년에 70만 명이 난민이 되었고, 1967년에 다시 수십만 명이 피난했습니다. 서안지구와 가자지구가 이스라엘의 군사 점령 하에 놓이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은 점점 더 독자적 해방 운동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끄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1964년 설립되었고, 1967년 패배 이후 아랍 국가들에 의존하는 대신 독자적 무장 투쟁 노선을 강화했습니다.

아랍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을 위해 전쟁한다고 했지만, 각국의 실질적 동기는 자국의 이해관계였습니다. 요르단은 서안을 합병했고, 이집트는 가자를 관리했지만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이집트가 시나이를 되찾는 것과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신의 국가를 갖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이 냉혹한 현실은 팔레스타인 독자 운동의 성장 배경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그린 국경선의 유산

네 차례의 전쟁은 중동의 국경선을 반복적으로 다시 그렸습니다. 그러나 전쟁으로 획득한 영토가 반드시 영구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1957년 시나이에서 철수했다가 1967년 다시 점령했고, 1982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의 결과로 최종 반환했습니다.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골란고원의 지위는 2020년대인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1967년의 그린 라인(전쟁 전 정전선)은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팔레스타인 영토와 이스라엘 영토의 경계로 간주되지만, 현장에서의 현실은 이 선과 크게 다릅니다. 이스라엘 정착촌의 확대, 분리장벽의 건설, 가자의 봉쇄 등은 모두 이 전쟁들이 남긴 미결의 유산입니다.

전쟁에서 평화로? — 캠프 데이비드의 서막

제4차 중동전쟁이 끝난 뒤, 중동은 전쟁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냉엄한 교훈에 직면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군사적으로 아랍을 완전히 굴복시킬 수 없었고, 아랍은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 제거할 수 없었습니다.

1973년 12월, 제네바에서 중동 평화회담이 열렸습니다. 키신저 미 국무장관은 ‘셔틀 외교’를 통해 이집트-이스라엘, 시리아-이스라엘 사이의 병력 분리 협정(1974년)을 중재했습니다. 이것은 아직 평화가 아니었지만, 전쟁을 멈추는 첫 걸음이었습니다.

사다트는 전쟁에서 확보한 정치적 자산을 가지고 더 대담한 행보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1977년 11월, 그는 아랍 지도자로서는 최초로 이스라엘을 방문해 크네세트(의회)에서 연설했습니다. 이 놀라운 행보는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으로 이어졌습니다. 전쟁이 평화의 역설적 전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다트는 이 평화의 대가로 아랍 세계에서 고립되었고, 1981년 군 열병식 도중 이슬람 급진파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네 차례의 중동전쟁은 지도를 바꿨지만, 진정한 평화는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는 예외적 성과였지만, 팔레스타인 문제와 시리아·레바논·이란과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았습니다. 전쟁이 만든 현실 위에서, 새로운 형태의 분쟁이 이미 잉태되고 있었습니다.

결론 — 전쟁이 증명한 것, 전쟁이 해결하지 못한 것

25년간 네 차례의 전쟁은 몇 가지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군사적 역량을 갖춘 국가라는 것입니다. 둘째, 아랍 국가들도 1973년에 보여주었듯 이스라엘에 심대한 타격을 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전쟁만으로는 어느 쪽도 원하는 것을 완전히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들은 또한 중동 문제가 더 이상 지역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 문제임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석유와 핵이라는 두 가지 전략적 요소가 중동을 세계 정치의 핵심으로 끌어올렸습니다. 냉전 시대의 두 초강대국은 중동에서 서로의 대리인을 통해 경쟁했고, 그 경쟁의 그림자는 탈냉전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이 전쟁들의 가장 큰 유산은 수백만 명의 인간적 비극입니다. 전쟁터에서 스러진 병사들, 집을 잃은 난민들, 점령 하에서 살아야 했던 민간인들의 이야기는 정치적 분석과 군사적 통계 뒤에 가려지기 쉽지만, 이것이야말로 이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진짜 이유입니다.

다음 48화에서는 1973년 전쟁 이후 중동이 걸어간 길 — 석유 국부의 변환, 이란 혁명, 레바논 내전, 그리고 팔레스타인 문제의 새로운 국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전쟁의 시대가 끝나자 또 다른 형태의 격변이 중동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미지는 Leonardo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이미지는 Claude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 시리즈: 중동의 역사 (총 52화 중 4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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