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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역사] 48/52화: 이란 혁명 1979: 왕정을 무너뜨린 이슬람 공화국의 탄생

1979년 이란 혁명 왕정 붕괴와 민중 봉기 일러스트

왕의 시대가 끝나고, 성직자의 시대가 열리다

지난 47화에서 우리는 네 차례 중동전쟁이 지역의 지도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아랍 산유국들이 석유 무기화에 나서면서 세계 경제는 격동에 휩싸였고, 이 석유 붐의 최대 수혜국 중 하나가 바로 이란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6년 뒤인 1979년, 그 풍요로운 이란에서 세계사를 바꾼 혁명이 일어납니다.

1979년 이란 혁명은 20세기 후반 가장 극적인 정치 변동 중 하나입니다. 2,500년 이어져 온 왕정 체제가 무너지고, 세계 역사상 최초로 시아파 이슬람 성직자가 통치하는 신정(神政) 공화국이 탄생했습니다. 냉전 시대 미국의 가장 충실한 중동 동맹이 하룻밤 사이에 가장 강력한 적대 세력으로 변했고, 이 사건은 이후 중동 전체의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재편했습니다.

이번 48화에서는 이란 혁명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리고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전례 없는 정치 실험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했는지를 살펴봅니다. 이를 위해서는 혁명 이전 반세기에 걸친 팔라비 왕조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팔라비 왕조의 등장: 근대 이란의 출발점

레자 칸, 군인에서 왕이 되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이란을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는 극심한 쇠퇴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영국과 러시아가 이란을 사실상의 반식민지로 분할 관리했고, 중앙 정부의 권위는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1905~1911년 입헌혁명으로 의회(마즐레스)가 설립되었지만, 외세 간섭과 내부 분열로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습니다.

이 혼란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레자 칸(Reza Khan)이었습니다. 이란 북부 마잔다란 출신의 직업 군인이었던 그는 영국이 훈련시킨 코사크 여단의 장교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1921년 2월, 레자 칸은 쿠데타를 일으켜 테헤란을 장악했고, 이후 4년에 걸쳐 차근차근 권력을 공고히 한 끝에 1925년 12월 마즐레스의 승인을 받아 카자르 왕조를 폐위하고 스스로 샤(Shah, 왕)에 올랐습니다. 이것이 팔라비(Pahlavi) 왕조의 시작이었습니다.

레자 샤는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44화에서 다룬 바 있습니다)를 롤모델로 삼아 급진적인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전국 도로망과 트랜스이란 철도 건설, 테헤란 대학교 설립, 사법 체계의 세속화, 여성의 베일 착용 금지(1936년 ‘캐시프에 헤자브’ 칙령) 등 위로부터의 개혁을 밀어붙였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시아파 성직자(울라마) 계급의 권한은 크게 축소되었고, 반대 세력에 대한 가혹한 탄압이 이어졌습니다.

냉전의 그림자: 모함마드 레자 샤의 즉위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레자 샤가 나치 독일에 우호적 태도를 보이자 영국과 소련이 이란을 공동 점령했습니다. 레자 샤는 강제 퇴위되어 남아프리카로 추방되었고, 그의 아들 모함마드 레자 팔라비(Mohammad Reza Pahlavi)가 2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때부터 이란 혁명까지 38년간 이어지는 이 젊은 왕의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초기의 모함마드 레자 샤는 아버지만큼 강력한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전후 이란 정치는 다양한 세력이 경합하는 비교적 개방적인 시기를 맞았고, 이 시기에 이란 현대사의 결정적 사건 중 하나인 석유 국유화 운동이 일어납니다.

1953년 석유 국유화와 쿠데타를 상징하는 일러스트

모사데크와 석유 국유화: 1953년 쿠데타의 그림자

1940년대 말, 이란의 석유는 영국 자본의 앵글로-이라니안 석유회사(AIOC, 후일의 BP)가 사실상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이란 정부가 받는 로열티는 미미했고, 이란인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1951년 3월, 국민전선(National Front)의 지도자 모함마드 모사데크(Mohammad Mosaddegh)가 총리로 취임하면서 석유 국유화 법안을 전격 통과시켰습니다.

모사데크는 세속적 민족주의자이자 법률가로,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란의 석유 수익을 이란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약속으로 폭발적인 대중적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고, 이란 석유에 대한 국제적 보이콧을 조직하며 경제적 압박에 나섰습니다.

냉전의 논리가 여기에 개입했습니다. 이란의 경제 위기가 심화되면서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미국의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영국의 요청에 응했습니다. 1953년 8월, CIA(작전명 ‘아약스’)와 영국 MI6가 공동으로 기획한 쿠데타가 실행되었습니다.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지만, 며칠 뒤 두 번째 시도에서 모사데크 정부는 전복되었습니다. 모사데크는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고, 가택 연금 상태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1953년 쿠데타는 이란 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미국과 영국의 개입으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무너졌다는 사실은 이란 국민들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었고, 이후 반미·반서방 감정의 원류가 되었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야 미국 국무부는 이 쿠데타에서의 역할을 공식 인정했습니다.

모함마드 레자 샤의 절대 권력: 백색혁명에서 억압까지

백색혁명(1963): 위로부터의 근대화

1953년 쿠데타 이후 권좌에 복귀한 모함마드 레자 샤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독재 체제를 강화한 그는 1963년 1월, 이란 역사상 가장 야심찬 개혁 프로그램인 ‘백색혁명(Enqelāb-e Sefid)’을 국민투표에 부쳤습니다.

백색혁명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토지 개혁: 대지주의 토지를 정부가 매입하여 소작농에게 분배. 봉건적 토지 구조를 해체하겠다는 목표였습니다.
  • 산림 국유화: 국토의 산림과 목초지를 국가 관리 하에 두는 조치.
  • 국영 기업 민영화: 일부 국영 기업의 주식을 노동자와 민간에 매각.
  • 이익 분배 제도: 산업체 노동자들에게 이윤의 일부를 분배하는 제도 도입.
  • 여성 참정권: 여성에게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부여.
  • 문맹 퇴치 군단(Literacy Corps): 징병된 고등교육 이수자들을 농촌에 파견하여 문맹 퇴치 교육.

표면적으로 이 개혁들은 진보적이었습니다. 토지 개혁은 봉건 체제 해체를 목표로 했고, 여성 참정권은 이란의 근대화 수준을 끌어올렸으며, 문맹률은 실제로 크게 낮아졌습니다. 그러나 실제 집행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들이 드러났습니다.

토지 개혁은 의도와 달리 농촌 공동체를 파괴했습니다. 분배받은 토지가 너무 작아 자립이 불가능한 농민들은 결국 땅을 팔고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테헤란 남부에는 거대한 빈민가가 형성되었고, 이 도시 빈민층은 훗날 혁명의 핵심 동력이 됩니다. 또한 토지 개혁 과정에서 시아파 종교 재단(와크프)의 토지도 대거 몰수되면서 성직자 계급의 경제적 기반이 흔들렸습니다.

성직자 계급의 반발과 호메이니의 등장

백색혁명에 가장 강렬하게 반대한 인물이 바로 루홀라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였습니다. 당시 60세의 고위 시아파 성직자(아야톨라)였던 호메이니는 곰(Qom)의 종교 학교에서 강의하고 있었습니다.

호메이니의 반대는 단순히 성직자 계급의 이익 수호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백색혁명을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도구로 규정했고, 샤의 세속화 정책이 이슬람의 근본 가치를 훼손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여성 참정권과 종교 재단 토지 몰수, 그리고 미군에 대한 치외법권 부여(이른바 ‘지위협정’)에 격렬히 반대했습니다.

1963년 6월 3일(이슬람력으로 무하람월, 시아파의 가장 신성한 애도의 달), 호메이니는 곰에서 샤를 직접 비판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이 연설에서 그는 샤를 야지드(680년 카르발라에서 후세인을 살해한 우마이야 칼리프 — 17화 참조)에 비유하며, 이란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식민지가 되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이 연설은 시아파의 역사적 기억과 현실의 정치적 불만을 결합한 것으로, 이란 대중에게 강력한 감정적 호소력을 가졌습니다.

호메이니는 즉시 체포되었고, 이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습니다. 1963년 6월 5일(이란력 호르다드 15일, ‘호르다드 15일 봉기’로 불립니다), 정부는 군대를 투입해 시위를 진압했습니다. 공식 사망자는 수십 명이었으나, 반체제 측은 수백에서 수천 명이 희생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 사건은 샤 정권과 시아파 성직자 계급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결렬의 시작이었습니다.

1964년 11월, 미군의 이란 내 치외법권을 보장하는 ‘지위협정(SOFA)’ 법안이 마즐레스를 통과했습니다. 호메이니는 이를 “이란의 주권을 미국에 팔아넘기는 행위”라고 격렬히 비난했고, 샤 정권은 그를 터키로 추방했습니다. 호메이니는 이후 이라크 남부의 나자프로 이동했는데, 이곳은 시아파의 최고 성지 중 하나로 이맘 알리의 묘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14년간 망명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정치사상을 체계화하고, 이란 내부의 반체제 네트워크와 연락을 유지했습니다.

이란 혁명 주요 사건 타임라인 인포그래픽

SAVAK: 공포의 비밀경찰

샤의 통치를 뒷받침한 핵심 기구는 SAVAK(사바크, Sāzemān-e Ettelā’āt va Amniyat-e Keshvar, ‘국가정보안보기구’)이었습니다. 1957년 CIA와 이스라엘 모사드의 지원 하에 설립된 SAVAK은 이란 현대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기관이 되었습니다.

SAVAK의 활동 범위는 사실상 제한이 없었습니다. 정치적 반대 세력의 감시, 체포, 심문, 그리고 암살까지 자행했습니다.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는 1970년대 이란을 세계 최악의 인권 침해국 중 하나로 지목했으며, 1976년 보고서에서 SAVAK이 체계적인 고문을 행하고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추산에 따르면 SAVAK은 수만 명의 정보원을 운영했으며, 대학, 직장, 심지어 가정 내부까지 침투한 감시망을 구축했습니다.

SAVAK의 탄압은 좌파 세력(투데당 — 이란 공산당, 무자헤딘에 할크, 페다이얀에 할크)과 종교 세력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수천 명의 정치범이 에빈 감옥에 수감되었고, 많은 이들이 고문으로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무차별적 탄압은 세속 좌파와 종교 세력이라는 전혀 다른 두 반체제 흐름을 공통의 적(샤 정권)에 대항하여 연대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습니다.

석유 붐과 그 모순: 풍요 속의 불만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석유 가격이 네 배로 급등하면서 이란은 막대한 오일머니를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이란은 OPEC의 주도적 회원국으로서 유가 인상의 최대 수혜국이었습니다. 샤는 이 돈으로 이란을 ‘중동의 일본’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비전을 추진했습니다.

대규모 산업화 프로젝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핵발전소 건설 계획(부셰르), 대규모 석유화학 단지, 최신 군사 장비 도입(미국산 F-14 전투기, 영국제 전차 등) — 1970년대 이란의 군사비 지출은 세계 최상위권이었습니다. 테헤란의 스카이라인에는 현대적 고층 빌딩이 들어섰고, 상류층은 서구식 라이프스타일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이 겉보기의 번영 이면에는 심각한 구조적 모순이 누적되고 있었습니다.

  • 극심한 빈부격차: 석유 수익의 대부분이 왕실과 소수 엘리트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샤의 팔라비 재단은 이란 최대 기업체로, 국가 경제의 상당 부분을 통제했습니다. 왕실 가족과 측근들의 부정부패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 인플레이션과 주거난: 석유 수익이 급격히 유입되면서 물가가 치솟았고, 특히 테헤란의 부동산 가격은 서민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올랐습니다. 식료품 가격 상승은 도시 빈민층의 생활을 압박했습니다.
  • 문화적 소외감: 급격한 서구화는 전통적 가치관을 가진 많은 이란인들에게 정체성의 위기를 야기했습니다. 테헤란 북부의 서구화된 상류층 문화와 남부 빈민가의 전통적 생활 사이의 괴리는 같은 도시 안에서도 극명했습니다.
  • 정치적 자유의 부재: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표현의 자유는 전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1975년 샤는 모든 정당을 해산하고 단일 정당 체제(레스타히즈당)를 선포했는데, 이는 오히려 합법적 정치 참여의 마지막 통로마저 막아버렸습니다.

