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며 — 건국 다음 날 시작된 전쟁의 시대
지난 46화에서 우리는 1948년 5월 14일이라는 하루가 어떻게 두 민족에게 완전히 다른 의미로 새겨졌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2천 년 만의 독립 선언이었고,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는 70만 명 이상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나크바(대재앙)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역사적인 하루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중동 전체를 뒤흔들 거대한 전쟁의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1948년부터 1973년까지, 불과 25년 사이에 중동에서는 네 차례의 대규모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전쟁들은 단순한 군사 충돌이 아니었습니다. 매번 전쟁이 끝날 때마다 중동의 지도가 다시 그려졌고, 수백만 명의 운명이 바뀌었으며, 세계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뒤엉켰습니다. 냉전이라는 거대한 그림자 아래에서 미국과 소련은 각각의 대리인을 통해 영향력을 경쟁했고, 석유라는 전략 자원은 전쟁의 결과를 넘어 세계 경제의 판도까지 흔들었습니다.
오늘 47화에서는 이 네 차례의 중동전쟁을 하나의 연속된 서사로 읽어보겠습니다. 각 전쟁의 원인과 전개, 결과를 면밀히 살펴보면서, 왜 이 지역이 20세기 후반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화약고가 되었는지, 그리고 이 전쟁들이 오늘날의 중동에 어떤 유산을 남겼는지 팩트에 기반해 고찰하겠습니다.
제1차 중동전쟁(1948~1949) — 독립 선언 다음 날의 총성
전쟁의 배경: UN 분할안과 아랍 세계의 거부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결의안 181호를 통과시켰습니다.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와 아랍 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을 국제 관리 지역으로 두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찬성 33, 반대 13, 기권 10이었습니다. 유대 측 지도부는 이를 수용했으나, 아랍 측은 전면 거부했습니다.
아랍 측의 거부에는 나름의 논리가 있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인구의 약 3분의 2가 아랍인이었는데, 분할안은 전체 영토의 약 56%를 인구의 3분의 1에 불과한 유대인 측에 배정했습니다. 더구나 유대인의 상당수는 최근 수십 년 사이에 이주해 온 이민자들이었습니다. 아랍 세계의 시각에서 이것은 외부 세력이 강제한 부당한 분할이었습니다.
분할안 통과 직후부터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에 무력 충돌이 격화되었습니다. 아직 영국군이 철수하기 전인 1947년 12월부터 1948년 5월까지의 이 기간을 흔히 ‘내전 단계’라고 부릅니다. 양측 민병대가 도로 통제권과 전략적 마을을 놓고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유대 측의 주요 무장 조직인 하가나(Haganah), 이르군(Irgun), 레히(Lehi)는 점차 조직적인 군사 작전을 펼쳤고, 아랍 측도 아랍해방군(Arab Liberation Army)과 지역 민병대를 중심으로 저항했습니다.
이 내전 단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사건 중 하나가 1948년 4월 9일의 데이르 야신 학살입니다. 이르군과 레히 소속 전투원들이 예루살렘 인근 데이르 야신 마을을 공격해 100명 이상의 아랍 민간인을 살해한 이 사건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 사이에 극심한 공포를 퍼뜨렸고, 대규모 피난의 촉매가 되었습니다. 반면 며칠 후인 4월 13일에는 아랍 세력이 하다사 의료 호송대를 매복 공격해 유대인 의사·간호사 등 78명을 살해하는 사건도 벌어졌습니다. 전쟁의 잔혹함은 어느 한쪽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랍 5개국의 침공
1948년 5월 14일, 다비드 벤-구리온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바로 다음 날인 5월 15일, 이집트·트랜스요르단(현 요르단)·시리아·이라크·레바논의 군대가 일제히 신생 이스라엘로 진격했습니다. 아랍연맹 사무총장 압둘 라흐만 하산 아잠은 “이것은 몽골의 학살이나 십자군의 전쟁과 비교될 섬멸 전쟁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겉보기에는 압도적인 아랍 측의 승리가 예상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아랍 연합군의 총병력은 약 2만 5천에서 5만 명 사이로 추산되었지만, 통합된 지휘 체계가 없었습니다. 각국은 서로 다른 정치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트랜스요르단의 압둘라 1세 국왕은 팔레스타인 아랍 영토를 자국에 합병하려 했고, 이집트의 파루크 왕은 팔레스타인에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으며, 시리아와 이라크도 각자의 이해관계를 따랐습니다. 공동의 적을 상대했지만 공동의 전략은 없었던 셈입니다.
반면 이스라엘 측은 초기에 약 3만 명의 병력으로 시작했지만, 전쟁 중 동원과 해외 유대인 지원병(마할) 유입으로 병력을 빠르게 늘렸습니다. 무엇보다 하가나를 전신으로 한 이스라엘 방위군(IDF)은 위임통치 시기부터 축적한 조직력과 전투 경험을 갖고 있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긴급 수입한 무기도 결정적 도움이 되었습니다. 당시 소련은 영국의 중동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전략적 판단에서 체코를 통한 이스라엘 무기 지원을 묵인했습니다.
전쟁의 전개와 휴전
전쟁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뉩니다. 첫 번째 단계(5월 15일~6월 11일)에서 아랍 연합군은 여러 전선에서 공세를 취했습니다. 이집트군은 남부 네게브 사막을 거쳐 북상했고, 트랜스요르단의 아랍군단은 동쪽에서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을 장악했으며, 시리아군은 북부 갈릴리 지역에서 공격했습니다. 특히 아랍군단은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유대인 지구를 점령하고, 서예루살렘으로 통하는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은 각 전선에서 결정적 붕괴를 막아냈습니다. 6월 11일 UN 중재자 폴케 베르나도테 백작의 주선으로 4주간의 첫 번째 휴전이 성립되었습니다. 이 휴전 기간은 이스라엘에 결정적으로 유리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시간을 이용해 대규모로 병력을 동원하고, 해외에서 무기를 반입했습니다. 반면 아랍 측은 조율 실패와 보급 한계에 직면했습니다.
