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프전의 불씨에서 9·11의 화염으로
지난 49화에서 우리는 이란-이라크 전쟁 8년과 걸프전이 중동에 남긴 깊은 상처를 살펴보았다.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은 미국 주도 다국적군에 의해 좌절되었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도 중동의 화약고는 꺼지지 않았다. 걸프전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한 미군 병력, 이라크에 대한 가혹한 경제 제재, 팔레스타인 문제의 교착 상태—이 세 가지 요소는 서로 얽히며 중동 전역에 반미 감정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토양 위에서 자라난 것이 바로 알카에다라는 이름의 국제 테러 조직이었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고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 펜타곤이 공격당한 그 순간은 단순히 미국만의 비극이 아니었다. 그것은 21세기 중동의 운명을 결정짓는 분기점이었으며, 이후 20년에 걸친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의 시작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라크 전쟁, 점령과 내전, IS(이슬람국가)의 부상과 몰락, 그리고 2021년 카불 철수까지—이 긴 여정은 중동의 지정학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번 50화에서는 9·11 테러의 배경에서 시작하여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어진 전쟁의 전개 과정,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 20년이 중동과 세계에 남긴 유산을 팩트를 중심으로 깊이 있게 살펴본다. 정치적 입장이나 지정학적 편의가 아닌, 역사적 사실이 말해주는 그대로를 따라가 보자.

알카에다의 탄생: 아프간 지하드에서 글로벌 테러로
오사마 빈 라덴과 아프간 전쟁의 유산
알카에다(al-Qaeda, ‘기지’라는 뜻)의 기원을 이해하려면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냉전의 맥락에서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사이클론 작전(Operation Cyclone)’을 통해 아프간 무자헤딘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아랍 세계 각지에서 온 자원병들—이른바 ‘아랍 아프간’—도 전투에 참여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부유한 건설업 가문 출신인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 1957~2011)은 이 아랍 자원병 네트워크의 핵심 인물이었다.
빈 라덴은 1984년 팔레스타인 출신 이슬람 학자 압둘라 아잠(Abdullah Azzam)과 함께 파키스탄 페샤와르에 ‘서비스 사무소(Maktab al-Khidamat)’를 설립하여 아랍 전사들의 모집과 자금 조달을 조직화했다. 1988년, 소련군 철수가 가시화되면서 빈 라덴은 이 네트워크를 더 넓은 목적에 활용할 조직으로 재편했다. 이것이 알카에다의 공식적인 출발점이다. 초기 알카에다의 목표는 아랍·이슬람 세계에서 ‘부패한’ 세속 정권을 타도하고 이슬람 율법(샤리아)에 기반한 통치를 세우는 것이었다.
걸프전과 반미 선회
결정적인 전환점은 1990년 걸프전이었다.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 당시, 빈 라덴은 사우디 왕실에 알카에다 전사들을 동원하여 이라크에 맞서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사우디 정부는 이를 거절하고 대신 미국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50만 명에 달하는 미군이 ‘두 성지의 땅(사우디아라비아에는 메카와 메디나가 있다)’에 주둔하게 된 것은 빈 라덴에게 용서할 수 없는 모독이었다. 그는 사우디 왕실을 ‘배교자’로 규정하고, 공격 대상을 지역 정권에서 그 배후로 인식한 미국—이른바 ‘먼 적(al-Aduw al-Ba’id)’—으로 전환했다.
1992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추방된 빈 라덴은 수단으로 이동했다가, 1996년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같은 해 그는 ‘두 성지의 땅에서 미국인을 추방하라’는 제목의 파트와(fatwa, 종교적 포고)를 발표했다. 1998년에는 이집트 이슬람 지하드의 지도자 아이만 알자와히리(Ayman al-Zawahiri)와 함께 ‘유대인과 십자군에 대항하는 세계이슬람전선’을 결성하며, 전 세계 어디서든 미국인과 그 동맹을 공격하는 것이 무슬림의 ‘개인적 의무(fard ayn)’라는 두 번째 파트와를 발표했다.
9·11 이전의 공격들
알카에다는 9·11 이전에도 일련의 공격을 감행했다. 1993년 세계무역센터 지하 주차장 폭탄 테러(사망 6명, 부상 1,000여 명), 1998년 8월 케냐 나이로비와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 주재 미국 대사관 동시 폭탄 테러(사망 224명, 부상 4,000여 명), 2000년 10월 예멘 아덴 항에서의 미 해군 구축함 USS 콜 자폭 공격(사망 17명) 등이 그것이다. 이 공격들은 알카에다의 능력과 의지를 명확히 보여주었지만, 미국 정보기관들의 대응은 체계적이지 못했다. CIA와 FBI 사이의 정보 공유 실패, 테러 위협에 대한 정치적 우선순위의 부재가 이후 9·11 위원회 보고서에서 핵심 문제로 지적되었다.
2001년 9월 11일: 세계가 변한 날
공격의 전개
2001년 9월 11일 아침, 알카에다 소속 19명의 납치범이 미국 국내선 여객기 4대를 동시에 장악했다. 오전 8시 46분, 아메리칸 항공 11편이 뉴욕 세계무역센터 북쪽 타워에 충돌했다. 17분 뒤인 9시 3분,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이 남쪽 타워에 돌진했다. 9시 37분에는 아메리칸 항공 77편이 워싱턴 D.C.의 펜타곤 서쪽 벽면에 충돌했다. 네 번째 항공기인 유나이티드 항공 93편은 탑승객들이 납치범에 맞서 저항하면서 목표 지점(의회 의사당 또는 백악관으로 추정)에 도달하지 못하고 펜실베이니아 셴크스빌 인근 들판에 추락했다.
남쪽 타워는 9시 59분, 북쪽 타워는 10시 28분에 각각 붕괴되었다. 이날 총 2,977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세계무역센터에서 2,753명, 펜타곤에서 184명, 셴크스빌에서 40명이었다. 사망자는 90개 이상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며, 여기에는 343명의 뉴욕 소방관과 72명의 법 집행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1941년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 본토에서 벌어진 가장 큰 규모의 공격이었다.