미국 학자 에르반드 아브라하미안(Ervand Abrahamian)이 지적했듯이, 혁명 전 이란의 핵심 모순은 “경제적 근대화와 정치적 독재의 결합”이었습니다. 샤는 사회를 빠르게 변화시키면서도 그 변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사회 세력(교육받은 중산층, 도시 노동자, 대학생)에게 정치적 발언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호메이니의 정치사상: ‘법학자의 통치(벨라야트에 파키)’

나자프에서 다듬어진 혁명 이론

이라크 나자프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호메이니는 단순한 반체제 성직자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슬람 정치사상사에서 혁명적이라 할 만한 새로운 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1970년, 나자프의 종교 학교에서 행한 일련의 강의를 정리한 저서 『이슬람 정부: 법학자의 통치(Hokumat-e Eslami: Velayat-e Faqih)』가 그것입니다.

호메이니의 핵심 주장은 이러했습니다. 시아파 신학에서 열두 번째 이맘(마흐디)은 874년에 ‘은폐(가이바)’에 들어갔으며, 그가 돌아올 때까지 무슬림 공동체는 올바른 지도자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전통적으로 시아파 성직자들은 이 기간 동안 정치 권력과 거리를 두는 ‘정교분리적’ 태도를 취해왔습니다 — 세속 권력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며, 완전한 정의는 마흐디의 귀환에 의해서만 실현된다는 관점이었습니다.

호메이니는 이 전통적 해석에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그는 은폐 기간에도 이슬람 법(샤리아)은 시행되어야 하며, 이를 올바르게 시행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는 이슬람 법학에 정통한 최고위 성직자(파키, 법학자)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이슬람 공동체의 정치적 최고 권위는 왕이나 대통령이 아니라 법학자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벨라야트에 파키(Velāyat-e Faqih)’, 즉 ‘법학자의 통치’ 이론입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 이슬람 사회의 최고 지도자는 종교법에 정통한 법학자여야 한다.
  • 이 법학자는 은폐된 이맘을 대리하여 정치·사법·군사 전반의 최종 결정권을 갖는다.
  • 왕정은 이슬람과 양립할 수 없으며, 이란의 2,500년 왕정 전통 자체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 서구 민주주의도, 마르크스주의도 아닌 이슬람 자체가 완전한 정치·사회 시스템을 제공한다.

이 이론은 시아파 성직자 사회 내부에서도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최고위 성직자(마르자에 타클리드) 중 상당수는 성직자의 직접적 정치 통치에 반대했으며, 이라크의 대아야톨라 아볼가셈 호이(Abu al-Qasim al-Khoei)를 비롯한 주류 학자들은 정교분리적 전통을 고수했습니다. 그러나 호메이니의 이론은 이란 내의 젊은 성직자들과 종교적 학생 운동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카세트테이프 혁명

호메이니의 강의와 연설은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되어 이란 국내에 밀반입되었습니다. 1970년대의 카세트테이프는 오늘날의 소셜 미디어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SAVAK의 검열을 피해 모스크에서 모스크로, 바자르(시장)에서 바자르로, 가정에서 가정으로 전달되었습니다. 호메이니 특유의 단호하고 직설적인 연설 스타일은 녹음을 통해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 ‘카세트테이프 혁명’은 기술이 정치 변혁의 도구가 된 초기 사례로 평가됩니다. 중앙집중적 미디어(텔레비전, 라디오, 신문)가 국가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던 시대에, 소형 녹음 장치라는 분산형 매체가 반체제 메시지의 확산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혁명의 전개: 1977~1979년

1977년: 균열의 시작

1970년대 중반, 국제 석유 시장의 변동으로 이란 경제에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975~1976년 석유 수익이 예상치를 밑돌자 샤 정권은 긴축 정책으로 전환했고, 이는 건설 붐의 급격한 위축과 대량 실업으로 이어졌습니다. 동시에 인플레이션은 여전히 높아 서민 경제가 이중으로 압박받았습니다.

국제적 환경도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1977년 1월 취임한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인권 외교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이는 이란에 미묘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SAVAK의 인권 침해가 국제적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샤는 카터 행정부의 눈치를 살피며 제한적이나마 정치적 공간을 열어주었습니다. 정치범 일부가 석방되고, 국제 인권 단체의 감옥 방문이 허용되었습니다.

이 좁은 틈을 통해 반체제 운동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1977년 가을, 지식인과 변호사 그룹이 공개 서한을 통해 정치적 자유화를 요구했습니다. 시인 밤다드와 작가 알레 아흐마드의 유산을 잇는 문학적·지적 저항이 공개적 형태를 띠기 시작한 것입니다.

1978년 1월: 곰(Qom)의 발화

혁명의 직접적 도화선은 1978년 1월 7일 정부 관영 신문 에텔라아트(Ettelā’āt)에 실린 한 편의 기사였습니다. ‘이란과 적과 흑의 식민주의(Iran and Red and Black Colonialism)’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호메이니를 인도 출신의 영국 첩자로 묘사하며, 그의 과거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 기사의 배후에는 샤의 측근인 궁정부 장관 호베이다(Hoveyda)가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의도는 호메이니의 신망을 떨어뜨리는 것이었으나, 효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곰의 신학생들이 즉각적인 항의 시위에 나섰고, 경찰의 발포로 여러 명이 사망했습니다(정확한 숫자는 논란 — 정부 측은 2명, 반체제 측은 70명 이상을 주장).

여기서 시아파의 독특한 문화적 관행이 혁명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아파 전통에서는 사망 후 40일(아르바인, چهلم)에 추모 행사를 거행합니다. 곰 희생자들의 아르바인인 2월 18일, 타브리즈에서 대규모 추모 시위가 벌어졌고 다시 유혈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 희생자들의 아르바인에는 또 다른 도시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다시 유혈 사태와 추모가 이어지는 ’40일 주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40일 주기는 1978년 내내 반복되면서 시위의 규모와 지리적 범위를 점진적으로 확대했습니다. 곰 → 타브리즈 → 야즈드 → 이스파한 → 시라즈 → 마슈하드… 매 40일마다 새로운 도시에서 더 큰 시위가 일어났고, 매번 정부의 진압은 새로운 희생자를 만들어 다음 40일 주기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이 패턴은 샤 정권이 폭력적 진압도, 유화적 양보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했습니다.

1978년 8월: 시네마 렉스 화재 — 아바단의 비극

1978년 8월 19일, 남부 도시 아바단의 시네마 렉스 극장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400명 이상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극장 문이 바깥에서 잠겨 있었고, 소방대의 대응이 극히 늦었다는 점에서 방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샤 정권은 이슬람 과격파의 소행이라고 발표했지만, 대부분의 이란 국민은 SAVAK이 배후라고 믿었습니다. 진실은 오늘날까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으나(혁명 이후 재판에서 한 남성이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논란이 계속됨), 당시의 정치적 효과는 명확했습니다. 시네마 렉스 참사는 샤 정권에 대한 마지막 남은 대중적 신뢰마저 무너뜨렸습니다.

검은 금요일(1978년 9월 8일): 돌이킬 수 없는 선

1978년 9월 8일은 이란 혁명사에서 ‘검은 금요일(جمعه سیاه)’로 기억됩니다. 전날 밤 샤는 테헤란에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이 소식이 모든 시민에게 전달되지는 못했습니다. 9월 8일 아침, 테헤란 남부 잘레(Jaleh) 광장에 수천 명의 시위대가 모였고, 군대가 발포했습니다.

사망자 수는 극단적으로 엇갈립니다. 정부 측 발표는 87명이었으나, 반체제 측은 수천 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학계에서는 수백 명 선으로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숫자의 정확성과 별개로, 검은 금요일의 정치적 의미는 절대적이었습니다. 샤 정권이 비무장 시민에게 군대를 투입하여 총격을 가했다는 사실은 이란 사회에 충격파를 보냈습니다.

검은 금요일 이후 혁명 운동은 양적·질적으로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습니다. 중산층과 바자르 상인(바자리)들이 대거 합류했고, 석유 산업 노동자들의 파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란 경제의 생명줄인 석유 생산이 마비되기 시작한 것은 샤 정권에 치명적이었습니다.

1978~79년 테헤란 거리를 가득 메운 혁명 시위대

1978년 10~12월: 총파업과 체제의 마비

1978년 가을, 이란은 사실상의 총파업 상태에 돌입했습니다. 석유 산업 노동자들이 먼저 파업에 들어갔고, 이어서 은행, 언론, 정부 기관, 공장, 학교가 문을 닫았습니다. 바자르 상인들은 가게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바자르의 파업은 경제적 타격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란에서 바자르는 단순한 시장이 아니라 전통적 경제 네트워크이자 사회적 결절점이었으며, 모스크·성직자 계급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석유 생산량이 일일 600만 배럴에서 사실상 제로에 가까운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국가 수입의 90% 이상을 석유에 의존하던 이란 경제가 마비되었고, 샤 정권은 기본적인 국가 운영조차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11월 5일, 테헤란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면서 영국 대사관과 여러 은행, 서구식 상점이 불탔습니다. 샤는 군사 정부를 수립하고 아즈하리(Azhari) 장군을 총리로 임명했지만, 군사 정부도 파업을 막지 못했습니다. 샤는 텔레비전에 출연해 “나는 혁명의 메시지를 들었다”고 말했지만, 이 늦은 양보는 이미 효력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타수아와 아슈라: 백만 인의 행진(1978년 12월)

1978년 12월 10~11일은 이슬람력 무하람월의 타수아(9일)와 아슈라(10일)에 해당했습니다. 아슈라는 680년 카르발라에서 예언자 무함마드의 손자 후세인이 우마이야 군대에 의해 순교한 날로, 시아파에서 가장 신성한 애도의 날입니다(17화 참조).

이 이틀 동안 테헤란에서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추산은 다양하지만, 100만에서 200만 명이 거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당시 테헤란 인구가 약 450만이었음을 고려하면, 도시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거리에 나온 것입니다.

시위대는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 “마르그 바르 샤(샤에게 죽음을)”, “호메이니 라흐바르(호메이니가 지도자다)”를 외쳤습니다. 카르발라의 후세인 서사는 자연스럽게 현재의 투쟁과 겹쳐졌습니다. 샤는 현대의 야지드, 시위에 참여하는 민중은 후세인의 추종자, 그리고 순교한 시위대는 카르발라의 순교자와 동일시되었습니다. 시아파의 종교적 기억이 혁명적 정치 행동의 언어이자 동력으로 전환된 것입니다.

이 거대한 시위는 사실상 샤 정권에 대한 국민투표와 같았습니다. 군부 역시 이 규모의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호메이니, 이라크에서 파리로

1978년 10월, 혁명의 열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은 이란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호메이니를 추방했습니다. 호메이니는 여러 아랍 국가를 타진한 끝에 프랑스 파리 근교 느플르샤토(Neauphle-le-Château)에 거처를 정했습니다.

파리 이동은 역설적으로 호메이니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나자프에서는 이란과의 통신이 제한적이었으나, 파리에서는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국제 전화로 이란 내부와 실시간 소통이 가능해졌습니다. BBC 페르시아어 방송, 각국 특파원들의 인터뷰, 국제 전화 — 호메이니는 파리의 작은 집에서 사실상 혁명의 원격 지휘부를 운영했습니다.

서방 언론에 비치는 호메이니의 이미지도 중요했습니다. 그는 사과나무 아래에서 소박하게 앉아 있는 영적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서방 기자들에게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약속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이란 내의 세속적 자유주의자들과 좌파 세력도 호메이니를 샤를 몰아내기 위한 상징적 구심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 혁명 이후의 이란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서는 각자 다른 기대를 품고 있었지만, ‘반(反)샤’라는 하나의 목표 아래 일시적으로 연합한 것입니다.

1979년 1월 16일: 샤의 출국

1978년 말, 샤는 마지막 카드를 꺼냈습니다. 자유주의 성향의 샤푸르 바흐티아르(Shapour Bakhtiar)를 총리로 임명한 것입니다. 바흐티아르는 모사데크 시절 국민전선에서 활동한 인물로, 정치범 석방, SAVAK 해체, 이스라엘과의 단교, 석유의 남아프리카 수출 중단 등 과감한 조치를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바흐티아르를 지지하는 세력은 거의 없었습니다. 국민전선은 그를 제명했고, 호메이니는 그를 ‘불법 정부’의 수반으로 규정하며 일체의 협력을 거부했습니다. 혁명의 기세는 이미 어떤 타협도 받아들이지 않는 수준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1979년 1월 16일, 모함마드 레자 샤 팔라비는 눈물을 흘리며 이란을 떠났습니다. 공식적으로는 ‘휴양’이었지만, 모든 사람이 그것이 영원한 이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공항에서 이란의 흙 한 줌을 손에 쥐고 비행기에 오르는 샤의 모습은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중계되었습니다.