7월 8일부터 시작된 두 번째 단계(’10일 전투’)에서 이스라엘군은 공세로 전환했습니다. 중부의 리다(라믈라 포함)와 나사렛을 포함한 갈릴리 지역을 장악하며 점령 지역을 크게 확대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리다와 라믈라에서 수만 명의 아랍 주민이 추방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7월 18일 두 번째 휴전이 발효되었습니다.
세 번째 단계(10월~1949년 3월)에서 이스라엘군은 남부 네게브에서 이집트군을 격파하고, 북부에서 시리아·레바논군을 밀어냈습니다. 이 무렵 이스라엘의 군사적 우위는 확실해졌습니다.
전쟁의 결과: 새로운 지도
1949년 2월부터 7월까지 이스라엘은 이집트·레바논·트랜스요르단·시리아와 각각 개별 정전 협정을 체결했습니다(로도스 정전협정). 이 협정의 결과로 그어진 정전선(그린 라인)은 UN 분할안이 유대 국가에 배정한 영역보다 약 50% 넓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분할안 기준 56%가 아닌, 전체 팔레스타인 영토의 약 78%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영토의 운명도 분할안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서안지구(웨스트뱅크)와 동예루살렘은 트랜스요르단이 합병했고(1950년 공식 병합, 국제사회 대부분 미승인), 가자지구는 이집트의 군사 관리 하에 놓였습니다. 분할안이 약속했던 독립 아랍 국가는 탄생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비극적 핵심 중 하나입니다. 아랍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을 위해 전쟁했다고 했지만, 정작 전쟁 후 그 땅을 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인적 피해도 컸습니다. 이스라엘 측 사망자는 약 6,373명(전체 유대인 인구의 약 1%)이었고, 아랍 측 사망자는 수천에서 만 명 이상으로 추산됩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인도적 결과는 약 70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난민이 된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귀환 문제는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제1차 중동전쟁은 여러 면에서 이후의 분쟁 구조를 결정지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건국 초기의 생존 위기를 극복하며 군사력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고, 아랍 세계는 패배의 충격 속에서 내부 정치 격변을 겪었습니다. 이집트에서 파루크 왕정이 무너지고 1952년 나세르의 자유장교단 혁명이 일어난 것도, 시리아에서 잇따른 쿠데타가 발생한 것도 이 패배의 직간접적 결과였습니다.
제2차 중동전쟁(1956) — 수에즈 위기: 제국의 황혼
나세르의 등장과 새로운 중동
1952년 7월, 이집트에서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로 파루크 왕을 축출했습니다. 1954년 실권을 잡은 나세르는 곧 아랍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과 반제국주의 노선으로 아랍 세계 전체에서 열광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나세르의 비전은 명확했습니다. 아랍의 통합, 서구 제국주의의 완전한 청산, 그리고 비동맹 운동을 통한 독자 노선이었습니다.
나세르는 1955년 반둥회의에 참석하며 비동맹 운동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습니다. 이어 체코슬로바키아(실질적으로 소련)로부터 대규모 무기 구매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냉전 구도에서 미국과 영국은 이를 경계했습니다. 미국은 나세르를 달래려 아스완 하이댐 건설에 대한 재정 지원을 약속했다가, 나세르의 중국 공산정권 승인 등을 이유로 1956년 7월 19일 지원을 철회했습니다.
나세르의 대응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1956년 7월 26일,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행한 연설에서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했습니다. 수에즈 운하는 1869년 개통 이래 수에즈 운하 회사(Suez Canal Company)가 운영했으며, 이 회사의 최대 주주는 영국 정부와 프랑스 투자자들이었습니다. 운하의 통행료 수입은 막대했고, 무엇보다 이 좁은 수로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세계 해상 무역의 핵심 동맥이었습니다.
나세르는 국유화의 대가로 주주들에게 보상을 약속했고, 국제법적으로도 자국 영토 내 기간시설의 국유화는 정당한 주권 행사라는 논리를 폈습니다. 그러나 영국 총리 앤서니 이든은 이를 국제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든은 나세르를 1930년대의 히틀러에 비유하며, 유화 정책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세브르 밀약: 삼국의 공모
1956년 10월 22~24일, 파리 외곽의 세브르에서 극비 회담이 열렸습니다. 참석자는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의 고위 관료와 군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세 나라는 정교한 시나리오를 짰습니다.
계획은 이러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침공한다. 둘째, 영국과 프랑스가 운하의 안전을 핑계로 양측(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운하에서 물러나라는 최후통첩을 보낸다. 셋째, 이집트가 거부하면(당연히 거부할 것이므로) 영·프가 운하 지대에 군사 개입한다. 이 시나리오의 진짜 목표는 나세르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이 공모에 참여할 별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1949년 정전 이후에도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에서 이스라엘 선박과 이스라엘 향 화물의 통과를 금지했고, 아카바만 입구의 티란 해협도 봉쇄했습니다. 가자지구에서는 이집트가 지원하는 무장 세력(페다인)이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공격을 반복했습니다. 이스라엘 총리 벤-구리온은 이번 기회에 시나이 반도를 확보하고 안보 위협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전쟁의 전개: 군사적 성공, 정치적 재앙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군이 시나리오대로 시나이 반도를 침공했습니다. 아리엘 샤론이 지휘한 202공수여단이 미틀라 고개에 공수부대를 투입하며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은 100시간 만에 시나이 반도 거의 전역을 장악하는 놀라운 속도전을 펼쳤습니다. 이집트군은 시나이의 광대한 사막에서 제대로 된 방어선을 구축하지 못한 채 후퇴했습니다.
10월 30일, 예정대로 영국과 프랑스가 최후통첩을 발표했습니다. 양측에 운하에서 16km씩 물러나라는 요구였지만, 이스라엘군은 아직 운하에서 수십 km 떨어져 있었으므로 이 통첩은 사실상 이집트에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나세르가 당연히 거부하자, 10월 31일부터 영·프 공군이 이집트 비행장을 폭격하기 시작했습니다. 11월 5~6일에는 포트사이드에 공수·상륙 작전을 감행했습니다.