납치범의 프로필과 계획
19명의 납치범 중 15명이 사우디아라비아 국적이었고, 나머지는 아랍에미리트(2명), 이집트(1명), 레바논(1명) 출신이었다. 작전의 핵심 기획자는 쿠웨이트 출생의 파키스탄계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Khalid Sheikh Mohammed)였으며, 현장 지휘관 역할은 이집트 출신의 모하메드 아타(Mohamed Atta)가 맡았다. 아타를 포함한 이른바 ‘함부르크 셀’의 주요 멤버들은 독일에서 유학하며 서구 사회에 적응한 중산층 출신 청년들이었다—이 사실은 ‘테러리스트 = 가난하고 무지한 자’라는 단순한 공식이 틀렸음을 보여주었다.
9·11 위원회 보고서(2004년 발표)에 따르면, 작전 계획은 1996년경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가 빈 라덴에게 제안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납치범들은 미국에서 비행 훈련을 받았으며, 전체 작전 비용은 약 40만~50만 달러로 추정되었다. 당시 미국 방위 예산이 연간 3,000억 달러를 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극히 적은 비용으로 초강대국의 심장부를 타격한 비대칭 전쟁의 극단적 사례였다.
세계의 반응과 미국 내 변화
9·11 직후 국제사회의 반응은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연대였다. NATO는 역사상 최초로 집단방위 조항인 제5조를 발동했다—NATO 회원국에 대한 공격을 전체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것이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결의안 1368호(2001년 9월 12일)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여 테러 공격을 국제 평화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했다. 프랑스의 르몽드 신문은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다”라는 사설을 실었고, 이란의 테헤란에서도 촛불 추모 시위가 벌어졌다.
미국 내부에서는 급격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2001년 10월 26일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서명한 ‘미국 애국자법(USA PATRIOT Act)’은 정보기관의 감시 권한을 대폭 확대했다. 2002년 11월에는 국토안보부(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가 신설되어 22개 연방 기관이 통합되었다. 공항 보안이 강화되고, 무슬림 커뮤니티에 대한 감시와 프로파일링이 확대되었다. 관타나모 만 수용소가 설치되어 ‘적 전투원(enemy combatant)’이라는 새로운 법적 범주 아래 피의자들이 재판 없이 구금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안보와 시민 자유 사이의 긴장이라는 오래된 딜레마를 전례 없는 규모로 부활시켰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항구적 자유 작전’의 시작
탈레반과 알카에다의 관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은 1990년대 중반 이후 빈 라덴에게 은신처를 제공해왔다. 탈레반(Taliban, ‘학생들’이라는 뜻)은 소련 철수 후 이어진 아프간 내전의 혼란 속에서 1994년 칸다하르 지역의 종교학교(마드라사) 학생들을 중심으로 출현한 운동이었다. 1996년 카불을 장악한 뒤 극단적인 이슬람 율법 해석에 기반한 통치를 시행했다—여성 교육 금지, 음악과 텔레비전 금지, 공개 처형 등이 그것이다. 빈 라덴은 탈레반 지도자 물라 오마르(Mullah Omar)에게 재정 지원과 아랍 전사를 제공했고, 그 대가로 아프가니스탄을 작전 기지로 활용했다.
9·11 이후 미국은 탈레반에 빈 라덴과 알카에다 지도부의 인도를 요구했다. 탈레반은 이를 거부하며 빈 라덴의 관여를 증명할 증거를 먼저 제시하라고 맞섰다. 일부 탈레반 내 온건파는 빈 라덴을 제3국에 넘기는 방안을 검토했다는 증언도 있으나, 물라 오마르는 최종적으로 인도를 거부했다. 파슈툰 부족 문화의 ‘멜마스티아(melmastia, 손님 보호의 의무)’ 전통과 빈 라덴과의 개인적 유대가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군사 작전의 전개
2001년 10월 7일, 미국과 영국은 ‘항구적 자유 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을 개시했다. 초기 전략은 대규모 지상군 투입이 아닌, 소규모 특수부대와 CIA 요원이 아프간 북부동맹(Northern Alliance)과 협력하고 정밀 공습으로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이 전략은 놀라울 정도로 빠른 성과를 거두었다. 11월 9일 마자르이샤리프, 11월 13일 카불이 함락되었고, 12월 7일에는 탈레반의 본거지 칸다하르가 무너졌다.
그러나 2001년 12월의 토라 보라 전투는 전쟁의 향방을 바꾼 결정적인 실패였다. 파키스탄 국경 인근의 험준한 산악 동굴 지대에 빈 라덴이 숨어 있다는 첩보가 있었지만, 미국은 대규모 지상군 투입 대신 아프간 군벌의 전사들에게 작전을 맡겼다. 빈 라덴은 파키스탄으로 탈출했다. 이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이미 이라크 전쟁을 구상하고 있던 미국 지도부가 아프가니스탄에 대규모 병력을 묶어두기를 꺼렸다는 분석이 있다. 토라 보라의 실패는 이후 10년간 빈 라덴 추적을 계속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전후 재건과 도전
2001년 12월, 독일 본에서 열린 아프간 주요 세력 회담(본 협정)을 통해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가 과도정부 수반으로 선출되었다. 2004년에는 새 헌법이 채택되고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국제안보지원군(ISAF)이 NATO 지휘 아래 치안 유지를 맡았고, 수십억 달러의 원조가 투입되었다. 여성 교육이 재개되고, 언론 자유가 확대되었으며, 일부 도시 지역에서는 가시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았다. 탈레반은 파키스탄 접경 부족 지역으로 후퇴하여 재편했고, 파키스탄 정보부(ISI)와의 암묵적 연계는 계속되었다. 카르자이 정부의 부패는 심각했으며, 중앙정부의 통치력은 카불과 주요 도시를 벗어나면 급격히 약해졌다. 아편 양귀비 재배가 급증하여 아프가니스탄은 세계 아편 생산의 90%를 차지하게 되었고, 이 마약 경제는 군벌과 탈레반 양쪽 모두의 자금원이 되었다. 무엇보다, 미국의 관심과 자원이 곧 이라크로 이동하면서 아프간 전쟁은 ‘잊힌 전쟁’이 되어갔다.
‘악의 축’ 연설에서 이라크 침공까지
부시 독트린과 ‘악의 축’
2002년 1월 29일, 부시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이라크, 이란, 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지목했다. 이 표현은 제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Axis Powers)’을 의도적으로 환기시킨 것이었다. 같은 해 6월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부시는 ‘선제공격(preemptive strike)’ 독트린을 공식화했다—위협이 완전히 형성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행동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부시 독트린’은 냉전 시대의 억지(deterrence)와 봉쇄(containment) 전략으로부터의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했다.