테헤란 거리에서는 즉각적인 환호가 터져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자동차 경적을 울리고, 과자를 나누어 먹으며, 샤의 동상을 끌어내렸습니다. 파흘라비 왕조의 54년(레자 샤부터) 혹은 38년(모함마드 레자 샤부터)의 통치가 사실상 막을 내린 순간이었습니다.

이슬람 공화국의 탄생: 1979년 2~4월

호메이니의 귀환(2월 1일)

1979년 2월 1일, 호메이니는 14년 4개월간의 망명을 끝내고 이란으로 돌아왔습니다. 에어프랑스 특별기가 테헤란 메라바드 공항에 착륙했을 때, 공항과 시내를 잇는 거리에는 수백만 명의 인파가 운집해 있었습니다. 외신 기자들은 그 인파를 300만에서 600만으로 추산했는데, 이는 테헤란 역사상 가장 큰 군중이었습니다.

비행기에서 기자가 물었습니다. “이란으로 돌아온 소감이 어떻습니까?” 호메이니는 “히치(هیچ) — 아무것도”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유명한 일화는 다양하게 해석되었지만, 호메이니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개인적 감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 즉 이 순간이 개인의 귀환이 아니라 신의 뜻이 실현되는 과정이라는 종교적 관점의 표현이었습니다.

호메이니는 곧바로 테헤란 남부의 베헤슈테 자흐라 묘지(혁명 희생자들이 묻힌 곳)를 방문하여 연설했습니다. 이 연설에서 그는 바흐티아르 정부를 “불법”으로 선언하고, “내가 정부를 임명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이 선언은 이란에 두 개의 권력 중심이 병존하는 ‘이중 권력’ 상황의 공식적 시작이었습니다.

이중 권력과 2월 혁명(바흐만 22일)

2월 4일, 호메이니는 메흐디 바자르간(Mehdi Bazargan)을 임시 정부 총리로 임명했습니다. 바자르간은 경건한 무슬림이면서도 프랑스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교육받은 기술관료로, 자유주의적 이슬람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호메이니가 바자르간을 선택한 것은 온건한 이행을 원하는 중산층과 서방에 대한 안심 메시지였습니다.

이제 이란에는 바흐티아르의 샤 임명 정부와 바자르간의 호메이니 임명 정부가 동시에 존재했습니다. 이 상황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2월 9~11일이 결정적이었습니다. 2월 9일 밤, 테헤란 외곽의 파라하바드 공군기지에서 기술하사관들(호마파얀)이 봉기했습니다. 이들은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호메이니의 귀환 영상에 감동받은 젊은 기술병들로, 기지 내에서 호메이니 지지 시위를 벌였습니다. 샤에게 충성하는 근위대(자벤단)가 이들을 진압하려 했으나 시민들이 기지 주변에 몰려들며 충돌이 확대되었습니다.

2월 10일, 군부 최고사령부는 결정적 순간에 직면했습니다. 전면적 군사 개입으로 혁명을 진압할 것인가, 아니면 중립을 선언할 것인가. 미국은 이란 군부에 상반된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국가안보보좌관은 군사적 강경 대응을 지지했고,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은 유혈 사태 방지를 우선시했습니다. 결국 카터 대통령은 명확한 지침을 주지 못했고, 혼란 속에서 이란 군부는 2월 11일 오후 “정치적 분쟁에서 중립을 지킨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선언은 혁명의 군사적 승리를 의미했습니다. 무장한 시민들이 경찰서와 군 시설에서 무기를 탈취했고, SAVAK 본부와 정부 청사가 점령되었습니다. 바흐티아르 총리는 은신처로 도피했고(이후 프랑스로 망명), 에빈 감옥의 문이 열려 정치범들이 풀려났습니다. 1979년 2월 11일(이란력 바흐만 22일), 혁명이 승리한 것입니다.

이슬람 공화국 국민투표(1979년 3~4월)

혁명 직후의 이란은 다양한 정치 세력이 경합하는 혼란스러운 상태였습니다. 호메이니를 따르는 이슬람주의 세력, 바자르간과 같은 자유주의적 이슬람주의자, 국민전선의 세속 민족주의자, 투데당(공산당), 무자헤딘에 할크(이슬람-마르크스주의), 페다이얀에 할크(마르크스-레닌주의), 쿠르드족·아제리족·아랍계의 소수민족 운동 등이 혁명 이후의 이란을 두고 각자의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호메이니는 가장 조직적인 기반(모스크 네트워크, 바자르 상인, 도시 빈민층)과 가장 강력한 대중적 카리스마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혁명의 방향을 신속하게 결정하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1979년 3월 30~31일,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습니다. 투표 용지에는 단 하나의 질문만 있었습니다: “이전의 군주제를 이슬람 공화국으로 대체하는 데 동의합니까?” 선택지는 ‘예(녹색)’와 ‘아니오(적색)’ 두 가지뿐이었습니다. ‘민주 공화국’이나 ‘이슬람 민주 공화국’ 같은 대안은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공식 결과는 98.2%의 찬성이었습니다. 투표율은 약 89%로 발표되었습니다. 이 결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비밀투표가 완전히 보장되지 않았다는 지적, 녹색(찬성)과 적색(반대) 용지의 시각적 비대칭성, 일부 지역에서의 협박 사례 등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나 혁명 직후의 열광적 분위기와 호메이니의 압도적 대중적 지지를 고려하면, 다수의 이란인이 실제로 이슬람 공화국을 지지했을 것이라는 것이 대부분 역사학자들의 평가입니다.

1979년 4월 1일, 호메이니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جمهوری اسلامی ایران, Jomhuri-ye Eslāmi-ye Irān)의 수립을 공식 선포했습니다. 이 날은 이후 이란의 국경일 ‘이슬람 공화국의 날’이 되었습니다.

이슬람 공화국의 구조: 신정과 공화의 이중 체제

1979년 헌법: 벨라야트에 파키의 제도화

이슬람 공화국의 헌법 제정 과정은 혁명 내부의 권력 투쟁이 압축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이었습니다. 초기에 바자르간 임시 정부가 준비한 헌법 초안은 비교적 온건한 내용이었습니다.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을 모델로 삼아 대통령제 공화국에 이슬람적 요소를 가미한 정도였고, 벨라야트에 파키는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호메이니는 이 초안의 심의를 위해 ‘전문가 회의(마즐레스에 호브레간)’를 소집했고, 선거를 통해 구성된 73인의 이 회의에서 이슬람주의 세력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습니다. 전문가 회의는 초안을 근본적으로 재작성하여 벨라야트에 파키를 헌법의 핵심 원리로 삽입했습니다.

1979년 12월 국민투표로 확정된 이란 이슬람 공화국 헌법의 핵심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 최고지도자(라흐바르): 국가의 최고 권위. 군 통수권, 사법부 수장 임명권, 국영 방송 통제권, 외교·국방 정책의 최종 결정권을 가짐. 벨라야트에 파키 원리에 따라 이슬람 법학에 정통한 성직자가 맡음.
  • 대통령: 국민 직접 선거로 선출. 행정부 수장이지만, 최고지도자에 종속. 임기 4년, 연임 1회 가능.
  • 이슬람 의회(마즐레스): 290석의 단원제 의회. 국민 직접 선거로 선출. 입법권을 가지되, 모든 법안은 헌법수호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함.
  • 헌법수호위원회(쇼라예 네가반): 6인의 이슬람 법학자(최고지도자 임명)와 6인의 일반 법률가(사법부 수장 추천, 의회 승인)로 구성. 의회 법안의 이슬람법·헌법 합치성 심사, 선거 후보자 자격 심사 권한.
  • 전문가 회의(마즐레스에 호브레간): 88인의 성직자로 구성. 국민 직접 선거로 선출(단, 후보자 자격은 헌법수호위원회가 심사). 최고지도자의 선출, 감시, 필요 시 해임 권한.
  • 사법부: 수장은 최고지도자가 임명. 이슬람법에 기반한 사법 체계 운영.
  • 혁명수비대(세파흐에 파스다란, IRGC): 정규군과 별개의 군사 조직. 혁명 체제 수호가 주 임무. 최고지도자 직속.

이 체계의 핵심은 ‘공화적’ 요소(대통령 선거, 의회)와 ‘신정적’ 요소(최고지도자, 헌법수호위원회)의 병존입니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신정적 요소가 공화적 요소를 통제하는 위계가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대통령과 의회가 있지만, 헌법수호위원회가 후보자를 걸러내고 법안을 거부할 수 있으며, 최고지도자가 최종적인 국가 의사결정권을 보유합니다.

호메이니 본인은 초대 최고지도자에 취임했습니다. 헌법에 따르면 최고지도자는 이슬람 법학의 최고 권위자(마르자에 타클리드)여야 했는데, 호메이니는 이 조건에 부합하는 가장 명백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란 이슬람 공화국 권력 구조 다이어그램

혁명위원회와 이슬람 법정: 혁명의 폭력적 측면

혁명 직후 전국 각지에 자생적으로 형성된 ‘혁명위원회(코미테)’와 ‘혁명 법정’은 혁명의 어두운 면을 보여줍니다. 구체제 인사들에 대한 재판이 급속히 진행되었고, 그 과정은 적법 절차의 기준에 크게 미달했습니다.

전 총리 호베이다, SAVAK 수장 나시리, 다수의 장성과 고위 관료가 혁명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습니다. 사디크 할할리(Sadegh Khalkhali) 판사가 주도한 이 재판들은 며칠, 때로는 몇 시간 만에 판결과 집행이 이루어졌으며, 변호인 접견권이나 항소 절차가 실질적으로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국제사면위원회와 인권 단체들은 이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혁명 초기 수개월간 수백 명이 처형된 것으로 추산되며, 구체제 인사뿐 아니라 동성애자, ‘간통자’ 등 이슬람 도덕법 위반자에 대한 처형도 포함되었습니다. 바자르간 임시 총리는 이 과정에 반대했지만 실질적 통제력이 없었습니다.

혁명의 급진화: 미국 대사관 인질 사태(1979~1981)

444일의 위기

1979년 11월 4일, ‘이맘의 노선을 따르는 학생들(Daneshjooyān-e Mosalmān-e Payrow-e Khatt-e Emām)’이라고 자칭하는 대학생 그룹이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52명의 미국 외교관과 직원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이 사건의 직접적 배경은 10월 22일 카터 대통령이 암 치료를 이유로 샤의 미국 입국을 허가한 것이었습니다. 이란인들은 1953년 쿠데타의 악몽을 떠올렸습니다. 미국이 다시 한번 샤를 복권시키려 한다는 공포가 확산되었고, 학생들은 대사관 점거를 통해 미국의 개입을 차단하고 샤의 송환을 요구했습니다.

호메이니는 초기에 이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으나, 대중적 열광을 보고 즉시 학생들의 행동을 승인했습니다. 그는 대사관을 ‘스파이의 소굴(لانه جاسوسی)’로 규정하고, 인질 사태를 ‘제2의 혁명’이라 불렀습니다.

인질 사태의 정치적 효과는 다층적이었습니다:

  • 국내 정치의 급진화: 인질 사태는 이란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급진파에게 결정적 우위를 제공했습니다. ‘반미’와 ‘혁명 순수성’이 정치적 리트머스 테스트가 되면서, 온건파인 바자르간 총리가 사임에 몰렸습니다. 바자르간은 알제리에서 열린 회의에서 미국 국가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와 악수한 사진이 공개되면서 정치적으로 매장되었습니다.
  • 헌법 투표 동원: 인질 사태 과정에서 반미 열기가 고조되었고, 이는 12월의 헌법 국민투표에서 벨라야트에 파키를 포함한 급진적 이슬람 헌법에 대한 압도적 찬성표로 이어졌습니다.
  • 미-이란 관계의 단절: 미국은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를 시작했고, 1980년 4월 외교 관계를 단절했습니다. 이 단절은 오늘날까지(2026년 현재) 지속되고 있으며, 중동 정치의 근본적 구조를 규정하는 축 중 하나입니다.
  • 카터 대통령의 정치적 몰락: 1980년 4월의 인질 구출 작전(이글 클로 작전)이 사막에서 참담하게 실패하면서, 카터 행정부의 무능함이 부각되었습니다. 이는 같은 해 11월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의 승리에 기여한 요인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인질들은 444일 만인 1981년 1월 20일, 레이건 대통령 취임식 당일에 석방되었습니다. 알제리의 중재로 타결된 이 합의의 타이밍은 카터에 대한 마지막 모욕이었고, 이란 혁명 정권의 반미 노선이 얼마나 철저한 정치적 계산에 기반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입니다.

혁명 이후의 이란: 내부 정리와 대외 충돌

반체제 세력 숙청과 ‘문화혁명’

1980~1981년, 이슬람 공화국은 혁명에 함께 참여했던 비이슬람주의 세력을 체계적으로 배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대통령 아볼하산 바니사드르(Abolhassan Banisadr, 1980년 1월 당선)는 호메이니에 의해 1981년 6월 해임되고 프랑스로 망명했습니다.