군사적으로 작전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영·프 연합군은 포트사이드를 점령하고 운하를 따라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완전한 재앙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격분했습니다. 사전 통보도 받지 못했고, 마침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둔 시점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이 소련의 헝가리 침공(10월 23일 시작)을 비난하는 마당에 동맹국인 영·프의 이집트 침공을 묵인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국제법과 유엔 헌장에 대한 이중잣대가 될 것이었습니다.
소련도 강경하게 나왔습니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영국과 프랑스에 핵무기 사용 가능성까지 암시하는 서한을 보냈습니다. 이것은 허세에 가까웠지만 당시의 긴장을 높이는 데는 효과적이었습니다.
결정적 타격은 미국의 경제적 압박이었습니다. 워싱턴은 영국 파운드화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겠다고 위협했고, IMF를 통한 긴급 대출도 막았습니다. 전후 재건에서 아직 회복 중이던 영국 경제는 이 압박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11월 6일, 이든은 굴욕적으로 정전을 수용했고, 프랑스도 뒤따랐습니다.
전쟁의 결과: 두 제국의 퇴장, 두 초강대국의 등장
수에즈 위기의 결과는 군사적 결과와 정치적 결과가 정반대였습니다. 전장에서는 이스라엘·영·프가 이겼지만, 외교무대에서는 나세르가 승리했습니다.
영·프군은 12월까지 철수를 완료했고, 이스라엘도 미국의 압박과 유엔긴급군(UNEF) 배치를 조건으로 1957년 3월까지 시나이에서 물러났습니다. 수에즈 운하는 나세르의 손에 남았습니다. 영국의 이든 총리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1957년 1월 사임했지만, 실질적 원인은 수에즈의 정치적 패배였습니다.
이 전쟁은 세계사적으로 중대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의 허락 없이는 더 이상 독자적 군사 행동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대영제국의 시대가 사실상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였습니다. 이후 중동의 세력 구도는 영·프 대신 미국과 소련의 경쟁으로 재편되었습니다.
나세르는 비록 군사적으로 패배했지만, 초강대국의 개입 덕에 영토를 지켜냈고, 아랍 세계에서 서구 제국주의에 맞선 영웅으로 추앙받았습니다. 아랍 민족주의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고, 그 영향은 1958년 이라크 혁명(하심 왕조 타도)과 시리아-이집트 통합(아랍연합공화국, 1958~1961)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영토를 반환했지만 두 가지를 얻었습니다. 첫째, 티란 해협의 자유 항행이 보장되었습니다. 둘째, 시나이에 UNEF가 배치되어 남부 국경의 안보가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또한 전투에서 보여준 군사력은 이스라엘군의 명성을 높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과들은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11년 후, 나세르가 UNEF 철수와 해협 봉쇄를 선언하면서 더 큰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제3차 중동전쟁(1967) — 6일 전쟁: 지도가 다시 그려지다
전쟁으로 가는 길: 1967년의 위기 고조
1960년대 중반, 중동의 긴장은 다시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첫째, 수자원 분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1964년 국가수로(National Water Carrier)를 완공해 갈릴리 호수의 물을 네게브 사막까지 끌어가는 대규모 관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시리아와 요르단은 이에 맞서 요르단 강 상류의 물줄기를 돌리는 전환 공사를 추진했고, 이스라엘은 이를 군사적으로 저지했습니다.
둘째, 시리아-이스라엘 국경의 골란고원에서 간헐적 포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시리아는 팔레스타인 게릴라(파타흐 등)의 이스라엘 공격을 지원하거나 묵인했고, 이스라엘은 보복 공습으로 대응했습니다. 1967년 4월 7일에는 이스라엘 공군이 시리아 전투기 6대를 격추하는 대규모 공중전이 벌어졌습니다.
셋째, 아랍 국가 간의 경쟁이 상황을 악화시켰습니다. 나세르는 1962년부터 예멘 내전에 개입해 수만 명의 이집트군을 파병한 상태였고, 이로 인해 사우디아라비아와 대립했습니다. 보수 왕정 국가들과 급진 공화국 진영 사이의 갈등이 깊어졌고,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과 사우디는 나세르가 이스라엘에 대해 구호만 외칠 뿐 실제 행동은 하지 않는다고 비난했습니다. 이 비난은 나세르를 점점 더 과감한 행동으로 내몰았습니다.
결정적 촉발은 1967년 5월에 일어났습니다. 소련이 이집트에 “이스라엘이 시리아 국경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다”는 정보를 전달한 것입니다. 이 정보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시리아 국경에 특별한 병력 증강을 하지 않았고, 유엔 감시단도 이를 확인했습니다. 소련이 왜 이런 오보를 전달했는지는 아직 논쟁 중입니다. 중동의 긴장을 높여 자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다는 설, 관료적 오판이라는 설 등이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나세르는 이 정보에 기반해 행동했습니다. 5월 16일, 시나이 반도에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켰습니다. 5월 18일, 시나이에 주둔하던 유엔긴급군(UNEF)에 철수를 요구했고, 유엔 사무총장 우 탄트는 논란 속에 이를 수용했습니다. 5월 22일, 나세르는 이스라엘 선박에 대한 티란 해협 봉쇄를 선언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사전에 ‘전쟁 행위(casus belli)’로 규정한 바로 그 조치였습니다.
5월 30일에는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이 카이로를 방문해 이집트-요르단 상호방위조약에 서명했습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 나세르를 비난하던 후세인이었지만, 아랍 연대의 압력과 국내 팔레스타인계 주민들의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6월 4일에는 이라크도 이 동맹에 합류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실상 사방에서 포위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2~3주간의 기다림이 극심한 긴장을 야기했습니다. 시민들은 전쟁을 예감하고 공원에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레비 에슈콜 총리는 외교적 해결을 모색했지만 진전이 없었고, 군부의 압박과 국민의 불안 속에서 모셰 다얀을 국방장관으로 기용했습니다. 이스라엘 군부는 선제공격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6일간의 전쟁
1일차 — 6월 5일: 전쟁의 운명을 결정한 3시간
1967년 6월 5일 아침 7시 45분(이스라엘 시간), 이스라엘 공군(IAF)의 거의 전 전력이 이집트를 향해 출격했습니다. ‘모케드(Moked, 초점)’ 작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공군은 이집트의 주요 공군 기지 11곳을 동시에 기습했습니다. 이집트 조종사들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일상적 순찰을 시작하기 직전의 시각을 정밀하게 노렸습니다.