이라크에 대한 군사 행동의 논의는 실제로 9·11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밥 우드워드 기자의 저서 『부시의 전쟁(Bush at War)』에 따르면, 9월 15일 캠프 데이비드 회의에서 국방부 부장관 폴 울포위츠(Paul Wolfowitz)가 이라크 공격을 제안했다. 당시 국무장관 콜린 파월(Colin Powell)이 반대하여 우선순위가 아프가니스탄으로 결정되었지만, 이라크는 이미 어젠다 위에 올라 있었다.
대량살상무기(WMD) 논쟁
이라크 침공의 공식적 명분은 세 가지였다: 대량살상무기(WMD) 보유, 알카에다와의 연계, 그리고 이라크 국민의 해방. 이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WMD 주장이었다.
2002년 10월, 미국 국가정보평가(NIE)는 이라크가 화학·생물학 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핵무기 프로그램을 재개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이 평가에는 중요한 유보 조건과 반대 의견이 담겨 있었다. 국무부 정보조사국(INR)은 핵 프로그램 재개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고, 에너지부는 알루미늄 관이 원심분리기가 아닌 로켓용이라고 판단했다. 이러한 내부 이견은 정책 결정자들에 의해 축소되거나 무시되었다.
2003년 2월 5일,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이라크의 WMD 보유 증거를 제시하는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위성사진, 감청 녹음, 망명자 증언 등이 동원되었다. 파월은 후에 이 프레젠테이션을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뼈아픈 오점”이라고 회고했다. 핵심 정보원 중 하나인 ‘커브볼(Curveball)’이라는 암호명의 이라크 망명자는 후에 자신의 증언이 허위였음을 인정했다.
유엔 무기사찰단(UNMOVIC) 단장 한스 블릭스(Hans Blix)는 이라크에서 WMD의 결정적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하며 사찰 시간을 더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이를 기다리지 않았다. 프랑스, 독일, 러시아는 무력 사용을 승인하는 유엔 결의안에 반대했고, 결국 새로운 결의안 없이 침공이 결정되었다.
국내외의 반전 여론
2003년 2월 15일, 전 세계 약 600개 도시에서 수백만 명이 참가한 반전 시위가 벌어졌다. 기네스북은 이를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시위로 기록했다. 런던에서 약 100만 명, 로마에서 약 300만 명, 바르셀로나에서 약 130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미국 내에서도 뉴욕에서 수십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그러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국민의 다수(약 60~70%)는 여전히 이라크 전쟁을 지지했다. 9·11의 충격이 아직 생생했고, 이라크와 9·11을 연결하는 (근거 없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실제로 2003년 초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약 70%가 사담 후세인이 9·11에 “개인적으로 관여”했다고 믿고 있었다.

이라크 전쟁: ‘이라크 자유 작전’
침공과 신속한 군사적 승리
2003년 3월 20일(현지 시각), 미국과 영국을 주축으로 한 ‘유지연합(Coalition of the Willing)’이 이라크 침공을 개시했다.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 작전이라 불린 대규모 공습이 바그다드를 비롯한 주요 도시를 강타했다. 약 13만 명의 미군, 4만 5천 명의 영국군, 2천 명의 오스트레일리아군이 주로 쿠웨이트에서 북상하는 경로로 진격했다.
군사적 진격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이라크 정규군은 조직적 저항을 거의 하지 못했다. 4월 3일 바그다드 국제공항이 점령되었고, 4월 9일에는 바그다드 중심부의 피르도스 광장에서 사담 후세인의 동상이 끌어내려지는 장면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이 이미지는 전쟁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동상 주변에 모인 이라크인의 수는 수백 명에 불과했고, 미 해병대 장갑차가 끌어내린 것이었다. 타크리트가 4월 15일 함락되면서 주요 전투 작전은 사실상 종료되었다.
5월 1일, 부시 대통령은 항공모함 USS 에이브러햄 링컨호 갑판 위에서 ‘임무 완수(Mission Accomplished)’ 현수막을 배경으로 주요 전투 작전의 종료를 선언했다. 이 장면은 이후 이라크 전쟁의 가장 유명한—그리고 가장 비판받는—이미지 중 하나가 되었다. 주요 전투에서의 미군 전사자는 약 140명이었지만, 이후 점령 기간 동안의 사상자는 이 숫자를 수십 배 넘어서게 된다.
전후 계획의 부재: 해체 명령과 권력 공백
이라크에서의 진정한 재앙은 ‘전후’에 시작되었다. 미국은 군사적 승리에 필요한 자원과 계획은 충분히 갖추었지만, 전후 이라크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준비는 극히 부족했다. 국무부가 미리 준비한 ‘이라크의 미래(The Future of Iraq)’ 보고서는 국방부에 의해 사실상 무시되었다.
2003년 5월, 연합군임시행정처(CPA) 수장으로 부임한 폴 브레머(L. Paul Bremer III)가 내린 두 가지 명령이 이후 수년간의 혼란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 CPA 명령 1호 (5월 16일): ‘탈바스화(De-Ba’athification)’ — 바스당(Ba’ath Party) 상위 4개 계급의 당원 약 3만~5만 명을 모든 공직에서 해임했다. 문제는 사담 시대의 이라크에서 교사, 의사, 공무원이 되려면 바스당 당적이 거의 필수였다는 점이다. 이 명령은 단순한 정치적 숙청을 넘어 국가 행정 기능의 마비를 초래했다.
- CPA 명령 2호 (5월 23일): 이라크 군대 해체 — 약 40만 명의 이라크 군인과 50만 명의 내무부·정보기관 인력이 하루아침에 실직했다. 무기를 다룰 줄 아는 수십만 명의 젊은 남성이 소득원과 사회적 지위를 잃고 거리로 내몰렸다. 이들 중 상당수가 이후 반미 무장 세력의 핵심 인력이 되었다.
미국 군사·외교 관계자 다수가 이 두 명령에 반대했다. 당시 중부사령부 사령관이었던 제이 가너(Jay Garner) 중장은 이라크군을 유지하여 치안과 재건에 활용하자고 주장했으나 교체되었다. 이 결정의 배경에는 이라크 망명자 아흐마드 찰라비(Ahmad Chalabi)를 비롯한 인사들의 영향력과, ‘깨끗한 출발’을 원했던 네오콘 정책 입안자들의 이념이 작용했다.