무자헤딘에 할크(MEK)는 1981년 6월부터 무장 투쟁에 나섰고, 이란 내에서 대규모 폭탄 테러를 자행하여 수십 명의 고위 관료가 사망했습니다. 이에 대한 정권의 보복은 가혹했습니다. 수천 명의 MEK 구성원과 지지자가 체포·처형되었습니다.

투데당(공산당) 역시 1983년 해산되고 지도부가 투옥되었습니다. 1988년에는 감옥에 수감 중이던 정치범 수천 명이 대량 처형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는 호메이니의 파트와(종교적 칙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 1988년 대학살의 규모는 오늘날까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으나, 인권 단체들은 수천 명에서 만 명 이상으로 추산합니다.

1980년 4월에는 ‘문화혁명’이 선포되어 전국의 대학이 2~3년간 폐쇄되었습니다. 이슬람 가치에 부합하도록 교육과정을 재편한다는 명목이었으며, 이 기간 동안 수천 명의 교수와 학생이 추방되었습니다.

여성에 대한 정책도 급격히 변화했습니다. 1979년 3월 8일(국제 여성의 날), 히잡 의무화에 반대하는 여성 시위가 벌어졌지만 결국 억압되었습니다. 1983년에는 공공장소에서의 히잡 착용이 법적으로 의무화되었고, 가족법이 개정되어 여성의 이혼 청구권과 양육권이 축소되었습니다. 가정법원의 여성 판사 임명이 금지되었고, 일부 직종에서 여성이 배제되었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 혁명의 시험대

1980년 9월 22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침공하면서 8년에 걸친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담은 혁명으로 군대가 약화된 이란을 상대로 빠른 승리를 기대했고, 이란 남서부의 석유 부국 후제스탄(아랍계 주민이 많은 지역)을 장악하려 했습니다.

이 전쟁은 본 시리즈의 범위를 넘어서는 별도의 방대한 주제이므로 상세히 다루지는 않지만, 이슬람 공화국의 형성에 미친 영향은 반드시 언급해야 합니다:

  • 체제 결집 효과: 외부의 침공은 혁명 직후 분열된 이란 사회를 국가 방어 아래 하나로 묶었습니다. ‘신성한 방어(Defā’-e Moqaddas)’로 명명된 이 전쟁은 이슬람 공화국에 민족주의적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 혁명수비대(IRGC)의 성장: 전쟁을 통해 IRGC는 정규군에 필적하는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고, 전후에는 경제·정치 영역으로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 바시지(Basij) 민병대: 자원 입대한 젊은이들(일부는 미성년자)로 구성된 바시지는 인해전술과 지뢰밭 돌파 등 막대한 인적 희생을 감수하는 전술로 투입되었습니다.
  • 전쟁의 트라우마: 이란 측 사망자는 18만~50만 명(추산에 따라 다름), 부상자는 수십만 명에 달했습니다. 이라크의 화학무기 사용(할라브자 학살 등)은 이란인들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습니다.

1988년 7월, 호메이니는 전쟁 종결을 위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 598호를 수락했습니다. 그는 이를 “독배를 마시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전쟁은 영토 변화 없이 끝났지만, 양국에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남겼습니다.

이란 혁명의 세계사적 의미

시아파 정치 이슬람의 탄생

이란 혁명은 시아파 정치 이슬람이 실제로 국가를 장악한 최초이자 아직까지 유일한 사례입니다. 34화에서 살펴본 사파비 왕조(1501~1736)가 시아파를 이란의 국교로 만들었다면, 1979년 혁명은 시아파 성직자가 직접 정치 권력을 행사하는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이 모델은 중동 전역의 시아파 공동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레바논의 헤즈볼라(1982년 창설), 이라크의 시아파 정치 운동, 바레인과 사우디 동부의 시아파 활동가들이 이란 혁명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동시에 이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수니파 왕정 국가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시아파 초승달(Shia Crescent)’ 담론과 수니-시아 대립의 지정학적 구조화에 기여했습니다.

이슬람 부활 운동에 대한 자극

이란 혁명은 시아파에 국한되지 않는 더 넓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수니파 세계에서도 이슬람이 서구적 세속 이데올로기(자유주의, 사회주의)의 대안으로서 정치적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사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1980~90년대 전 세계 무슬림 사회에서 일어난 이슬람 부활(Islamic Revival) 운동의 직접적 촉매 중 하나였습니다.

같은 해인 1979년 11월,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대모스크 점거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이란 혁명과 직접적 인과관계는 없었으나 이슬람 세계 전반의 급진화 추세를 보여주는 동시대적 현상이었습니다.

냉전 구도의 균열

이란 혁명은 냉전의 양극 구도에 맞지 않는 ‘제3의 길’을 제시했습니다. 호메이니는 미국을 ‘대(大)사탄’, 소련을 ‘소(小)사탄’으로 규정하며 “동도 아니고 서도 아닌 이슬람 공화국(نه شرقی، نه غربی، جمهوری اسلامی)”을 구호로 내걸었습니다. 이는 비동맹 운동과도 다른,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독자적 국제 정치 노선이었습니다.

미국에 이란 혁명의 충격은 심대했습니다. ‘닉슨 독트린’ 하에서 이란은 걸프 지역의 ‘쌍둥이 기둥(Twin Pillars)’ 중 하나(다른 하나는 사우디아라비아)로서 미국의 중동 전략의 핵심이었습니다. 이 기둥의 붕괴는 미국으로 하여금 걸프 지역에 대한 직접적 군사 개입 태세를 강화하도록 이끌었고, 이는 1991년 걸프전과 2003년 이라크 침공으로 이어지는 긴 연쇄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혁명 수출론과 그 한계

호메이니와 이란 혁명 정권은 초기에 ‘혁명 수출(Sodur-e Enqelāb)’을 공식 외교 노선으로 표방했습니다. 이란 헌법 제154조는 “세계의 피억압자(모스타자핀)를 지지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걸프 왕정 국가들과 이라크 바트당 정권의 강한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이란-이라크 전쟁의 배경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혁명 수출’은 실질적으로 제한적 성과에 그쳤습니다. 레바논(헤즈볼라)을 제외하면 다른 나라에서 이란 모델의 직접적 복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시아파가 소수인 나라에서 시아파 신정 모델의 호소력이 제한적이라는 구조적 한계 때문이기도 했고, 이란-이라크 전쟁의 소모로 혁명 수출에 투자할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호메이니의 사망과 이후의 이란

1989년 6월: 시대의 종말

1989년 6월 3일, 루홀라 호메이니가 86세로 사망했습니다. 장례식에는 수백만 명이 운집했고, 관에 달려드는 인파 때문에 시신이 관 밖으로 떨어지는 혼란까지 발생했습니다. 호메이니의 카리스마적 권위는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이었기에, 그의 사망은 이슬람 공화국 체제의 존속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체제는 생존했습니다. 호메이니 사망 하루 전, 전문가 회의는 알리 하메네이(Ali Khamenei, 당시 대통령)를 차기 최고지도자로 선출했습니다. 하메네이는 호메이니와 같은 학문적 권위(마르자에 타클리드)를 갖추지 못했기에, 1989년 헌법 개정을 통해 최고지도자의 종교적 자격 요건이 완화되었습니다. 이는 벨라야트에 파키 이론의 원래 정신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으나, 체제의 연속성을 위해 실용적 선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메네이는 이후 30년 이상(2026년 현재까지) 최고지도자직을 유지하며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안정적 존속을 이끌었습니다. 라프산자니, 하타미, 아흐마디네자드, 로하니, 라이시에 이르기까지 여러 대통령이 교체되었지만 최고지도자 체제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란 혁명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다층적 혁명의 성격

이란 혁명은 단순히 ‘이슬람 혁명’으로만 환원할 수 없는 복합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렌즈를 제시합니다:

  • 반식민·반제국 운동: 1953년 쿠데타 이후 누적된 반미·반서방 감정의 폭발. 미국이 지원하는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혁명.
  • 계급 투쟁: 석유 붐의 혜택에서 소외된 도시 빈민과 농촌 이주민의 분노. 극심한 빈부격차에 대한 반발.
  • 문화적 정체성 운동: 급격한 서구화에 따른 문화적 소외감. 전통적 가치와 이슬람적 정체성의 재확인.
  • 민주주의 요구: SAVAK의 억압과 정치적 자유 부재에 대한 저항. 입헌혁명(1906)과 모사데크 운동(1951~53)의 미완의 과제 계승.
  • 시아파 종교적 동력: 카르발라 서사에 기반한 순교와 저항의 전통이 혁명적 동원의 언어와 메커니즘을 제공.

이 다양한 흐름이 1977~1979년에 일시적으로 합류하여 샤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혁명 이후에는 이슬람주의 세력이 다른 모든 흐름을 제압하고 권력을 독점했습니다. 이란 혁명의 비극 중 하나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요구하며 독재를 무너뜨린 혁명이 결과적으로 또 다른 형태의 권위주의 체제를 만들어냈다는 점입니다.

이란 혁명이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 것

이란 혁명은 여러 면에서 현대사의 중요한 질문들을 제기합니다. 급격한 경제 성장이 정치적 자유 없이 지속 가능한가? 전통과 근대화는 양립할 수 있는가? 혁명은 약속한 것을 실현하는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억압을 낳는가? 종교는 정치의 도구인가, 아니면 정치가 종교의 도구인가?

2,500년의 왕정 전통을 가진 이란에서 성직자가 국가를 통치하는 실험은 이제 47년째를 맞고 있습니다. 이 실험의 최종적 평가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란의 미래는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다음 이야기: 레바논 내전과 팔레스타인 문제의 국제화

이란 혁명이 중동의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것과 같은 시기, 지중해 동안의 작은 나라 레바논에서는 종파 간 갈등이 15년에 걸친 내전으로 폭발하고 있었습니다. 레바논 내전은 중동의 모든 모순 — 종파 갈등,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외세 개입, 이스라엘의 팽창 — 이 한 나라 안에서 충돌한 축소판이었습니다. 49화에서는 레바논 내전을 통해 팔레스타인 문제가 어떻게 국제화되었는지, 그리고 이란 혁명의 산물인 헤즈볼라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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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즈: 중동의 역사 (총 52화 중 4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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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역사] 46/52화: 이스라엘 건국과 나크바: 1948년 같은 날 갈린 두 민족의 역사

1948년 이스라엘 독립과 나크바의 두 서사

들어가며 — 하나의 날짜, 두 개의 이름

1948년 5월 14일. 이 날짜는 중동 현대사에서 가장 깊은 균열선을 표시하는 좌표다. 한쪽에서는 ‘독립기념일(욤 하아츠마우트)’이라 부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대재앙(알나크바)’이라 부른다. 같은 24시간 동안 벌어진 사건이 어떻게 정반대의 이름으로 기억되는가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감정이 아닌 사실의 연쇄를 따라가야 한다.

지난 시간 우리는 사우디아라비아 건국과 석유의 발견을 살펴보며 아라비아반도에서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는 과정을 추적했다. 그러나 반도의 동쪽에서 석유가 분출하던 같은 시기, 지중해 동안의 좁은 땅에서는 전혀 다른 성격의 국가 건설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42화에서 다룬 밸푸어 선언(1917)의 약속, 43화에서 살펴본 영국 위임통치의 모순이 30년 동안 축적되어 마침내 폭발한 것이 바로 1948년의 사건이다.

이 글은 어느 한쪽의 ‘정의’나 ‘악의’를 판정하지 않는다. 대신 기록된 사실 — 문서, 통계, 증언, 유엔 결의문 — 을 시간순으로 배열하여 독자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제1장: 위임통치 말기 — 세 방향의 충돌(1936~1947)

1. 아랍 대봉기와 필 위원회(1936~1939)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에서는 1920년대부터 아랍 주민과 유대인 이민자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밸푸어 선언이 약속한 ‘유대인 민족 고향’과, 같은 땅에 이미 살고 있던 아랍 주민의 권리가 정면으로 충돌했기 때문이다.

1936년 4월, 팔레스타인 아랍 주민들은 대규모 총파업과 무장봉기를 시작했다. 이른바 ‘아랍 대봉기(Great Arab Revolt)’는 1939년까지 3년간 지속되었다. 봉기의 핵심 요구는 세 가지였다.