결과는 파괴적이었습니다. 개전 첫 3시간 만에 이집트 공군은 사실상 전멸했습니다. 활주로를 먼저 파괴해 이착륙을 불가능하게 만든 뒤, 지상에 주기된 항공기를 체계적으로 폭격했습니다. 이날 하루 동안 이집트 항공기 약 300여 대(전투기·폭격기 포함)가 파괴되었고, 대부분은 이륙조차 하지 못한 채 지상에서 불탔습니다. 이집트 공군 사령관 시드키 마흐무드 원수는 나세르에게 보고하면서 실제 피해를 축소했고, 나세르는 한동안 전쟁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같은 날 오후, 요르단이 서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중부에 포격을 시작하자 이스라엘 공군은 요르단과 시리아 공군 기지도 공격해 양국 공군을 무력화했습니다. 이라크 공군 기지 H-3도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 하루 만에 이스라엘은 전장의 완전한 제공권을 확보했습니다. 이것은 이후 5일간의 지상전 결과를 사실상 결정지었습니다.
시나이 전선 (이집트)
제공권을 확보한 이스라엘군은 시나이 반도에서 세 축으로 공세를 펼쳤습니다. 이스라엘 탈(Israel Tal) 장군의 기갑부대가 북부 해안 도로를 따라 진격했고, 아리엘 샤론 장군의 부대가 중앙의 아부 아게일라-움 카테프 방어선을 돌파했으며, 남부에서도 진격이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샤론의 움 카테프 전투는 현대 합동 작전의 교과서적 사례로 꼽힙니다. 보병·기갑·포병·공수·공군을 동시에 투입해 견고한 방어선을 야간 작전으로 돌파했습니다. 이집트군의 사기는 공군 상실과 급속한 이스라엘군의 진격으로 급락했고, 나세르는 6월 6일 시나이에서의 총퇴각을 명령했습니다. 이 퇴각은 조직적이지 못했고, 시나이의 사막 도로에서 많은 이집트 병사들이 갈증과 폭격으로 사망했습니다.
6월 8일까지 이스라엘군은 수에즈 운하 동안에 도달해 시나이 반도 전체를 점령했습니다. 이집트는 사실상 궤멸적 패배를 당했습니다.
서안지구와 예루살렘 전선 (요르단)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개전 직후 전쟁 참여 여부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비밀 채널을 통해 “요르단이 참전하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로부터 “이집트 공군이 이스라엘을 폭격하고 있다”는 허위 정보를 받은 후세인(나세르 자신도 실상을 몰랐다)은 참전을 결정했고, 아랍 연대의 의무와 국내 여론의 압력도 작용했습니다.
요르단군의 예루살렘 포격이 시작되자 이스라엘군은 반격에 나섰습니다. 6월 5~6일 서안지구 북부와 중부의 요르단군 방어선이 돌파되었습니다. 6월 7일 아침, 모타 구르(Motta Gur) 대령이 이끄는 이스라엘 공수여단이 동예루살렘의 구시가지에 진입했습니다. 무전으로 전해진 “신전산이 우리 수중에 있다(Har haBayit beyadeinu)”는 보고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유대교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인 서쪽 벽(통곡의 벽) 앞에 이스라엘 군인들이 선 모습은 전 세계에 송출되었습니다. 1948년 이후 19년 만에 유대인들이 이 성지에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요르단 통치 기간 유대인의 접근은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사건은 팔레스타인과 무슬림 세계에게는 성지의 점령을 의미했습니다. 신전산(하람 알-샤리프)에는 이슬람의 세 번째 성소인 알아크사 모스크와 바위의 돔이 위치해 있었습니다.
6월 7일까지 이스라엘군은 서안지구 전체를 점령했습니다. 수만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요르단 강을 건너 피난했고, 그중 상당수는 1948년에 이미 한 번 난민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골란고원 전선 (시리아)
시리아 전선은 가장 나중에 열렸습니다. 시리아군은 개전 초부터 갈릴리 북부의 이스라엘 정착촌을 포격했지만, 본격적 지상 침공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요르단 전선을 먼저 정리한 뒤, 6월 9일에야 골란고원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골란고원은 해발 약 1,000m의 현무암 고원으로, 이스라엘 갈릴리 지역을 내려다보는 천연 요새였습니다. 시리아군은 수년간 이곳에 견고한 방어 진지를 구축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은 항공 지원과 보병-기갑 협동으로 급경사면을 올라 방어선을 돌파했습니다. 시리아군의 저항은 곳곳에서 치열했지만, 공군력 없이 지상군만으로는 이스라엘의 공세를 막기 어려웠습니다.
6월 10일, 유엔의 정전이 발효되기 직전 이스라엘군은 골란고원의 주요 지점을 확보했습니다. 쿠네이트라 시가 함락되면서 시리아군은 다마스쿠스 방면으로 퇴각했습니다.
6일차 — 6월 10일: 정전과 새로운 현실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6월 10일 정전이 발효되었습니다. 단 6일 만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와 가자지구, 요르단의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점령했습니다. 전쟁 전 이스라엘 영토의 약 3.5배에 달하는 지역이었습니다.
6일 전쟁의 결과와 유산
인적 피해에서 이스라엘은 약 776명이 전사했고, 아랍 측은 이집트 약 1만~1만 5천 명, 요르단 약 6천 명, 시리아 약 2천 5백 명 등 총 2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됩니다. 물적 피해와 포로 수는 더욱 비대칭적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중동의 지정학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꿨습니다. 1967년 11월 22일 유엔 안보리 결의안 242호가 채택되었습니다. 이 결의안은 “최근 분쟁에서 점령된 영토에서의 이스라엘 군대 철수”(영문: “withdrawal of Israeli armed forces from territories occupied in the recent conflict”)와 “이 지역 모든 국가의 주권·영토적 보전·정치적 독립” 인정을 동시에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영어판에 정관사 “the”가 빠져 있어(“from territories” vs “from the territories”), 이것이 “모든 점령지”를 의미하는지 “일부 점령지”를 의미하는지를 놓고 수십 년간 해석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프랑스어판에는 정관사가 포함되어 있어 이 모호성을 더했습니다.