약탈과 무정부 상태
바그다드 함락 직후 대규모 약탈이 발생했다. 이라크 국립박물관에서는 약 15,000점의 유물이 도난당했다(이 중 상당수는 이후 회수됨). 정부 청사, 병원, 대학이 조직적으로 약탈되었다. 당시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자유란 지저분한 것(Freedom’s untidy)”이라며, “같은 화병이 도둑맞는 장면을 TV에서 반복 재생하는 것”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이 발언은 미국이 이라크의 전후 상황을 얼마나 경시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점령과 저항: 이라크의 나선형 하강
수니파 저항 운동의 부상
사담 후세인 정권은 소수 수니파(이라크 인구의 약 20%)가 다수 시아파(약 60%)와 쿠르드족(약 15~20%)을 지배하는 구조였다. 바스당 해체와 군대 해산은 수니파 커뮤니티 전체를 권력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곧바로 수니파 중심의 무장 저항으로 이어졌다.
2003년 후반부터 이라크 중부의 ‘수니 삼각지대(Sunni Triangle)’—바그다드 북서쪽의 팔루자, 라마디, 모술, 티크리트 등을 잇는 지역—에서 급조폭발물(IED) 공격, 매복, 자살 폭탄 테러가 급증했다. 저항 세력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했다: 전직 바스당원과 이라크군 출신의 민족주의적 저항 세력, 부족 기반의 무장 집단, 그리고 외국인 전사를 포함한 지하디스트 조직 등이 뒤섞여 있었다.
이 중 가장 파괴적인 세력은 요르단 출신의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Abu Musab al-Zarqawi)가 이끄는 ‘이라크 알카에다(AQI, al-Qaeda in Iraq)’였다. 알자르카위는 시아파를 ‘이교도’로 규정하고 종파 간 전면전을 도발하는 전략을 취했다. 외국인 인질 참수, 시아파 모스크 폭탄 테러, 민간인 밀집 지역에서의 자살 공격 등 극도의 잔혹함을 무기로 사용했다. 이는 알카에다 본부의 빈 라덴과 알자와히리조차 “과도하다”고 우려할 정도였다.
팔루자 전투: 점령의 분기점
2004년 3월 31일, 팔루자에서 블랙워터(Blackwater) 소속 민간 군사기업 요원 4명이 무장 세력에 의해 살해된 뒤 불에 태워진 시신이 유프라테스강 다리에 매달렸다. 이 충격적 이미지는 미국 내 여론을 분노로 이끌었고, 미군은 팔루자에 대한 첫 번째 군사 작전(‘경계하는 결의 작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민간인 피해에 대한 국제적 비난과 이라크 정부의 반발로 작전은 중단되었다.
2004년 11월, 약 13,500명의 미군과 이라크군이 투입된 두 번째 팔루자 전투(‘유령의 분노 작전’)가 벌어졌다. 이는 2003년 이후 이라크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시가전이었으며, 1968년 베트남전 후에(Hue) 전투 이후 미 해병대가 겪은 가장 격렬한 전투로 기록되었다. 약 한 달간의 전투 끝에 미군은 도시를 장악했지만, 팔루자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고 약 20만 명의 시민이 이미 피난을 떠난 상태였다. 미군 측 사상자는 전사 95명, 부상 560명이었고, 저항 세력 사살자는 약 1,200~2,000명으로 추정된다.
아부 그라이브: 도덕적 권위의 붕괴
2004년 4월, CBS 뉴스와 뉴요커 매거진이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의 수감자 학대 사진을 공개했다. 미군 병사들이 이라크 수감자들에게 가한 비인간적 처우—벌거벗은 채 인간 피라미드를 쌓게 하거나, 개를 이용한 위협, 성적 굴욕, 두건을 씌우고 전선에 연결한 채 상자 위에 세워놓은 사진 등—가 전 세계에 공개되면서, 이라크 전쟁의 도덕적 명분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미군은 이를 일부 하급 병사들의 일탈로 규정하려 했다. 실제로 군사재판을 받은 것은 11명의 병사에 불과했으며, 최고 형량은 10년형(찰스 그래너 하사)이었다. 그러나 독립 조사와 이후 공개된 문서들은 학대가 구조적이었음을 시사했다. ‘강화된 심문 기법(Enhanced Interrogation Techniques)’이라는 이름으로 위에서 승인된 고문 기법들—수면 박탈, 스트레스 자세, 워터보딩(물고문) 등—이 관타나모에서 이라크와 아프간의 수용소로 전파되었다는 증거가 드러났다. 2014년 미 상원 정보위원회가 발표한 이른바 ‘고문 보고서’는 CIA의 구금 및 심문 프로그램이 “잔인하고 효과적이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아부 그라이브는 아랍·이슬람 세계에서 미국의 이미지를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손상시켰다. ‘해방자’를 자처했던 미국이 사담 후세인의 악명 높은 수용소(아부 그라이브는 사담 시대에도 고문소로 악명 높았다)에서 똑같은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쟁의 도덕적 근거를 근본에서부터 허물었다.
종파 내전: 2006~2007년의 피바다
2006년 2월 22일, 이라크 사마라의 알아스카리 모스크가 폭탄 공격으로 파괴되었다. 시아파의 가장 성스러운 성지 중 하나인 이 모스크의 황금 돔이 무너지면서, 그동안 간헐적이던 종파 간 폭력이 전면적 내전으로 비화했다. 시아파 민병대(특히 무크타다 알사드르의 마흐디군과 바드르 여단)가 수니파 민간인에 대한 보복 살해를 시작했고, 수니파 무장 세력은 시아파 지역에 차량 폭탄을 터뜨렸다.