  • 유대인 이민의 즉각 중단
  • 유대인에 대한 토지 매각 금지
  • 독립 아랍 정부의 수립

영국은 봉기를 군사적으로 진압하면서 동시에 필 위원회(Peel Commission, 1937)를 파견해 상황을 조사했다. 필 위원회는 역사상 최초로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와 아랍 국가로 분할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유대 국가에는 갈릴리와 해안 평야의 약 20%를, 아랍 국가에는 나머지 대부분을 배정했고,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영국이 계속 관할하는 국제 구역으로 남겼다.

유대인 지도부(유대 기관, Jewish Agency)는 분할 원칙 자체는 수용하되 영토 비율에 불만을 표했다. 아랍 지도부는 분할 자체를 거부했다. 어떤 비율이든 자기 땅을 외부 이주민에게 떼어주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리였다. 필 위원회의 권고는 결국 실행되지 못했다.

2. 백서(White Paper)와 유대인 사회의 분노(1939)

봉기 진압 이후 영국은 1939년 5월 맥도널드 백서(MacDonald White Paper)를 발표했다. 이 문서의 핵심은 다음과 같았다.

  • 향후 5년간 유대인 이민을 연 15,000명으로 제한하고, 그 이후에는 아랍 측 동의 없이는 추가 이민 불허
  • 토지 매매를 특정 구역에서 제한 또는 금지
  • 10년 내에 아랍-유대 공동 독립국가 수립을 목표

이 백서는 사실상 밸푸어 선언의 후퇴였다. 유대인 지도부는 격렬히 반발했다. 특히 유럽에서 나치의 박해가 가속화되던 시점에 이민 문을 닫는다는 것은 유대인에게 사형선고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아랍 지도부 역시 백서를 불충분하다며 거부했다. 양측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한 영국의 정책은 위임통치의 구조적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3.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의 충격(1939~1945)

제2차 세계대전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도덕적·정치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유럽에서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이 나치에 의해 체계적으로 학살당한 홀로코스트(쇼아)는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규모의 대량학살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생존한 유대인 수십만 명이 유럽의 ‘이산민 수용소(DP camps)’에 갇혀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 팔레스타인은 유일하게 남은 희망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1939년 백서의 이민 제한을 여전히 유지했고, 불법 이민선을 나포하여 승객들을 키프로스의 억류 수용소로 보냈다.

1947년 7월의 ‘엑소더스(Exodus)’ 사건은 이 모순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4,515명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태운 배가 팔레스타인 해안에 도착했으나, 영국 해군에 의해 나포되어 승객들은 다시 독일의 수용소로 강제 송환되었다. 이 사건은 국제 여론을 크게 자극했고, 영국의 위임통치에 대한 비판이 전 세계적으로 고조되었다.

영국 위임통치 말기 팔레스타인의 긴장

4. 유대인 무장 조직의 활동(1944~1947)

전쟁 말기부터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무장 조직들은 영국 위임통치에 대한 무장 투쟁을 본격화했다. 주요 조직은 세 개였다.

  • 하가나(Haganah): 유대 기관 산하의 준군사 조직으로 약 3만~4만 명 규모. 공식 지도부의 통제 아래 상대적으로 규율 있는 활동을 했다.
  • 이르군(Irgun, 에첼): 수정주의 시온주의 노선의 무장 조직. 지도자는 후일 이스라엘 총리가 되는 메나헴 베긴이었다.
  • 레히(Lehi, 스턴 갱): 이르군에서 분리된 소규모 극단 조직. 이츠하크 샤미르가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1946년 7월 22일, 이르군은 영국 위임통치 행정부와 군사령부가 입주한 예루살렘의 킹 데이비드 호텔을 폭파했다. 이 공격으로 91명이 사망했는데, 사망자에는 영국인, 아랍인, 유대인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은 영국 본국에서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피로감을 극대화시켰다.

아랍 측에서도 무장 활동이 있었다. 1936~1939년 봉기의 전통을 이은 비정규 전투원들이 유대인 정착촌과 수송대를 공격했고, 주변 아랍 국가에서도 의용군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5. 영국의 손 떼기 — 유엔으로 넘어간 문제(1947년 2월)

아랍과 유대인 양쪽의 무장 공격, 국제 여론의 압력, 전후 경제난 속에서 더 이상 팔레스타인을 관리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한 영국은 1947년 2월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이관한다고 선언했다. 30년간 유지한 위임통치를 포기한 것이다.

유엔은 즉시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UNSCOP, United Nations Special Committee on Palestine)를 구성했다. 11개국 대표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1947년 여름 동안 팔레스타인 현지를 조사하고 양측의 입장을 청취했다. 주목할 점은, 아랍고등위원회(Arab Higher Committee)는 UNSCOP 조사 자체를 보이콧했다는 것이다. 분할이든 뭐든 외부 기구가 자국 영토의 처분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는 입장이었다.

제2장: 유엔 결의 181호 — 분할안의 탄생(1947)

1. UNSCOP 보고서의 두 가지 안

1947년 8월 31일, UNSCOP는 두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 다수안(8개국 지지):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 아랍 국가, 예루살렘 국제 관할구역(corpus separatum)으로 분할. 두 국가 사이에 경제 동맹을 설정.
  • 소수안(3개국 지지): 연방제 국가 수립. 유대 자치구와 아랍 자치구를 포함하는 단일 연방.

유엔 총회는 다수안을 기초로 논의를 진행했다. 이것이 유엔 총회 결의 181호의 원형이다.

2. 분할안의 구체적 내용

결의 181호가 제시한 분할의 구체적 수치는 다음과 같았다.

  • 유대 국가: 전체 면적의 약 56.5%. 네게브 사막의 대부분, 해안 평야, 이즈르엘(에스드렐론) 계곡, 동부 갈릴리를 포함.
  • 아랍 국가: 전체 면적의 약 43.5%. 서부 갈릴리, 사마리아·유대아 구릉지(오늘날 서안지구 지역), 가자 해안, 야파(자파) 도시를 포함.
  • 예루살렘 국제구역: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포함하는 특별 국제 관할 구역. 유엔 신탁통치이사회가 관리.

당시 인구 통계를 보면,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에는 약 120만~130만 명의 아랍인과 약 60만~65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유대인은 전체 인구의 약 33%였으나 분할안에서 56.5%의 영토를 배정받았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네게브 사막(전체 면적의 약 45%)이 유대 국가에 포함되었는데, 이 지역은 대부분 불모지로서 소수의 베두인 부족만 거주했다. 그러나 이 수치적 불균형은 아랍 측의 거부 논리를 강화하는 핵심 근거가 되었다.

더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분할안대로 유대 국가가 세워지더라도, 그 국경 안에는 약 49만 7천 명의 아랍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유대 국가 인구의 거의 절반이 아랍인인 셈이었다. 이는 민족 국가로서의 안정성에 근본적 의문을 던졌다.

유엔 분할안 181호 지도

3. 표결 —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결의 181호가 표결에 부쳐졌다.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 찬성 33표: 미국, 소련, 프랑스, 호주, 캐나다,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
  • 반대 13표: 아프가니스탄, 쿠바, 이집트, 그리스, 인도, 이란, 이라크, 레바논,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튀르키예, 예멘
  • 기권 10표: 영국, 아르헨티나, 칠레, 중국, 콜롬비아, 엘살바도르, 에티오피아, 온두라스, 멕시코, 유고슬라비아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한 표결에서 결의안은 통과되었다. 몇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첫째, 미국과 소련이 동시에 찬성했다. 냉전이 시작되는 시점에 양 초강대국이 같은 편에 선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미국은 트루먼 대통령의 국내 정치적 고려(유대인 유권자)와 인도주의적 명분이 결합되었고, 소련은 영국의 중동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전략적 판단이 작용했다.

둘째, 영국은 기권했다. 위임통치를 포기하면서 문제를 유엔에 넘긴 당사자가 결의안에 대해서는 찬반 의사를 밝히지 않은 것이다. 이는 어느 쪽에도 서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셋째, 아랍·이슬람 국가들은 전원 반대했다. 반대 13표 중 대다수가 아랍연맹 회원국이거나 무슬림 다수 국가였다.

4. 양측의 반응

유대 기관(Jewish Agency)의 의장 다비드 벤구리온은 분할안을 수용했다. 텔아비브에서는 자발적인 축하 행사가 벌어졌다. 다만 수용에는 전략적 계산이 있었다. 벤구리온은 사적으로 분할안의 국경이 최종적이 아닐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국가를 먼저 세우고, 나머지는 이후에 해결한다”는 논리였다.

아랍고등위원회와 아랍연맹은 결의 181호를 즉각 거부했다. 그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 팔레스타인은 아랍인의 땅이다. 인구의 3분의 2가 아랍인인데 외부에서 이주해 온 소수에게 영토의 과반을 주는 것은 정의에 반한다.
  • 유엔 총회는 주권국의 영토를 분할할 법적 권한이 없다. 결의 181호는 총회 결의(recommendation)이지 안보리 결의(binding decision)가 아니다.
  • 밸푸어 선언 자체가 팔레스타인 주민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불법적 약속이므로, 그에 기초한 모든 후속 조치도 무효다.

이 거부의 의미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 논쟁이 있다. 한쪽에서는 “아랍 측이 국가 수립의 기회를 스스로 거부했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부당한 제안을 거부한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반박한다. 양측의 논리를 사실과 분리하여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제3장: 내전의 시작(1947년 11월~1948년 5월)

1. 결의안 직후의 폭력 격화

분할안이 통과된 다음 날인 1947년 11월 30일부터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폭력이 분출했다. 이 시기를 역사가들은 ‘1947~1948년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내전(1947–1948 civil war in Mandatory Palestine)’이라 부른다.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기 전, 아직 영국이 공식적으로 위임통치를 유지하고 있던 5개월 반 동안의 전투다.

초기에는 아랍 비정규군과 민병대가 주도권을 잡았다. 예루살렘과 텔아비브를 잇는 도로가 봉쇄되었고, 유대인 정착촌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다. 시리아 출신의 파우지 알카우크지가 이끄는 아랍해방군(Arab Liberation Army)이 갈릴리에 진입했고, 이집트 무슬림형제단 의용군도 남부에 나타났다.

유대인 측에서는 하가나를 중심으로 방어전을 펼쳤다. 그러나 예루살렘 유대인 지구에 대한 보급로가 차단되면서 약 10만 명의 유대인 주민이 포위 상태에 놓였다. 물, 식량, 무기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2. 달렛 작전(Plan Dalet)과 전환점(1948년 3~4월)

1948년 3월, 전세가 유대인 측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하가나는 달렛 작전(Plan Dalet, 또는 Plan D)을 입안했다. 이 작전의 성격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에서 치열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 측 해석: 달렛 작전은 영국 철수 이후 예상되는 아랍 국가들의 정규군 침공에 대비한 방어적 군사 계획이었다. 주요 도로와 전략적 거점을 확보하여 유대 국가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팔레스타인/아랍 측 해석 및 일부 역사가의 분석: 달렛 작전은 아랍 주민이 다수인 지역을 군사적으로 장악하고, 필요시 아랍 주민을 추방하는 것을 포함한 공세적 계획이었다. 작전 문서에는 “적대적 무장 세력의 거점인 마을의 파괴”와 “주민의 국경 밖 추방”이라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관계를 보면, 달렛 작전이 실행된 1948년 4월부터 아랍 주민의 대규모 이탈이 급격히 가속화된 것은 기록으로 확인된다. 작전의 의도와 실행 사이에 간극이 있었는지, 아니면 의도대로 실행된 것인지는 자료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

3. 데이르 야신 학살(1948년 4월 9일)

달렛 작전 시기에 벌어진 사건 중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은 데이르 야신(Deir Yassin) 학살이다. 예루살렘 서쪽 외곽의 아랍 마을 데이르 야신에 이르군과 레히 소속 전투원 약 120~130명이 공격을 감행했다.

이 공격으로 마을 주민 다수가 사망했다. 사망자 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초기 보도에서는 254명이라는 숫자가 널리 퍼졌으나, 이후 연구에서는 107명에서 120명 사이로 추산하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합의다. 사망자 중에는 비전투원 — 여성, 아동, 노인 — 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데이르 야신 사건은 두 가지 차원에서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첫째, 심리적 공포 효과. 데이르 야신의 소식은 팔레스타인 전역에 빠르게 퍼졌다. 아랍 측 선전도 공포를 증폭시켰다(일부는 과장된 잔학 행위를 보도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주민들의 공포를 더욱 키워 대피를 가속화했다). 많은 아랍 마을 주민들이 비슷한 운명을 두려워하며 마을을 떠났다.

둘째, 보복의 연쇄. 4월 13일, 아랍 민병대가 예루살렘 하다사 병원으로 향하던 의료 호송대를 공격하여 의사, 간호사, 환자 등 78명이 사망했다(하다사 학살). 폭력은 폭력을 불렀다.