전쟁 직후인 1967년 8월 말~9월 초, 수단 하르툼에서 열린 아랍연맹 정상회담은 유명한 ‘세 가지 거부(Three Nos)’를 선언했습니다. 이스라엘과의 평화 없다(No peace), 승인 없다(No recognition), 협상 없다(No negotiation). 이 선언은 아랍 측의 강경한 입장을 보여주었지만, 동시에 군사적 수단으로는 이스라엘을 제거할 수 없다는 현실을 암묵적으로 인정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르툼 결의는 ‘전쟁도 평화도 아닌’ 교착 상태의 시작이었습니다.
나세르의 아랍 민족주의 프로젝트는 이 패배로 치명적 타격을 입었습니다. “세 나라 군대를 6일 만에 분쇄한” 이스라엘의 승리는 아랍 세계에 깊은 충격과 좌절을 안겼습니다. 이집트 작가 나기브 마흐푸즈와 시리아 시인 니자르 카바니 등 당대의 지식인들은 이 패배를 아랍 사회 전체의 자기성찰 계기로 삼았습니다. 나세르는 패배 직후 사임을 선언했지만, 대규모 군중 시위에 의해 번복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카리스마와 비전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손상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승리의 도취가 대단했지만, 이 전쟁은 풀기 어려운 새로운 문제들을 안겨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갑자기 100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아랍인을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점령지의 지위와 정착촌 문제는 이후 반세기 넘게 중동 분쟁의 핵심 쟁점이 되었습니다. 전쟁에서 이기기는 쉬웠지만, 전쟁의 결과를 평화로 바꾸기는 훨씬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두 전쟁 사이의 시간: 1967~1973
소모전(1967~1970) — 운하 너머의 일상적 전쟁
1967년의 정전은 평화를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수에즈 운하를 사이에 두고 이집트군과 이스라엘군이 대치했고, 1968년 3월부터 본격적인 소모전(War of Attrition)이 시작되었습니다. 나세르의 전략은 포격과 특공작전을 통해 이스라엘에 지속적 인명 피해를 가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시나이 점령을 유지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집트는 소련의 대규모 군사 원조를 받아 방공망을 재건하고, 운하 서안에서 이스라엘 진지에 포격을 퍼부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공군력으로 대응했고, 1969~1970년에는 이집트 내륙까지 전략 폭격을 확대했습니다. 소련은 이집트에 최신 방공 미사일(SA-3, SA-6)과 함께 소련군 조종사와 방공 요원을 직접 파견하는 극단적 조치를 취했습니다. 1970년 7월에는 이스라엘 전투기와 소련 조종사가 공중전을 벌이는 위기 상황까지 발생했습니다.
1970년 8월, 미국의 중재로 정전이 성립되었습니다(로저스 계획). 한 달 뒤인 9월 28일, 나세르가 심장마비로 급사했습니다. 52세의 나이였습니다. 카이로의 장례식에는 500만 명이 운집했고, 아랍 민족주의의 한 시대가 저물었습니다. 후임자 안와르 사다트가 이집트의 새로운 지도자로 취임했습니다.
사다트의 전략적 전환
사다트는 처음에 “나세르의 그림자” 속 과도기 인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독자적이고 대담한 전략가임을 입증했습니다. 사다트의 분석은 냉철했습니다. 군사적으로 이스라엘을 완전히 격파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외교적 교착을 깨려면 제한적이라도 군사적 성공이 필요하며, 그것을 통해 협상 테이블에서의 입지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다트는 1971년 이른바 “결정의 해(Year of Decision)”를 선포하고 전쟁을 암시했지만, 실제로는 준비에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1972년 7월에는 약 1만 5천 명에 달하던 소련 군사 고문단의 추방을 명령했습니다. 이것은 미국에 대한 외교적 신호이자, 소련 의존에서 벗어나 독자적 결정권을 확보하려는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소련제 무기의 수입은 계속되었습니다.
한편 시리아에서는 1970년 하페즈 알-아사드가 쿠데타로 집권했습니다. 아사드도 사다트와 마찬가지로 골란고원 탈환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73년 1월, 사다트와 아사드는 이스라엘에 대한 양면 동시 공격을 합의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안주: 바-레브 라인과 ‘개념’
6일 전쟁의 압도적 승리는 이스라엘에 자만감을 심어주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은 수에즈 운하 동안을 따라 바-레브 라인(Bar-Lev Line)이라는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모래와 콘크리트로 만든 방벽과 약 30개의 거점(마오짐)으로 이루어진 이 방어선은 이집트군의 운하 도하를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사 정보국(아만)에는 이른바 ‘개념(Ha-Konseptziya)’이라는 지배적 판단 틀이 자리 잡았습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 공군을 무력화할 수 있는 장거리 공격 능력(구체적으로 스커드 미사일이나 전략 폭격기)을 갖추기 전에는 전쟁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며, 시리아는 이집트 없이 단독으로 전쟁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었습니다. 이 ‘개념’은 이집트 고위 정보원(마르완이라는 코드명의 이중 스파이로, 정체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음)의 정보에 의해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다트와 이집트 군부는 이 ‘개념’의 맹점을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이스라엘 공군을 제압할 필요 없이, 운하를 건너 제한된 거리만 전진하면 소련제 지대공 미사일(SAM)의 우산 아래서 싸울 수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목표는 시나이 전체를 탈환하는 것이 아니라, 운하를 건너 교두보를 확보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무적’이라는 신화를 깨고 외교적 협상의 지렛대를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제4차 중동전쟁(1973) — 욤 키푸르/라마단 전쟁
기습의 완성
1973년 10월 6일, 사다트와 아사드가 선택한 D-데이는 치밀하게 계산된 날짜였습니다. 이날은 유대교의 가장 성스러운 날인 욤 키푸르(속죄일)이자, 이슬람력으로 라마단 기간이었습니다. 욤 키푸르에 이스라엘의 모든 활동이 멈춘다는 점은 기습의 효과를 극대화했습니다. 도로는 비어 있고, 방송은 중단되며, 대부분의 예비군이 가정과 회당에 있었습니다. 라마단 기간에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이슬람 역사에서 전례가 있었고(무함마드의 바드르 전투도 라마단에 벌어졌습니다), 아랍 측에게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기만 작전은 매우 정교했습니다. 이집트군은 운하 인근에서 반복적으로 대규모 훈련을 실시해 이스라엘의 경계를 둔화시켰습니다. 실제 공격 이동도 ‘연례 가을 훈련’으로 위장되었습니다. 사다트는 언론에 평화적 해결 의지를 밝히고, 이집트 장교들에게 순례 휴가를 공개적으로 허가했습니다.