바그다드는 종파에 따른 ‘민족 청소’의 현장이 되었다. 혼합 거주 지역에서 소수 종파 주민이 협박당하거나 살해되어 쫓겨나고, 도시는 수니파 지역과 시아파 지역으로 갈라졌다. 콘크리트 방벽이 동네 사이에 세워졌다. 2006년과 2007년 바그다드 시체안치소에 도착한 시신 중 상당수가 손이 묶인 채 머리에 총을 맞거나 전기드릴로 고문당한 흔적이 있었다. 유엔 이라크 지원 미션(UNAMI)은 2006년 한 해 동안 이라크에서 약 34,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폭력으로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이라크 반군과의 전투 및 종파 내전으로 인한 총 민간인 사상자 수에 대해서는 여러 추정이 있다. 이라크 바디 카운트(Iraq Body Count) 프로젝트는 문서화된 민간인 사망자 수를 약 18만~20만 명(2003~2021년)으로 집계했다. 의학 저널 란셋(Lancet)에 게재된 2006년 연구는 그 시점까지 약 65만 명의 초과 사망을 추정했으나, 이 수치는 방법론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어떤 수치를 택하든, 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가 막대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전환점들: 증파, 사담 처형, 빈 라덴 사살
사담 후세인의 체포와 재판
2003년 12월 13일, 사담 후세인은 자신의 고향 티크리트 인근 아드다우르 마을의 농가 지하 은신처에서 미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초췌한 모습의 사담이 미군 의료진에게 검진받는 영상이 공개되면서, 한때 중동 최강의 독재자였던 인물의 몰락이 세계에 확인되었다.
2004년 이라크 특별재판소가 설치되어 재판이 시작되었다. 사담은 1982년 두자일(Dujail) 마을 주민 148명을 학살한 혐의를 포함한 반인도적 범죄로 기소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사담은 법정의 권위를 거부하며 자신이 여전히 이라크의 합법적 대통령이라고 주장했다. 2006년 11월 5일 사형이 선고되었고, 12월 30일 이드 알아드하(이슬람 희생제) 첫날 새벽에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사형 집행의 시기와 방식은 논란을 일으켰다. 시아파 성지 순례의 시작일에 맞춘 것은 종파적 의도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집행 현장에서 촬영된 비공식 휴대전화 영상에는 교수대 위의 사담에게 “무크타다(알사드르의 이름)!”를 외치는 참관인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이 영상은 처형이 사법적 절차라기보다 종파적 복수에 가까웠다는 인상을 강화했고, 일부 수니파와 아랍 세계에서는 사담에 대한 동정론을 되살렸다.
증파(The Surge)와 ‘각성 운동’
2006년 말, 이라크 상황은 최악이었다. 미국 내 여론은 전쟁 반대로 급격히 기울었고,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상·하원 모두 장악했다. 제임스 베이커와 리 해밀턴이 이끈 초당파 ‘이라크 연구 그룹’은 2006년 12월 보고서에서 이라크 상황을 “심각하고 악화되고 있다”고 진단하며 외교적 해결과 점진적 철수를 권고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반대 방향을 택했다. 2007년 1월, 약 20,000명의 추가 병력을 투입하는 ‘증파(The Surge)’ 전략을 발표했다. 새로운 사령관으로 부임한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David Petraeus) 장군은 대반란(counterinsurgency, COIN) 전략을 적용했다. 핵심은 적을 사살하는 것에서 민간인을 보호하는 것으로 우선순위를 전환하는 것이었다. 미군은 기지에서 나와 이라크 주민 사이에서 생활하며 신뢰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증파의 효과는 군사적 요인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결정적인 것은 2006년 말부터 이라크 서부 안바르 주(팔루자, 라마디가 속한 주)의 수니파 부족장들이 알카에다(AQI)에 등을 돌리고 미군과 협력하기 시작한 ‘안바르 각성 운동(Sahwa, Anbar Awakening)’이었다. AQI의 극단적 폭력과 부족 자치에 대한 억압이 원인이었다. 미국은 이 부족 전사들에게 월급을 주고 ‘이라크의 아들들(Sons of Iraq)’ 프로그램으로 조직화했다. 최대 약 10만 명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증파와 각성 운동의 결합으로 2007년 후반부터 폭력 수준이 눈에 띄게 감소했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이 ‘성공’이 지속 가능한 정치적 해결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수니파 각성 전사들은 시아파 주도 중앙정부에 대한 불신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고, 이라크 정부가 이들을 정규 군경에 편입시키겠다는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이 미이행의 분노가 훗날 IS 부상의 한 원인이 된다.
오사마 빈 라덴 사살
2011년 5월 2일(파키스탄 현지 시각), 미국 해군 특수전개발단(DEVGRU, 통칭 SEAL Team Six)이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의 주거 단지를 급습하여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했다. ‘해왕성의 창(Operation Neptune Spear)’이라는 암호명의 이 작전은 파키스탄 정부에 사전 통보 없이 수행되었다—파키스탄 정보부 내 빈 라덴 보호 세력의 존재를 우려한 조치였다.
빈 라덴은 이슬라마바드에서 약 50km, 파키스탄 육군사관학교에서 불과 1.3km 떨어진 3층 건물에서 수년간 거주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파키스탄의 공모 또는 무능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미국과 파키스탄의 관계는 이 사건을 계기로 최악으로 악화되었다.
빈 라덴의 사살은 상징적 의미가 컸으나, 이 시점에서 알카에다는 이미 분산화된 네트워크로 변모해 있었다. 알카에다 아라비아반도(AQAP), 알카에다 이슬라마그레브(AQIM), 알샤바브(소말리아) 등 지역 지부가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빈 라덴의 직접적인 작전 통제력은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그의 죽음은 ‘테러와의 전쟁’의 상징적 종결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WMD는 없었다: 전쟁 명분의 붕괴
이라크 조사 그룹의 최종 보고
이라크 침공 후 미국이 가장 먼저 수행한 과업 중 하나가 대량살상무기의 수색이었다. 1,400명으로 구성된 이라크 조사 그룹(Iraq Survey Group, ISG)이 약 18개월간 조사한 끝에 2004년 10월 발표한 ‘듈퍼 보고서(Duelfer Report)’의 결론은 명확했다:
- 이라크는 1991년 이후 핵무기 프로그램을 보유하지 않았다.
- 화학무기 비축은 1991년 걸프전 이후 폐기되었으며, 2003년 시점에서 활성 화학무기 생산 시설은 없었다.
- 생물무기 프로그램도 1996년 이후 중단되었다.