유대 기관은 데이르 야신 사건을 공식적으로 비난했고, 벤구리온은 요르단의 압둘라 왕에게 사과 전문을 보냈다. 그러나 하가나도 이 시기 다른 지역에서 아랍 마을 주민의 추방에 관여한 기록이 있어, 비난의 범위는 이르군·레히에 국한되지 않는다.

4. 하이파, 야파, 서예루살렘의 함락(1948년 4~5월)

1948년 4월 하순부터 5월 초에 걸쳐 주요 도시들에서 연쇄적인 변화가 벌어졌다.

하이파(4월 22일): 영국군이 하이파에서 철수하자 하가나가 아랍 지구를 공격했다. 유대인 시장은 아랍 주민에게 잔류를 호소했으나, 아랍 지도부는 주민들에게 일시적 대피를 권유했다. 약 6만~7만 명의 아랍 주민 중 대다수가 도시를 떠났다. 이것이 자발적 대피였는지, 군사적 압박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여전히 논쟁 대상이다. 하가나의 심리전 방송(확성기를 통한 경고 방송)이 공포를 조장했다는 기록이 있고, 일부 아랍 지도자가 대피를 독려한 기록도 있다.

야파(4월 25일~5월 13일): 분할안에서 아랍 국가에 배정된 야파는 이르군의 공격을 받았다. 약 7만~8만 명의 아랍 주민 중 대다수가 바다와 육로를 통해 도시를 떠났다. 5월 13일 야파는 하가나에 항복했다.

서예루살렘: 카타몬, 바카아 등 아랍 거주 구역에서 아랍 주민이 퇴거했고, 유대인 세력이 이 지역을 장악했다. 예루살렘 구시가지(올드시티)는 여전히 아랍·요르단 세력이 장악했다.

이 5개월의 내전 기간 동안 이미 약 25만~30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 주민이 집을 떠나 있었다. 이스라엘 독립 선언과 아랍 국가들의 침공이 있기 전의 일이다.

제4장: 1948년 5월 14일 — 독립 선언

1. 마지막 준비

영국의 위임통치 종료일은 1948년 5월 15일 자정(5월 14일 금요일 일몰 직후)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유대인 지도부는 이 시점에 맞춰 독립을 선언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쉽지 않았다.

미국 국무부는 독립 선언을 연기하고 유엔 신탁통치를 수용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조지 마셜 국무장관은 아랍 국가들의 침공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국가 선포는 무모하다고 경고했다. CIA도 유대 국가가 군사적으로 생존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내렸다.

유대인 지도부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인민의회(People’s Council) 13명의 위원 중 일부는 국가 이름을 ‘유다(Judea)’로 하자고 주장했고, 다른 이들은 ‘이스라엘’을 선호했다. 국경을 명시할 것인지, 수도를 어디로 할 것인지도 끝까지 논쟁이었다. 결국 독립선언문에는 국경선을 명시하지 않기로 했다.

2. 텔아비브, 로스차일드 대로 16번지

1948년 5월 14일 오후 4시, 텔아비브의 로스차일드 대로 16번지에 위치한 텔아비브 미술관(옛 디젠고프 하우스) 건물에서 역사적 행사가 시작되었다. 안식일(샤밧) 시작 전에 선언을 마치기 위해 금요일 오후로 시간이 잡혔다.

다비드 벤구리온이 이스라엘 독립선언문(메길라트 하아츠마우트)을 낭독했다. 선언문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유대 민족이 이스라엘 땅(에레츠 이스라엘)에서 태어났으며, 이 땅과의 역사적·종교적 유대를 강조
  • 디아스포라의 고통과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언급하며 유대 국가의 필요성을 역설
  • 유엔 총회 결의 181호를 국가 수립의 법적 근거로 인용
  • 새 국가가 “사회적·정치적 완전한 평등”을 보장할 것이며, 종교·인종·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주민의 권리를 보호할 것을 약속
  • “아랍 주민들에게 평화를 유지하고 시민권에 기초한 동등한 국가 건설에 참여하라”고 호소
  • “이웃 국가들과 그 국민들에게 평화와 선린의 손을 내민다”

선언문 낭독이 끝나고 팔레스타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하티크바(희망)’를 연주했다. 참석자 250여 명이 기립하여 함께 불렀다. 이 곡은 이스라엘의 국가(國歌)가 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선언 장면

3. 국제 승인의 연쇄

독립 선언 직후 국제 사회의 반응은 빨랐다.

미국은 독립 선언 11분 만에 사실상의 승인(de facto recognition)을 부여했다. 이는 트루먼 대통령의 개인적 결단이었다. 국무부와 국방부의 반대를 무릅쓴 것이었으며, 트루먼의 측근 클라크 클리포드가 핵심 역할을 했다. 트루먼은 후일 “올바른 일이었다”고 회고했지만, 조지 마셜 국무장관은 “투표를 위한 결정이라면 나는 대통령에게 반대표를 던질 것”이라고까지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소련은 5월 17일에 법률상의 승인(de jure recognition)을 부여했다. 미국보다 더 강한 수준의 공식 승인이었다. 소련의 동기는 복합적이었다. 영국의 중동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전략, 이스라엘 건국 운동 내 사회주의 세력(키부츠 운동, 마팜당 등)에 대한 기대, 그리고 아랍 왕정 국가들에 대한 견제가 함께 작용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의 양해 아래 이스라엘에 결정적인 무기를 공급한 국가였다. 전쟁 초기 이스라엘 공군의 전투기 대부분이 체코제 아비아 S-199(메서슈미트 Bf 109의 체코 생산 버전)였다는 사실은 냉전 초기의 기묘한 지정학을 보여준다.

제5장: 아랍 국가들의 침공(1948년 5월 15일)

1. 다섯 나라의 군대

1948년 5월 15일 새벽, 영국 위임통치가 공식 종료되자마자 다섯 아랍 국가의 정규군이 팔레스타인에 진입했다.

  • 이집트: 남부 네게브와 가자 방면으로 진격. 약 1만 명 규모.
  • 트란스요르단(요르단): 아랍군단(Arab Legion)이 동쪽에서 진입, 예루살렘과 중부 지역을 목표로 삼았다. 영국인 장교 존 배고트 글럽(글럽 파샤)이 지휘하는 아랍 최정예 부대였다. 약 4,500~6,000명.
  • 시리아: 북동부 갈릴리 방면으로 진격. 약 5,000~6,000명.
  • 이라크: 요르단을 경유해 중부 전선에 투입. 약 3,000~5,000명.
  • 레바논: 소규모 병력이 북부에서 진입. 약 1,000명.

이 외에도 사우디아라비아, 예멘 등이 소규모 병력을 파견했고, 아랍해방군과 무슬림형제단 의용군도 전투에 참여했다. 아랍 측 총 병력은 초기에 약 2만 5천~3만 명 수준이었다.

이스라엘 측은 하가나를 개편한 이스라엘 방위군(IDF, Israel Defense Forces)을 5월 26일 공식 창설했다. 이르군과 레히도 IDF에 통합되었다(일부 마찰 끝에). 초기 병력은 약 3만~3만 5천 명이었으나, 전쟁 기간 중 동원과 해외 이민자 유입으로 빠르게 증가하여 연말에는 약 10만 명에 달했다.

2. 전쟁의 전개 — 세 단계

제1단계: 아랍군의 초기 공세(5~6월)

가장 치열한 전투는 예루살렘에서 벌어졌다. 요르단의 아랍군단은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유대인 지구를 포위·공격하여 5월 28일 항복을 받아냈다. 구시가지 유대인 지구의 주민 약 1,500명은 추방되었고, 유대인 회당과 건물이 파괴되었다. 라트룬 요새를 둘러싼 전투에서도 이스라엘군은 요르단 아랍군단에 패배했다. 이집트군은 남부에서 키부츠 야드 모르데하이, 니짐 등을 공격하며 북쪽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아랍 국가들의 공세는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아랍 국가들 사이의 불신과 비협조가 핵심 원인이었다. 트란스요르단의 압둘라 왕은 팔레스타인 아랍 국가 수립보다 자국 영토 확대에 관심이 있었고, 이집트의 파루크 왕도 마찬가지였다. 통합 군사 지휘 체계가 사실상 부재했다.

제2단계: 제1차 휴전과 이스라엘의 재무장(6~7월)

유엔 중재관 폴케 베르나도테 백작의 중재로 6월 11일부터 4주간의 제1차 휴전이 시행되었다. 이 휴전 기간은 이스라엘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대량의 무기가 도착했고, 해외(특히 유럽과 북미)에서 전투 경험이 있는 유대인 의용병들이 유입되었다. 병력은 약 6만 5천 명으로 증강되었다.

7월 8일 휴전이 만료되자 이스라엘군은 ’10일 전투(Ten Days’ Battles)’라 불리는 공세를 펼쳤다. 리다(로드)와 라믈레를 점령하고, 나자렛을 포함한 하부 갈릴리를 장악했다. 리다·라믈레 함락 시 약 5만~7만 명의 아랍 주민이 추방되었는데, 이츠하크 라빈(당시 여단장, 후일 총리)이 벤구리온의 지시에 따라 주민 추방을 실행했다는 기록이 라빈 자신의 회고록에 남아 있다.

제3단계: 이스라엘의 결정적 공세(10월~1949년 3월)

7월 18일부터 제2차 휴전이 시작되었으나, 10월 이후 이스라엘군은 결정적 군사 작전들을 연속으로 감행했다.

  • 히람 작전(10월): 북부 갈릴리에서 아랍해방군과 레바논군을 격퇴, 갈릴리 전역 장악
  • 요아브 작전(10월): 남부 네게브에서 이집트군을 격퇴, 베르셰바 점령
  • 호레브 작전(12월~1949년 1월): 시나이 반도 진입까지 포함한 대규모 공세. 영국의 개입 위협으로 시나이에서 철수했으나 네게브의 대부분을 확보

전쟁이 끝날 무렵 이스라엘은 유엔 분할안에서 배정된 영토보다 약 50% 더 넓은 영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분할안 기준 56.5%에서 실제 약 78%로 확대된 것이다.

3. 휴전 협정(1949년)

1949년 2월부터 7월까지 유엔 중재 아래 이스라엘은 이집트, 레바논, 요르단, 시리아와 개별적으로 휴전 협정(Armistice Agreements)을 체결했다.

  • 이집트(2월 24일): 가자 지구는 이집트가 관할. 시나이는 이집트 영토로 확인.
  • 레바논(3월 23일): 위임통치 시대의 국경으로 복귀.
  • 요르단(4월 3일): 요르단이 서안지구(웨스트뱅크)와 동예루살렘(구시가지 포함)을 장악. 이 지역을 1950년 공식 병합(국제사회 대부분은 이 병합을 승인하지 않았다).
  • 시리아(7월 20일): 시리아군이 약간의 비무장지대를 남기고 철수.

중요한 점은, 이 협정들이 ‘평화 조약’이 아니라 ‘휴전 협정’이었다는 것이다.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국경이 아닌 ‘휴전선(Green Line)’이 그어졌다. 이 선은 오늘날까지 국제법적 논쟁의 기준점으로 남아 있다.

이라크는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하지 않았으므로 별도의 휴전 협정을 맺지 않았다. 이라크군은 요르단 영역으로 철수했다.

제6장: 나크바 — 팔레스타인의 대재앙

1948년 나크바 당시 팔레스타인 난민 행렬

1. 나크바란 무엇인가

나크바(النكبة, al-Nakba)는 아랍어로 ‘대재앙’ 또는 ‘대참사’를 의미한다. 1948년 전쟁 과정에서 약 70만~75만 명(추정치에 따라 편차가 있으며, 유엔 기구 UNRWA의 공식 등록 기준으로는 약 72만 6천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 주민이 자신의 집과 마을을 떠나 난민이 된 사건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 용어를 처음 체계적으로 사용한 것은 시리아 출신 역사가 콘스탄틴 주라이크로, 1948년 8월에 출간한 책 『대재앙의 의미(معنى النكبة)』에서 아랍 세계의 패배와 팔레스타인 주민의 이산을 ‘나크바’라 명명했다.

나크바의 규모를 수치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난민 수: 약 70만~75만 명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아랍 인구의 약 55~60%)
  • 파괴·비워진 마을: 약 400~530개 (연구자에 따라 편차. 이스라엘 역사가 베니 모리스는 약 400개, 팔레스타인 연구자 왈리드 칼리디는 약 530개로 추산)
  • 도시 이탈: 하이파, 야파, 리다, 라믈레, 아크레, 베르셰바 등 주요 도시의 아랍 주민 대부분이 떠남
  • 난민 행선지: 서안지구, 가자 지구,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이집트, 이라크 등

2. 떠난 이유 — 복합적 원인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한 원인은 단일하지 않다. 역사 연구가 축적되면서 복수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음이 밝혀졌다. 이스라엘의 ‘신역사가(New Historians)’ — 베니 모리스, 일란 파페, 아비 슐라임 등 — 이 1980년대 이후 비밀 해제된 이스라엘 국방부·외무부 문서를 분석하면서 기존의 양측 공식 서사 모두에 수정이 가해졌다.