이스라엘 정보부에도 경고 신호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전쟁 전날인 10월 5일 밤~6일 새벽, 정보 출처(논란의 마르완 포함)로부터 공격 임박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군사 정보국장 엘리 제이라 소장은 이를 보고했지만, 참모총장 다비드 엘라자르와 국방장관 모셰 다얀, 총리 골다 메이어는 판단을 놓고 의견이 갈렸습니다. 엘라자르는 선제공격을 건의했지만, 메이어와 다얀은 국제 여론을 고려해 선제공격을 거부했습니다. 미국의 키신저 국무장관도 “이스라엘이 먼저 쏘면 총 한 자루도 지원하지 않겠다”고 경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예비군 동원만 일부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시나이 전선: 운하를 건넌 이집트군
1973년 10월 6일 오후 2시(현지시간), 이집트군 약 240문의 야포가 바-레브 라인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개시했습니다. 동시에 수천 명의 이집트 공병이 고압 수류 펌프를 이용해 수에즈 운하 동안의 거대한 모래 방벽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이집트군의 가장 창의적인 전술적 혁신 중 하나였습니다. 불도저로 수일이 걸릴 작업을 수류 펌프로 단 5~6시간 만에 완성한 것입니다.
첫 24시간 동안 약 8만 명의 이집트 보병이 운하를 건넜습니다. 바-레브 라인의 이스라엘 수비대(약 450명)는 압도적 물량 앞에 무너졌습니다. 이집트군은 개전 이틀 만에 운하 동안을 따라 깊이 5~10km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공고화했습니다. 소련제 AT-3 새거 대전차 미사일과 RPG-7은 이스라엘 기갑부대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역습은 재앙적이었습니다. 10월 8일, 아리엘 샤론 사단과 아브라함 아단 사단이 조율 없이 각각 역습을 시도했지만, 이집트군의 대전차 미사일과 보병 진지에 부딪혀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날 하루에만 이스라엘 전차 수십 대가 파괴되었습니다. ‘무적 이스라엘군’이라는 신화가 흔들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시나이와 골란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받고, 예비군 동원이 아직 완료되지 않았으며, 무기 손실이 예상을 초과했습니다. 다얀 국방장관은 극도로 비관적이 되어 핵무기 사용 가능성까지 논의했다는 증언이 있습니다(이스라엘은 핵보유를 공식 확인한 적 없지만, 1960년대 말에 핵능력을 확보한 것으로 널리 추정됩니다).
골란고원 전선: 벼랑 끝의 방어전
골란고원의 상황은 시나이보다 더 위급했습니다. 시리아군은 약 1,400대의 전차를 앞세워 골란고원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이를 맞은 이스라엘군은 약 180대의 전차뿐이었습니다. 약 7.5:1의 수적 열세였습니다.
10월 6일 오후 2시 시리아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이스라엘의 두 개 기갑여단 — 북부의 제7기갑여단과 남부의 제188(바라크) 기갑여단 — 이 방어에 나섰습니다. 남부의 바라크 여단은 압도적 수적 열세 속에서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여단장과 부여단장이 모두 전사했고, 10월 7일 밤까지 작전 가능한 전차가 십여 대로 줄었습니다. 시리아군이 갈릴리를 향해 내리막길을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 이스라엘의 심장부가 위협받았습니다.
북부의 제7기갑여단은 후에 ‘눈물의 계곡(Valley of Tears)’이라 불리게 되는 지역에서 처절한 방어전을 벌였습니다. 아비그도르 벤-갈 대령이 지휘한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 전차들은 고지에서 시리아 기갑 종대를 맞아 지형의 이점을 극대화한 사격으로 수백 대의 시리아 전차를 격파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측 손실도 극심했고, 전투 후 이 계곡은 수백 대의 불탄 전차 잔해로 뒤덮였습니다.
10월 8~9일, 급히 동원된 이스라엘 예비군 기갑사단들이 골란에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곧바로 전투에 투입되어 시리아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반격에 나섰습니다. 10월 10일까지 이스라엘군은 전쟁 전 정전선을 회복했고, 시리아군을 몰아낸 뒤 역공으로 시리아 영토 깊숙이 진격해 다마스쿠스에서 약 40km 지점까지 도달했습니다. 이라크·요르단의 지원군이 도착해 반격했지만, 이스라엘의 진출을 완전히 밀어내지는 못했습니다.
시나이의 전환: 이스라엘의 역습과 운하 도하
골란에서 상황을 안정시킨 이스라엘은 시나이에 전력을 집중했습니다. 사다트는 10월 14일, 이집트군에 교두보를 넘어 시나이 깊숙이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결정은 군사적으로 비판받는 판단이었습니다. 방공 미사일 우산 밖으로 나온 이집트 기갑부대는 이스라엘 공군과 기갑부대의 집중 타격에 노출되었습니다. 10월 14일의 대규모 기갑전에서 이집트군은 200대 이상의 전차를 잃었고, 이스라엘은 약 20대를 잃었습니다. 전쟁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아리엘 샤론 사단은 이집트 제2군과 제3군 사이의 이음새를 파고들어, 10월 15~16일 밤 수에즈 운하를 역도하하는 대담한 작전을 감행했습니다. ‘용감한 심장(Stouthearted Men)’ 또는 ‘아비레이 레브’ 작전이었습니다. 최초에는 소수의 공수부대가 고무보트로 건넜고, 이어 부교(浮橋)와 조립식 다리가 설치되어 기갑부대가 서안으로 넘어갔습니다.