- 사담 후세인은 유엔 제재가 해제되면 WMD 프로그램을 재개할 의향은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 능력은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즉, 전쟁의 핵심 명분이었던 WMD는 존재하지 않았다. 부시 대통령 자신도 2005년 12월 “전쟁 결정의 대부분은 결함이 있는 것으로 밝혀진 정보에 기반한 것”이라고 인정했다. 영국에서는 2016년 발표된 칠콧 보고서(Chilcot Report)가 토니 블레어 총리의 전쟁 결정을 7년에 걸쳐 조사한 끝에 “군사 행동이 최후의 수단이 아니었다”, “평화적 대안이 소진되지 않았다”, “전후 계획이 완전히 부적절했다”고 결론지었다.
두 번째 명분의 허구: 이라크-알카에다 연계
전쟁의 두 번째 명분이었던 사담 후세인 정권과 알카에다의 연계 주장도 근거가 없었음이 확인되었다. 9·11 위원회는 2004년 보고서에서 이라크와 알카에다 사이에 “협력적 관계의 증거가 없다”고 명시했다. 실제로 세속 민족주의자인 사담 후세인과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인 알카에다는 이념적으로 상극이었다. 빈 라덴은 사담을 ‘배교적 사회주의자’로 간주했고, 사담은 자국 내 이슬람 극단주의를 철저히 탄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라크 전쟁은 이 연계를 사후적으로 만들어냈다. 전쟁이 없었다면 이라크에 발을 디디지 못했을 알카에다가, 점령에 따른 혼란을 틈타 이라크에 진출했고, 이는 결국 더 위험한 IS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IS(이슬람국가)의 부상과 몰락
알카에다 이라크에서 IS로의 변이
알자르카위는 2006년 6월 미군 공습으로 사살되었지만, 그가 세운 조직은 진화를 계속했다. ‘이라크 이슬람국가(ISI)’로 개칭한 이 조직은 2010년경 이라크 내에서 크게 약화되었으나,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았다. 2010년 이후 이라크 총리 누리 알말리키(Nouri al-Maliki)의 수니파 배제 정책이 수니파 지역의 불만을 극도로 고조시켰고, 이는 ISI가 다시 세를 확장하는 토양이 되었다.
2011년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자 ISI는 시리아로 확장하여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ISIS)’를 선포했다.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Abu Bakr al-Baghdadi)의 지휘 아래 조직은 시리아 내전의 혼란을 이용해 급속히 세력을 확대했다. 2014년 6월, ISIS는 이라크 제2의 도시 모술을 전격 점령했다. 인구 200만의 대도시를 약 1,500명의 전사가 장악한 것은 이라크 군대의 와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었다—이라크군 수만 명이 싸우지 않고 달아났다.
2014년 6월 29일, 알바그다디는 모술의 대모스크(알누리 모스크)에서 ‘칼리프국(Caliphate)’의 수립을 선포하고 스스로를 ‘칼리프’라 칭했다. 이는 1924년 아타튀르크가 오스만 칼리프 제도를 폐지(44화에서 다룬 바 있다)한 이후 약 90년 만에 누군가가 그 칭호를 주장한 것이었다. IS(이슬람국가)로 이름을 단축한 이 조직은 전성기에 이라크와 시리아에 걸쳐 약 10만 km²의 영토(영국의 면적에 가까운)를 지배하며 약 800만~1,200만 명의 인구를 통치했다.
IS의 통치와 잔혹성
IS는 단순한 테러 조직이 아닌 준국가(proto-state)로서 기능하려 했다. 세금을 징수하고, 법원을 운영하고, 화폐를 주조하려 시도했으며, 석유 밀매로 하루 최대 300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그러나 그 통치의 실상은 극도의 잔혹함이었다. 공개 참수, 십자가형, 화형, 투석형이 일상적으로 집행되었다. 야지디(Yazidi) 소수민족에 대한 조직적 학살과 여성 성노예화는 유엔에 의해 제노사이드(집단학살)로 규정되었다. 서방 인질의 참수 영상을 전문적으로 제작하여 소셜 미디어에 유포하는 선전 전략은 전 세계에 공포를 확산시켰다.
IS의 문화유산 파괴도 기록해야 한다. 이라크의 님루드(아시리아 유적, 6화에서 다룬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중 하나), 하트라(파르티아 시대 도시, 유네스코 세계유산), 시리아의 팔미라(13화에서 다룬 사막의 교역 도시) 등 고대 유적이 의도적으로 파괴되었다. IS는 이를 ‘우상 파괴’라 정당화했지만, 동시에 약탈한 유물을 암시장에서 판매하여 자금원으로 활용했다.
IS에 대한 국제 연합과 영토 탈환
2014년 8월, 미국은 IS에 대한 공습을 개시했다. 이후 약 80개국이 참여하는 대IS 국제연합(CJTF-OIR)이 결성되었다. 지상전은 주로 이라크군, 쿠르드 페슈메르가, 시아파 민병대(인민동원군), 그리고 시리아에서는 쿠르드 주도의 시리아민주군(SDF)이 수행했다.
영토 탈환은 느리지만 꾸준히 진행되었다. 2016년 10월 시작된 모술 탈환전은 약 9개월이 걸린 참혹한 시가전이었다. 2017년 7월 모술이 해방되었을 때, 도시의 상당 부분이 폐허로 변해 있었다. 2017년 10월에는 IS의 사실상 수도였던 시리아 라카(Raqqa)가 탈환되었고, 2019년 3월 시리아 동부 바구즈에서 마지막 영토 거점이 함락되면서 IS의 ‘칼리프국’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알바그다디는 2019년 10월 미군 특수부대 작전 중 자폭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IS의 이념과 네트워크는 소멸하지 않았다. 영토를 잃은 뒤에도 IS는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비정규전(게릴라/테러)을 계속하고 있으며, 서아프리카, 동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의 지부가 여전히 활동 중이다.
미국의 철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이라크 철수와 재개입
2008년 미국과 이라크는 주둔군지위협정(SOFA)을 체결하여 2011년 말까지 모든 미군 전투 병력의 철수에 합의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 합의를 이행하여 2011년 12월 18일 마지막 미군 전투 부대가 이라크를 떠났다. 그러나 2014년 IS의 급부상으로 미군은 다시 이라크에 투입되었다—이번에는 전투 부대가 아닌 ‘고문 및 지원’ 임무로. 이 미군 주둔은 규모를 줄여가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20년 전쟁의 종결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은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이 되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아프간에도 ‘증파’를 실시하여 미군 병력을 최대 10만 명까지 늘렸으나, 탈레반을 결정적으로 패퇴시키지는 못했다. 2020년 2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탈레반과 도하 협정을 체결하여 14개월 내 미군 완전 철수에 합의했다—아프간 정부는 이 협상에서 배제되었다.