원인 1: 군사적 공격과 강제 추방

여러 사례에서 유대인 무장 세력(하가나, 이르군, 레히, 이후 IDF)이 아랍 주민을 직접 추방한 기록이 있다. 리다·라믈레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베니 모리스의 분석에 따르면 전체 난민의 상당 부분이 직접적 군사 작전의 결과로 발생했다. 일란 파페는 더 나아가 이를 ‘민족 청소(ethnic cleansing)’로 규정한다.

원인 2: 전투와 공포로 인한 자발적 피난

전투 지역의 민간인이 안전을 위해 피난한 사례도 많았다. 데이르 야신 학살 이후 퍼진 공포가 다른 마을 주민들의 선제적 대피를 촉진한 것은 확인된 사실이다. 이는 ‘자발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공포의 원인이 실제 발생한 학살이었다는 점에서 순수한 의미의 자발적 이동과는 구분된다.

원인 3: 아랍 지도부의 대피 명령설

이스라엘의 전통적 서사는 “아랍 지도자들이 전쟁 승리 후 귀환할 수 있다며 주민들에게 대피를 명령했다”고 주장해왔다. 이 주장에 대해 역사학적 검증이 이루어졌다. 일부 사례(하이파 등)에서 아랍 지도자가 대피를 권유한 기록이 있으나, 이것이 조직적·체계적인 ‘명령’이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영국의 정보 보고서(1948년 6월)도 “아랍 이탈의 대부분은 유대인 세력의 군사적 행동에 의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베니 모리스는 “아랍 라디오 방송이 주민들에게 떠나라고 명령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다”고 결론지었다.

원인 4: 경제적 붕괴와 사회 구조 해체

전투가 장기화되면서 팔레스타인 아랍 사회의 경제·행정 기반이 무너졌다. 도시의 부유층과 중산층이 먼저 떠났고(전쟁 초기), 이들의 이탈은 나머지 주민의 생계와 사회적 결속력을 약화시켜 연쇄적인 이탈을 초래했다. 팔레스타인 아랍 사회에는 유대 기관(Jewish Agency)에 필적하는 통합된 정치 지도부가 없었다. 1930년대 대봉기 진압 과정에서 영국이 팔레스타인 아랍 지도부를 체계적으로 해체한 결과이기도 했다.

3. 귀환 불허 — 기정사실화

전쟁 중 그리고 전쟁 후, 이스라엘 정부는 떠난 아랍 주민의 귀환을 체계적으로 차단했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확인된 사실이다.

1948년 6월, 이스라엘 임시 정부는 귀환 불허 정책을 공식 채택했다. 벤구리온은 같은 해 “아랍인의 귀환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내각에서 발언했다. 비워진 아랍 마을의 건물은 파괴되거나 유대인 이민자의 주거지로 전환되었다. 경작지는 이스라엘 국가 소유 또는 유대인 정착민에게 이전되었다.

1950년, 이스라엘 의회(크네세트)는 부재자 재산법(Absentees’ Property Law)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1948년 11월 29일 이후 팔레스타인을 떠난(혹은 국내에서도 원래 거주지를 떠난) 사람의 재산을 ‘부재자 재산’으로 분류하고, 국가가 관리·처분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난민의 귀환과 재산 회복은 법적으로도 차단되었다.

4. 유엔 결의 194호와 귀환권 논쟁

1948년 12월 11일, 유엔 총회는 결의 194호를 채택했다. 이 결의의 11조는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귀환을 원하는 난민은 가능한 이른 시일 내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이웃과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허용되어야 하며, 귀환을 원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국제법의 원칙에 따라 그 재산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결의를 둘러싼 해석 논쟁은 70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 팔레스타인/아랍 측: 결의 194호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권(right of return)’을 확립한 국제법적 근거다. 이스라엘은 이를 이행할 의무가 있다.
  • 이스라엘 측: 총회 결의는 구속력이 없는 권고다. 또한 “이웃과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는” 조건이 붙어 있으므로 무조건적 귀환권이 아니다. 수백만 명에 달하는 난민 후손의 대규모 귀환은 유대 국가의 존립을 위협한다.

주목할 것은, 결의 194호 채택 당시 아랍 국가들이 이 결의에 반대표를 던졌다는 사실이다. 당시에는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난민 간의 ‘협상’을 전제로 한 결의를 수용할 수 없었다. 이후 아랍·팔레스타인 측은 입장을 바꿔 결의 194호를 핵심 근거로 원용하게 되었다.

제7장: 두 개의 서사 — 같은 사실, 다른 틀

1. 이스라엘의 서사: 독립과 생존

이스라엘의 전통적 국가 서사는 다음과 같은 뼈대를 가지고 있다.

기원과 정당성: 유대 민족은 고대 이스라엘 왕국 시대부터 이 땅과 역사적·종교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2,000년의 디아스포라(이산) 동안에도 유대인들은 이 땅과의 유대를 유지했고, 소규모이나마 항상 이 땅에 거주하는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 19세기 말 시온주의 운동은 박해받는 유대인의 민족 자결권을 실현하려는 정당한 움직임이었다.

홀로코스트와 도덕적 긴급성: 600만 유대인의 학살은 유대 국가의 필요성을 돌이킬 수 없이 증명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유대인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했으므로, 유대인 스스로의 국가만이 이러한 재앙의 반복을 막을 수 있다.

전쟁과 방어: 유대인은 유엔의 분할안을 수용했지만 아랍 측이 거부하고 전쟁을 시작했다. 독립 직후 다섯 아랍 국가의 침공을 받았으나 기적적으로 생존했다. 이것은 약자의 방어전이자 생존 전쟁이었다.

난민 문제: 전통적 이스라엘 서사에서 팔레스타인 난민은 전쟁의 불가피한 부산물이다. 아랍 지도자들이 전쟁을 시작했고, 일부는 주민에게 떠나라고 명령했다. 이스라엘은 잔류한 아랍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또한 아랍 국가들에서 추방당한 약 80만~85만 명의 유대인(‘미즈라히’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이주한 사실도 고려되어야 한다(사실상 ‘인구 교환’).

2. 팔레스타인의 서사: 상실과 부정의

팔레스타인의 서사는 근본적으로 다른 전제에서 출발한다.

원주민의 권리: 팔레스타인 아랍 주민은 수세기 동안 이 땅에 살아온 원주민이다.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하던 이들의 동의 없이, 외부 강대국(영국)의 약속(밸푸어 선언)에 의해 그들의 땅이 다른 민족에게 양도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식민주의의 한 형태다.

불의한 분할: 유엔 분할안은 인구의 33%인 유대인에게 영토의 56.5%를 주었다. 유대인 이민의 상당 부분은 위임통치 기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원주민의 의사에 반하여 진행되었다. 이러한 기정사실에 기초한 분할은 공정할 수 없다.

나크바는 계획적이었다: 팔레스타인 서사에서 나크바는 전쟁의 ‘부수적 피해’가 아니라 유대 국가의 인구학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의도적 추방이다. 달렛 작전, 데이르 야신 학살, 리다·라믈레 추방 등은 체계적 패턴의 일부다.

계속되는 부정의: 나크바는 1948년에 끝난 단일 사건이 아니라, 귀환 불허, 재산 몰수, 마을 파괴, 그리고 이후의 점령과 정착촌 건설로 이어지는 ‘진행형 나크바(ongoing Nakba)’다.

3. 신역사가들의 기여 — 신화의 해체

1980년대 이후, 이스라엘의 ‘신역사가(New Historians)’들은 30년 비밀 해제 규정에 따라 공개된 정부 문서를 분석하여 양측의 공식 서사 모두에 도전했다. 주요 수정 사항은 다음과 같다.

베니 모리스(Benny Morris):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를 처음 체계적으로 연구한 역사가. 1988년 출간한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의 탄생(The Birth of the Palestinian Refugee Problem)』에서 난민 발생의 원인이 복합적이었음을 밝혔다. 아랍 지도자의 ‘명령설’은 증거가 부족하며, 유대인 세력의 군사 작전이 주요 원인이었음을 문서로 입증했다. 다만 모리스는 2004년 개정판에서, 벤구리온이 체계적 추방을 ‘명령’하지는 않았으나 전장의 추방을 ‘묵인’하고 귀환을 ‘차단’했다고 분석했다.

일란 파페(Ilan Pappé): 더 급진적 입장에서 1948년 사건을 ‘민족 청소’로 규정했다. 2006년 저서 『팔레스타인의 민족 청소(The Ethnic Cleansing of Palestine)』에서 달렛 작전을 조직적 민족 청소 계획으로 해석했다. 파페의 분석은 팔레스타인 측 서사와 상당 부분 일치하지만, 다른 역사가들로부터 사료 해석의 과도한 선택성에 대해 비판을 받기도 한다.

아비 슐라임(Avi Shlaim): 압둘라 왕과 유대 기관 사이의 비밀 교섭을 밝혔다. 양측이 팔레스타인 아랍 국가의 탄생을 막기 위해 사실상 공모했다는 주장이다. 요르단이 서안지구를 병합하고, 이스라엘이 나머지를 갖는 ‘암묵적 합의’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신역사가들의 연구는 이스라엘 사회 내에서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다. 전통적 서사를 훼손한다는 비판, 자국의 건국 신화를 해체한다는 분노, 반대로 역사적 정직성의 용기라는 칭찬이 교차했다. 이들의 연구는 학문적 정밀함의 편차에도 불구하고, 1948년에 대한 이해를 결정적으로 풍부하게 만들었다.

제8장: 전쟁의 인적 비용

1. 인명 피해

1948년 전쟁의 인적 비용은 양측 모두에게 참혹했다.

  • 이스라엘 측: 약 6,373명 사망(전체 유대인 인구의 약 1%). 이 중 약 4,000명이 군인, 나머지가 민간인. 이스라엘은 이 전쟁을 ‘독립전쟁(מלחמת העצמאות)’이라 부른다.
  • 아랍 측(팔레스타인 및 아랍 국가 군대): 정확한 수치는 확인하기 어렵다. 추정치는 아랍 국가 정규군 약 7,000~10,000명, 팔레스타인 전투원과 민간인 수천 명. 전체적으로 1만~1만 5천 명 범위로 추산된다.
  • 난민: 70만~75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난민이 됨. 이스라엘에 남은 아랍인은 약 15만~16만 명.

2. 이스라엘에 남은 아랍인 — ’48 아랍인’

전쟁 후 이스라엘 국경 안에 남은 약 15만~16만 명의 아랍인은 이스라엘 시민권을 받았으나, 1966년까지 군사 정부(military administration) 아래 놓였다. 이들은 여행의 자유, 거주지 선택, 토지 소유 등에서 제약을 받았다. 군사 정부는 1966년에 해제되었고, 이후 이스라엘 내 아랍 시민(오늘날 약 200만 명, 이스라엘 인구의 약 21%)은 투표권과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나, 사실상의 차별과 불평등이 지속되고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3. 아랍 국가 내 유대인의 이탈

1948년 전쟁과 이스라엘 건국은 아랍·이슬람 국가에 거주하던 유대인 공동체에도 격변을 가져왔다. 이라크, 예멘, 이집트, 모로코, 리비아, 시리아, 튀니지 등에서 약 80만~85만 명의 유대인이 1948년부터 1970년대에 걸쳐 이주했다. 대부분이 이스라엘로 향했고, 일부는 프랑스 등 유럽으로 갔다.

이 이주의 성격도 논쟁 대상이다. 이스라엘 측은 아랍 국가의 박해와 추방에 의한 ‘유대인 나크바’라고 주장한다. 아랍 측은 이스라엘 정부(특히 모사드)가 아랍 국가 유대인의 이주를 의도적으로 촉진한 사례가 있다고 반박한다. 이라크의 경우, 1950~1951년 바그다드에서 유대인 대상 폭탄 테러가 발생했는데, 이것이 이라크 정부의 소행인지 이스라엘 공작원의 소행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결론이 나지 않았다. 사실은, 원인이 어디에 있든 수천 년 역사를 가진 중동 유대인 공동체가 사실상 소멸했다는 것이다.