이 도하 작전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교두보 주변에서 이집트군의 격렬한 저항이 이어졌고, 특히 ‘중국인 농장(Chinese Farm)’이라 불리는 지역의 야간 전투는 전쟁 전체에서 가장 치열한 접전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은 교두보를 유지했고, 점차 서안에서의 전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10월 19일부터 이스라엘군은 서안에서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며 이집트의 방공 미사일 기지들을 하나씩 파괴했고, 이집트 제3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에즈 시(市) 공략은 시가전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제3군 약 2만 명은 점차 고립되었습니다.
초강대국의 개입과 핵 위기
전쟁은 곧 미국과 소련의 직접적 대리전 양상을 띠었습니다. 10월 9일, 소련은 시리아와 이집트에 대규모 공수 보급(에어리프트)을 시작했습니다. 이에 맞서 미국은 10월 13일 이스라엘에 대한 대규모 군사 공수 작전(니켈 그래스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C-5 갤럭시와 C-141 스타리프터 수송기들이 미군 기지에서 직접 이스라엘로 전차·포탄·미사일을 실어 날랐습니다. 유럽 동맹국 대부분이 영공 통과와 중간 기착을 거부한 가운데, 포르투갈만이 아조레스 기지 사용을 허용했습니다. 이 공수 보급은 이스라엘의 전쟁 지속 능력에 결정적이었습니다.
10월 22일, 유엔 안보리 결의 338호가 채택되어 즉각적 정전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정전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고, 이스라엘군은 이집트 제3군 포위를 강화했습니다.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미국에 “양측이 합동으로 군대를 파견해 정전을 집행하자”고 제안하면서, 미국이 거부하면 “일방적 행동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습니다.
이 서한을 받은 키신저와 닉슨 행정부(워터게이트 스캔들로 닉슨은 사실상 기능이 마비된 상태였습니다)는 10월 25일 미군의 전 세계 핵경보 태세를 DEFCON 3로 격상했습니다. 이것은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가장 높은 경보 수준이었습니다. 핵전쟁의 그림자가 다시 한번 세계를 덮었습니다.
다행히 위기는 빠르게 해소되었습니다. 미국의 강경 대응에 소련이 물러섰고, 유엔 비상군(UNEF II)이 파견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강력한 압박 아래 이집트 제3군에 대한 보급 차단을 풀었습니다. 10월 28일까지 전투가 완전히 멈추었습니다.
석유 무기: 전쟁터를 넘어선 충격파
제4차 중동전쟁의 가장 광범위한 영향은 전장 밖에서 나왔습니다. 10월 17일,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 회원국들이 석유 무기를 발동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국가들에 대한 석유 수출 금지(엠바고)와 매월 5%씩의 원유 감산을 선언한 것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살 국왕이 핵심 역할을 했습니다. 미국과 네덜란드가 1차 금수 대상이었습니다.
효과는 즉각적이고 파괴적이었습니다. 원유 가격이 배럴당 약 3달러에서 12달러로 네 배 가까이 치솟았습니다. 이른바 ‘제1차 오일 쇼크’였습니다. 서구 선진국들은 에너지 위기에 빠졌고, 미국에서는 주유소 앞에 차량이 길게 줄을 서는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일본과 유럽의 경제도 심각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석유가 현대 세계의 아킬레스건임이 만천하에 드러난 순간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세계 경제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산유국들은 석유라는 전략 자원의 가치와 정치적 위력을 깨달았고, 이후 OPEC의 영향력이 급격히 커졌습니다. 서구 국가들은 에너지 안보와 중동 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되었습니다. 45화에서 다루었던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발견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이 전쟁에서 그 답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4차 중동전쟁의 결과
인적 피해는 이전 전쟁들보다 훨씬 컸습니다. 이스라엘은 약 2,656명이 전사하고 7,250여 명이 부상했습니다. 인구 비례로 보면 미국이 베트남 전쟁 전체에서 잃은 병력에 맞먹는 충격이었습니다. 아랍 측의 손실은 이집트 약 5,000~15,000명, 시리아 약 3,000~3,500명 전사로 추산됩니다(정확한 수치는 출처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군사적으로 이스라엘은 최종적으로 전세를 뒤집었지만, 초기의 기습과 패배는 이스라엘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습니다. ‘무적 이스라엘군’이라는 1967년의 신화는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전쟁 후 아그라나트 위원회가 정보 실패를 조사했고, 군사 정보국장 제이라와 참모총장 엘라자르가 사임했습니다. 다얀 국방장관에 대한 비판도 거셌습니다. 골다 메이어 정부는 1974년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여론의 압력 속에 결국 사임했습니다.
반면 아랍 측, 특히 이집트에게 이 전쟁은 심리적 승리였습니다. 운하 도하 성공과 바-레브 라인 돌파는 1967년의 치욕을 씻어주었습니다. 이집트 군대가 이스라엘군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10월 6일은 ‘승리의 날’로 기념되며, 카이로의 주요 다리와 도시에 ’10월’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사다트가 처음부터 추구했던 ‘명예의 회복’과 ‘협상의 지렛대 확보’라는 목표는 달성된 셈이었습니다.
네 차례 전쟁의 비교와 종합
전쟁의 성격 변화
네 차례의 전쟁을 관통하는 하나의 서사를 추출한다면, 그것은 ‘힘의 균형과 인식의 변화’입니다.