2021년 8월, 조 바이든 대통령의 철수 결정에 따라 미군이 떠나자 탈레반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진격했다. 미국 정보기관은 아프간 정부가 수개월은 버틸 것으로 예측했으나, 실제로는 11일 만에 카불이 함락되었다. 8월 15일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이 해외로 도주하고 탈레반이 대통령궁에 입성하는 장면이 중계되었다. 카불 공항에서의 혼란스러운 철수 과정—이륙하는 C-17 수송기에 매달린 아프간 시민들의 영상, 공항 입구에서의 자살 폭탄 테러(미군 13명 포함 약 170명 사망)—은 ‘테러와의 전쟁’ 20년의 결말을 상징하는 비극적 이미지로 남았다.
미국이 20년간 아프가니스탄에 투입한 비용은 약 2조 3,000억 달러(브라운 대학교 ‘전쟁 비용 프로젝트’ 추정)에 달했다. 아프간 국군에 약 900억 달러를 투자하여 30만 명 규모의 군대를 양성했지만, 이 군대는 미국의 떠남과 함께 불과 며칠 만에 증발했다. 탈레반은 20년 전과 같은 통치를 다시 시작했다—여성의 중등 이상 교육 금지, 여성 취업 제한, 음악 금지 등. 아프간 전쟁의 2,400여 명 미군 전사자, 약 47,000명의 아프간 민간인 사망자, 그리고 수백만 난민의 희생 위에 남은 것은 원점 회귀라는 쓰라린 현실이었다.
‘테러와의 전쟁’ 20년의 대차대조표
인적·경제적 비용
브라운 대학교 ‘전쟁 비용(Costs of War)’ 프로젝트의 2021년 추정에 따르면,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 관련 전쟁으로 인한 직접 사망자는 최소 약 90만~93만 명에 달한다. 이 중 미군 전사자는 약 7,000명(아프간 약 2,400명, 이라크 약 4,500명, 기타 지역), 미국 민간 계약자 약 8,000명, 연합군 약 1,700명, 현지 군경 수만 명, 반군/테러 조직원 수만 명, 그리고 민간인이 약 38만~40만 명이다. 간접 사망(전쟁으로 인한 질병, 영양실조, 의료 시설 파괴 등)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수배로 늘어난다.
경제적 비용도 천문학적이다. 같은 프로젝트는 2001년 이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에 지출한 총비용을 약 8조 달러 이상으로 추정했다(직접 군사비, 참전 군인 의료비, 국토안보 강화 비용, 전쟁 관련 이자 비용 포함). 이라크 전쟁만으로도 약 2조 달러 이상이 소요되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와 린다 빌메스(Linda Bilmes)는 2008년 저서에서 이라크 전쟁의 장기적 총비용을 3조 달러 이상으로 추산한 바 있다.
난민과 이주
이라크 전쟁으로 약 930만 명의 이라크인이 실향민이 되었다(유엔난민기구 추정 기준 최대치). 이 중 약 270만 명이 국외 난민이 되어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 등 인근 국가로 피난했다. 시리아 내전과 IS의 부상은 추가적인 대규모 난민 사태를 야기했다—시리아 난민은 2015년까지 약 470만 명에 달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도 탈레반 복귀 이후 수십만 명이 탈출을 시도했다.
2015년 유럽 난민 위기의 핵심 원인은 시리아 내전이었지만, 그 시리아 내전은 이라크 전쟁과 ‘테러와의 전쟁’이 만들어낸 불안정의 연장선에 있었다. IS의 유럽 내 테러 공격—2015년 파리(130명 사망), 2016년 브뤼셀(32명 사망), 2016년 니스(86명 사망) 등—은 유럽 내 반이민·반이슬람 정서를 강화시켰고, 이는 유럽 정치 지형의 우경화에 기여했다.
지정학적 변화
‘테러와의 전쟁’ 20년은 중동의 지정학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재편했다:
- 이란의 부상: 이라크 전쟁의 최대 지정학적 수혜자는 역설적으로 이란이었다. 미국이 이란의 두 주요 적—동쪽의 탈레반과 서쪽의 사담 후세인—을 제거해 주었다. 시아파 다수의 이라크에서 이란의 영향력이 급격히 확대되었고, 시리아·레바논·예멘까지 이르는 이란의 ‘저항의 축(Axis of Resistance)’ 영향권이 강화되었다.
- 아랍 국가 체제의 약화: 이라크의 국가 기능이 붕괴되고, 시리아가 내전에 빠지면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42~43화에서 다룬) 중동 국가 체계의 근간이 흔들렸다. IS가 이라크-시리아 국경을 지우고 ‘칼리프국’을 선포한 것은 이 약화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 쿠르드 세력의 성장: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KRG)는 사담 정권 몰락 이후 사실상의 자치국가로 발전했다. 시리아에서도 로자바(서부 쿠르드스탄) 자치 지역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2017년 이라크 쿠르드 독립 투표의 좌절이 보여주듯, 독립 국가로의 전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비국가 행위자의 부상: 헤즈볼라(레바논), 하마스(가자), 후티(예멘), 인민동원군(이라크) 등 비국가 무장 조직의 역할이 전례 없이 커졌다. 국가와 비국가 행위자의 경계가 모호해진 것이 ‘테러와의 전쟁’ 시대 중동의 특징이다.
- 미국의 중동 개입 의지 감소: 이라크·아프간의 경험은 미국 내에서 중동 군사 개입에 대한 깊은 회의를 남겼다. 오바마의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바이든의 아프간 철수 결정은 모두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테러리즘은 패배했는가?
‘테러와의 전쟁’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테러의 위협은 줄어들었는가? 답은 복잡하다.
긍정적 측면에서, 9·11 규모의 대형 테러 공격은 서방 세계에서 재발하지 않았다. 알카에다의 중앙 조직은 크게 약화되었고, IS의 ‘칼리프국’은 해체되었다. 국제 정보 협력과 대테러 역량은 크게 향상되었다.
부정적 측면에서, 테러 조직의 수와 활동 범위는 오히려 확대되었다. 글로벌 테러리즘 지수(GTI)에 따르면, 전 세계 테러로 인한 사망자 수는 2001년 이후 오히려 증가했다가 2014년 정점을 찍은 뒤 감소 추세에 있지만, 2001년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이라크 전쟁은 그 자체로 지하디스트 모집의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미국 국가정보평가(NIE)는 2006년에 이미 “이라크 전쟁이 전반적인 테러 위협을 증가시켰다”고 결론지은 바 있다.
근본적으로, ‘테러와의 전쟁’은 군사적 수단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군사적으로 접근한 결과였다. 테러리즘의 근본 원인—정치적 소외, 경제적 불평등, 억압적 통치, 외세 개입에 대한 분노—은 20년의 전쟁으로 해소되기는커녕 많은 경우 악화되었다.
전쟁이 남긴 유산: 중동과 세계
이라크의 현재
2020년대의 이라크는 여전히 전쟁의 상흔 속에 있다. 형식적으로는 민주적 선거가 치러지고 연립정부가 구성되지만, 종파·민족 할당제에 기반한 정치 체제(무하사사, Muhasasa)는 구조적 부패와 비효율을 낳고 있다. 2019년 10월에는 부패와 실업에 분노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이른바 ’10월 혁명’, Tishreen Movement)가 바그다드와 남부 도시에서 벌어졌으며, 치안 부대의 진압으로 약 600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부상당했다.
이란의 영향력은 이라크 정치·군사 양면에서 광범위하다.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 카셈 솔레이마니가 2020년 1월 바그다드에서 미군 드론 공격으로 사살된 사건은, 이라크가 미국과 이란의 대리전 무대가 되어 있음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라크는 주권 국가이면서도 자국 영토에서 벌어지는 외국 간의 군사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회귀
탈레반의 복귀는 20년간의 투자와 희생이 무위로 돌아갔음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비관론자들은 아프간이 2001년의 원점으로 돌아갔다고 본다. 낙관론자들은 아프간 사회가 20년간 변화했으며—교육받은 세대, 확산된 통신 기술, 도시화—이 변화가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아프간 여성과 소수민족이 겪고 있는 억압은 명확하다.
국제법과 규범의 손상
‘테러와의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축된 국제법 질서에도 심각한 손상을 남겼다. 유엔 안보리의 명시적 승인 없는 이라크 침공은 ‘예방 전쟁(preventive war)’이라는 선례를 남겼다. 관타나모 수용소의 무기한 구금, ‘강화된 심문 기법’이라는 이름의 고문, 무인기(드론)를 이용한 국경 밖의 표적 살해 등은 전쟁법과 인권법의 기존 틀에 도전했다. 미국이 자국의 안보를 위해 국제법을 선택적으로 적용하는 모습은, 다른 국가들에게도 유사한 논리로 국제 규범을 무시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중동 내부의 변화
그러나 중동의 모든 변화를 ‘테러와의 전쟁’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2010~2011년의 아랍의 봄(다음 차수에서 다룰 주제)은 ‘테러와의 전쟁’의 직접적 결과라기보다는 중동 사회 내부에 축적된 불만의 폭발이었다. 다만 이라크 전쟁이 보여준 기존 질서의 취약성, 소셜 미디어의 확산, 그리고 ‘변화가 가능하다’는 인식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은 사실이다.
걸프 산유국들—사우디아라비아, UAE, 카타르—은 ‘테러와의 전쟁’ 시기에 경제적으로 급성장하며 지역 질서에서의 발언권을 키웠다. 특히 사우디의 무함마드 빈 살만(MBS) 왕세자와 UAE의 무함마드 빈 자이드(MBZ)는 ‘테러와의 전쟁’ 이후 형성된 권력 공백을 자국의 영향력 확대에 활용하며, 예멘 내전 개입, 카타르 외교 단절,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아브라함 협정) 등 이전 세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외교적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역사가 던지는 질문들
9·11과 이라크 전쟁,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 20년을 돌아보면 몇 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남는다.
첫째, 전쟁은 답이었는가? 9·11이라는 초유의 공격에 대한 군사적 대응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아프가니스탄의 알카에다 근거지를 타격한 것에는 광범위한 국제적 합의가 있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20년 국가 건설 프로젝트와 이라크 침공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결정이었다. 특히 이라크 전쟁은 거짓 명분에 기반한 선택의 전쟁(war of choice)이었으며, 그 결과는 해결하려 했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를 만들어냈다.
둘째, 누가 대가를 치렀는가? 미국의 젊은 군인들과 그 가족들은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그러나 가장 큰 대가를 치른 것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일반 시민들이었다. 전쟁을 결정한 사람들과 전쟁의 대가를 치른 사람들 사이의 간극은 ‘테러와의 전쟁’의 가장 불편한 진실 중 하나다.
셋째, 교훈은 학습되었는가? 이라크 전쟁의 실패에서 미국과 국제사회가 배운 교훈은 시리아 내전에 대한 소극적 대응으로 나타났지만, 이는 또 다른 인도적 재앙을 방치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개입의 위험과 불개입의 위험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찾을 것인가는 여전히 답 없는 질문이다.
넷째, 중동의 미래는 어디로 향하는가? ‘테러와의 전쟁’은 중동의 기존 질서를 파괴했지만 새로운 안정적 질서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이란과 사우디의 경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시리아의 재건 과제, 이라크의 국가 통합, 아프간의 인권 상황—이 모든 문제가 ‘테러와의 전쟁’의 유산 위에 겹겹이 쌓여 있다.
9·11 이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우리 편이 아니면 테러리스트 편”이라는 이분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역사는 세계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테러와의 전쟁’이 중동에 남긴 가장 큰 교훈은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복잡한 문제에 대한 단순한 해법은 대개 문제를 악화시킨다.
다음 51화에서는 ‘아랍의 봄’과 시리아 내전을 다룬다. 2010년 말 튀니지의 작은 도시에서 시작된 혁명의 불꽃이 어떻게 중동 전역을 휩쓸었는지, 그리고 왜 대부분의 나라에서 ‘봄’은 겨울로 변했는지—그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이미지는 Leonardo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이미지는 Claude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 이전 49화 (다음 차수는 아직 게시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