1948년 전쟁은 신생국의 생존 전쟁이었습니다. 아랍 측은 이스라엘을 태어나기 전에 없앨 수 있다고 확신했고, 이스라엘은 절박한 생존 의지로 이를 막아냈습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기정사실로 만들었지만, 평화는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1956년 전쟁은 제국주의 시대의 마지막 발악이자, 냉전이 중동에 본격 투영되기 시작한 전환점이었습니다. 군사적 결과보다 정치적 결과가 더 중요했던 이 전쟁은 영·프의 퇴장과 미·소의 등장을 알렸습니다.
1967년 전쟁은 이스라엘의 군사적 압도성을 보여준 정점이자, 동시에 점령이라는 새로운 딜레마를 안긴 전쟁이었습니다. 아랍 민족주의의 좌절과 팔레스타인 독자 운동의 부상이라는 이중적 결과를 낳았습니다.
1973년 전쟁은 아랍 측이 군사적으로 이스라엘에 충격을 가할 수 있음을 증명한 전쟁이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전쟁의 결과가 이집트-이스라엘 평화 협상의 길을 열었습니다. 전쟁에서 명예를 회복한 사다트만이 평화 협상을 제안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냉전 구도와 무기 경쟁
네 차례의 전쟁은 냉전의 축소판이기도 했습니다. 소련은 이집트·시리아·이라크에 무기와 군사 고문단을 지원했고, 미국은(그리고 초기에는 프랑스가) 이스라엘에 첨단 무기를 공급했습니다. 전쟁이 거듭될수록 양측의 무기는 정교해졌고, 중동은 냉전 양 진영 무기의 성능을 검증하는 실험장이 되었습니다.
1973년 전쟁에서 소련제 대전차 미사일과 지대공 미사일이 위력을 보인 것은 서방 군사 전략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전차와 전투기라는 고가 재래식 무기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미사일에 의해 무력화될 수 있다는 사실은 군사 교리의 재검토를 촉발했습니다.
팔레스타인 문제의 심화
네 차례의 전쟁을 거치면서 팔레스타인 문제는 점점 더 복잡해졌습니다. 1948년에 70만 명이 난민이 되었고, 1967년에 다시 수십만 명이 피난했습니다. 서안지구와 가자지구가 이스라엘의 군사 점령 하에 놓이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은 점점 더 독자적 해방 운동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끄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1964년 설립되었고, 1967년 패배 이후 아랍 국가들에 의존하는 대신 독자적 무장 투쟁 노선을 강화했습니다.
아랍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을 위해 전쟁한다고 했지만, 각국의 실질적 동기는 자국의 이해관계였습니다. 요르단은 서안을 합병했고, 이집트는 가자를 관리했지만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이집트가 시나이를 되찾는 것과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신의 국가를 갖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이 냉혹한 현실은 팔레스타인 독자 운동의 성장 배경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그린 국경선의 유산
네 차례의 전쟁은 중동의 국경선을 반복적으로 다시 그렸습니다. 그러나 전쟁으로 획득한 영토가 반드시 영구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1957년 시나이에서 철수했다가 1967년 다시 점령했고, 1982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의 결과로 최종 반환했습니다.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골란고원의 지위는 2020년대인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1967년의 그린 라인(전쟁 전 정전선)은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팔레스타인 영토와 이스라엘 영토의 경계로 간주되지만, 현장에서의 현실은 이 선과 크게 다릅니다. 이스라엘 정착촌의 확대, 분리장벽의 건설, 가자의 봉쇄 등은 모두 이 전쟁들이 남긴 미결의 유산입니다.
전쟁에서 평화로? — 캠프 데이비드의 서막
제4차 중동전쟁이 끝난 뒤, 중동은 전쟁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냉엄한 교훈에 직면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군사적으로 아랍을 완전히 굴복시킬 수 없었고, 아랍은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 제거할 수 없었습니다.
1973년 12월, 제네바에서 중동 평화회담이 열렸습니다. 키신저 미 국무장관은 ‘셔틀 외교’를 통해 이집트-이스라엘, 시리아-이스라엘 사이의 병력 분리 협정(1974년)을 중재했습니다. 이것은 아직 평화가 아니었지만, 전쟁을 멈추는 첫 걸음이었습니다.
사다트는 전쟁에서 확보한 정치적 자산을 가지고 더 대담한 행보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1977년 11월, 그는 아랍 지도자로서는 최초로 이스라엘을 방문해 크네세트(의회)에서 연설했습니다. 이 놀라운 행보는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으로 이어졌습니다. 전쟁이 평화의 역설적 전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다트는 이 평화의 대가로 아랍 세계에서 고립되었고, 1981년 군 열병식 도중 이슬람 급진파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네 차례의 중동전쟁은 지도를 바꿨지만, 진정한 평화는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는 예외적 성과였지만, 팔레스타인 문제와 시리아·레바논·이란과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았습니다. 전쟁이 만든 현실 위에서, 새로운 형태의 분쟁이 이미 잉태되고 있었습니다.
결론 — 전쟁이 증명한 것, 전쟁이 해결하지 못한 것
25년간 네 차례의 전쟁은 몇 가지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군사적 역량을 갖춘 국가라는 것입니다. 둘째, 아랍 국가들도 1973년에 보여주었듯 이스라엘에 심대한 타격을 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전쟁만으로는 어느 쪽도 원하는 것을 완전히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들은 또한 중동 문제가 더 이상 지역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 문제임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석유와 핵이라는 두 가지 전략적 요소가 중동을 세계 정치의 핵심으로 끌어올렸습니다. 냉전 시대의 두 초강대국은 중동에서 서로의 대리인을 통해 경쟁했고, 그 경쟁의 그림자는 탈냉전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이 전쟁들의 가장 큰 유산은 수백만 명의 인간적 비극입니다. 전쟁터에서 스러진 병사들, 집을 잃은 난민들, 점령 하에서 살아야 했던 민간인들의 이야기는 정치적 분석과 군사적 통계 뒤에 가려지기 쉽지만, 이것이야말로 이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진짜 이유입니다.
다음 48화에서는 1973년 전쟁 이후 중동이 걸어간 길 — 석유 국부의 변환, 이란 혁명, 레바논 내전, 그리고 팔레스타인 문제의 새로운 국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전쟁의 시대가 끝나자 또 다른 형태의 격변이 중동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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