제9장: 1948년 이후 — 만들어진 새로운 현실

1. 이스라엘 — 국가 건설과 대량 이민

신생 이스라엘은 즉각적인 과제에 직면했다. 가장 시급한 것은 인구였다. 1948년 약 80만 명이던 유대인 인구를 늘리기 위해 귀환법(Law of Return, 1950)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세계 어디에 있든 유대인이면 이스라엘에 이민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아랍 국가 출신 유대인, 동유럽 유대인이 대거 유입되어 1950년대 초반에 인구가 두 배로 증가했다.

비워진 아랍 마을과 도시의 가옥은 새 이민자의 주거지가 되었다. 야파의 아랍인 가옥에 예멘 유대인이 입주하고, 갈릴리의 아랍 마을 터에 새 유대인 정착촌이 세워졌다. 이 과정은 기존 아랍 주민의 귀환을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2. 팔레스타인 난민 — 임시가 영구가 되다

70만이 넘는 팔레스타인 난민은 주변 아랍 국가의 난민 캠프에 수용되었다. 유엔은 1949년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기관(UNRWA, United Nations Relief and Works Agency)을 설립하여 난민 지원을 담당하게 했다. ‘임시’ 기구로 설립된 UNRWA는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으며, 등록 난민 수는 후손을 포함하여 약 590만 명(2023년 기준)에 달한다.

난민 캠프는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서안지구, 가자 지구에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텐트촌이었던 캠프가 점차 콘크리트 건물로 바뀌었지만, ‘임시’라는 명목은 유지되었다. 난민들은 집 열쇠를 간직한 채 귀환의 날을 기다렸고, 이 열쇠는 팔레스타인 정체성의 상징이 되었다.

각 수용국에서의 난민 처우는 달랐다.

  • 요르단: 유일하게 팔레스타인 난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한 아랍 국가. 인구의 절반 이상이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정치적 긴장도 있었다(1970년 ‘검은 9월’ 사태).
  • 레바논: 종파 균형을 우려하여 시민권 부여를 거부. 난민은 특정 직업에서 배제되고 부동산 소유가 제한되었다. 캠프는 사실상의 게토가 되었다.
  • 시리아: 시민권은 부여하지 않았으나 비교적 광범위한 사회적 권리를 보장했다. 2011년 시리아 내전은 팔레스타인 난민에게 ‘이중 난민’의 비극을 안겼다.
  • 가자 지구: 이집트 관할 아래 난민 캠프가 밀집. 1967년 이스라엘 점령 이후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3. 아랍 세계의 충격 — ’48년의 트라우마’

1948년의 패배는 아랍 세계 전체에 심대한 정치적 충격을 주었다. 기존의 아랍 왕정·보수 정권은 패전의 책임을 추궁받았다.

  • 이집트: 1952년,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파루크 왕을 축출했다. 가말 압델 나세르가 권력을 장악하며 ‘아랍 민족주의’의 시대가 열렸다. 나세르의 부상은 1948년 패전과 직결된다.
  • 시리아: 1949년에만 세 차례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후 수십 년간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었다.
  • 요르단: 압둘라 왕은 서안지구를 병합하여 영토를 확대했으나, 1951년 예루살렘의 알아크사 모스크에서 팔레스타인인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스라엘과의 비밀 교섭이 ‘배신’으로 인식된 결과였다.
  • 이라크: 패전의 치욕이 1958년 하심 왕조 타도 혁명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처럼 1948년 전쟁은 패전 당사국들의 정치 체제까지 뒤흔들었다. 그리고 이 정치적 격변은 다시 아랍-이스라엘 분쟁의 다음 장(1956년 수에즈 위기, 1967년 6일 전쟁)으로 이어진다.

제10장: 1948년의 유산 — 풀리지 않은 매듭

1. 난민 문제의 고착화

2026년 현재,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는 난민 위기다. UNRWA에 등록된 난민은 약 590만 명으로, 원래 난민(1948년 이탈자)의 후손 대부분이 포함된다. 이스라엘은 대규모 귀환을 거부하고 있고, 아랍 수용국 중 요르단을 제외하면 시민권 부여에 소극적이며, 국제사회는 해결 방안에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

난민 문제가 고착된 데에는 양측의 요인이 있다. 이스라엘은 유대 국가의 인구학적 특성 유지를 이유로 귀환을 거부한다. 일부 아랍 국가는 이스라엘에 대한 정치적 압력 카드로 난민의 ‘임시’ 지위를 유지해왔다는 비판을 받는다. 팔레스타인 난민 자신은 어디에서도 완전한 시민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떠 있는 존재’로 세대를 이어왔다.

2. 기억의 전쟁

1948년은 사실의 영역만큼이나 기억의 영역에서 중요하다. 양측은 자신의 서사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이스라엘에서는 매년 욤 하아츠마우트(독립기념일)를 축하하되, 그 전날은 욤 하지카론(전몰장병 추모일)으로 기린다. 슬픔에서 기쁨으로의 극적 전환이 국가 서사의 핵심 구조다.

팔레스타인에서는 매년 5월 15일을 나크바의 날로 기억한다. 검은 옷, 열쇠 모형, 옛 마을의 이름을 적은 표지판이 시위와 기념 행사에 동원된다. 2011년 이스라엘 의회는 나크바를 기념하는 기관에 대한 정부 지원을 삭감할 수 있는 ‘나크바 법’을 통과시켜 논란이 되었다.

양측의 교과서도 1948년을 전혀 다르게 서술한다. 이스라엘 교과서에 ‘나크바’라는 단어는 거의 등장하지 않거나 최근에야 일부 언급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교과서에서 이스라엘은 정당한 국가가 아닌 ‘식민 기획(colonial project)’으로 프레이밍된다. 상대방의 고통을 인정하는 것이 자신의 서사를 약화시킨다는 두려움이 양측 모두에 존재한다.

3.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1948년의 역사를 정직하게 마주하려면, 불편한 복수의 진실을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

  •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참극을 겪은 유대인에게 안전한 고향이 필요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 그 고향이 다른 사람들이 이미 살고 있던 땅에 세워졌고, 그 과정에서 대규모의 추방과 파괴가 발생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 아랍 국가들의 침공이 신생 이스라엘의 존립을 위협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 그 전쟁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민간인에 대한 체계적 폭력과 추방이 이루어졌다는 것도 사실이다.
  • 아랍 국가 내 유대인 공동체가 사실상 소멸한 것은 사실이다.
  • 팔레스타인 난민이 70년 넘게 귀환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사실들은 서로를 상쇄하지 않는다. 한쪽의 고통이 다른 쪽의 고통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1948년의 역사는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정리될 수 없으며, 바로 그 복잡성이 이 갈등을 세계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 중 하나로 만들고 있다.

나가며 — 끝나지 않은 1948년

1948년은 과거가 아니다. 그 해에 만들어진 현실 —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미해결의 국경, 예루살렘의 분쟁, 양측의 상처 — 은 모두 현재 진행형이다. 2026년 오늘도 가자와 서안에서 이 ‘끝나지 않은 1948년’의 여파가 매일의 뉴스를 만들고 있다.

역사가의 임무는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밝히고, 각 사실이 어떤 맥락에서 발생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시리즈에서 그 원칙을 지키며 걸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다음 47화에서는 1948년 이후 중동을 뒤흔든 아랍 민족주의의 부상과 나세르의 시대를 다룬다. 1948년의 패배가 어떻게 아랍 세계의 정치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어떻게 다음 전쟁(1956년 수에즈, 1967년 6일 전쟁)의 씨앗을 뿌렸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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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즈: 중동의 역사 (총 52화 중 4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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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역사] 43/52화: 위임통치 시대: 영·프가 그은 국경선이 만든 오늘의 중동

1920년대 외교관들이 중동 지도 위에 국경선을 긋는 모습

서론 — 지도 위의 자(尺)가 결정한 민족의 운명

지난 42화에서 우리는 사이크스-피코 협정과 밸푸어 선언이라는 두 개의 비밀스러운 약속이 어떻게 중동의 미래를 설계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영국의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조르주-피코가 지도 위에 자를 대고 그은 선은 아직 잉크가 마르기도 전이었지만, 그 선이 현실의 국경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1920년부터 1940년대까지 이어진 위임통치(Mandate) 시대는 중동 현대사의 가장 결정적인 시기 중 하나입니다. 이 시기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국경선이 그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국경선은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의 의사와는 거의 무관하게, 런던과 파리의 외교관들이 자국의 전략적 이익을 계산하며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중동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갈등 — 이라크의 종파 분쟁, 시리아 내전, 레바논의 만성적 정치 위기, 쿠르드족의 독립 열망,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 의 뿌리를 추적하면, 우리는 어김없이 이 위임통치 시대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번 43화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어떻게 중동의 지도를 다시 그렸는지, 그리고 그 지도가 1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어떤 유산을 남기고 있는지를 꼼꼼히 살펴보겠습니다.

영국·프랑스 위임통치 중동 분할 지도

제1장 — 위임통치란 무엇이었나: 국제연맹의 이상과 현실

1-1. 윌슨의 이상주의와 ‘위임통치’라는 타협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세계는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그해 1월 발표한 ’14개 조항’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했습니다. 모든 민족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원칙이었습니다. 특히 12번째 조항은 오스만 제국 치하의 비(非)튀르크 민족들에게 “자치적 발전의 확실한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과 달랐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전쟁 중에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통해 오스만 영토를 분할하기로 약속한 상태였습니다. 노골적인 식민지 분할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정면으로 충돌했기에, 양측은 절묘한 타협안을 고안해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위임통치(Mandate)** 제도였습니다.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서 탄생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규약 제22조는 위임통치의 법적 근거를 제공했습니다. 이 조항의 핵심 논리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아직 스스로를 통치할 능력이 없는 민족들에게는 문명국가가 후견인 역할을 해야 한다.” 즉, 식민지배가 아니라 ‘교육’이자 ‘보호’라는 명분이었습니다.

위임통치는 세 가지 등급(Class A, B, C)으로 나뉘었습니다. 옛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역은 **A등급**으로 분류되었는데, 이는 “독립국으로서의 존재를 잠정적으로 인정하되,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위임통치국의 행정적 조언과 지원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론적으로 A등급 위임통치는 ‘일시적’ 성격이었고, 궁극적으로 해당 지역의 독립을 목표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종이 위의 이상이었습니다. 현실에서 위임통치는 식민지배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했습니다. 위임통치국은 해당 지역의 외교·군사·경제 정책을 사실상 전면 통제했고, ‘독립’의 시점은 위임통치국이 결정했습니다. 중동의 아랍인들은 이를 즉각 간파했습니다. 시리아의 민족주의 지도자 라시드 리다는 “위임통치란 식민지배에 예의 바른 옷을 입힌 것에 불과하다”고 일갈했습니다.

1-2. 산레모 회의 — 분할의 확정

위임통치의 구체적인 배분은 1920년 4월 이탈리아 산레모에서 열린 연합국 최고회의에서 확정되었습니다. 이 회의는 중동 현대사의 결정적 전환점 중 하나였습니다.

산레모 회의의 핵심 결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영국은 메소포타미아(이라크)와 팔레스타인(트란스요르단 포함)의 위임통치권을 획득
  • 프랑스는 시리아(레바논 포함)의 위임통치권을 획득
  •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에는 밸푸어 선언의 내용이 공식적으로 포함됨

이 결정이 내려질 때, 해당 지역 주민들의 의사는 사실상 무시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정부가 파견한 킹-크레인 위원회(King-Crane Commission)는 이미 1919년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주민들을 직접 방문하여 그들의 의사를 조사한 바 있었습니다. 위원회의 결론은 명확했습니다: 시리아 주민의 압도적 다수는 프랑스의 위임통치를 거부하며 미국이나 영국의 한시적 지원 아래 독립을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대규모 시온주의 이민에 대한 강한 반대 의사가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킹-크레인 보고서는 무시되었습니다. 미국은 윌슨의 병환과 의회의 고립주의 흐름 속에서 국제연맹 자체에 가입하지 않기로 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자신들의 계획을 밀고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산레모 회의의 결정은 1922년 국제연맹 이사회에서 공식 승인되었고, 1923년 9월 29일 위임통치령이 정식으로 발효되었습니다.

1-3. 파이살의 시리아 왕국 — 120일의 꿈

위임통치가 확정되기 전, 중동에서는 독자적인 국가 건설의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 파이살 이븐 후세인이 있었습니다. 파이살은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의 셋째 아들로,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의 T. E. 로렌스(아라비아의 로렌스)와 함께 아랍 반란을 이끈 인물이었습니다.

1918년 10월, 파이살의 아랍군은 영국군과 함께 다마스쿠스에 입성했습니다. 이후 파이살은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하는 아랍 왕국의 수립을 추진했습니다. 1920년 3월 8일, 시리아 민족회의(Syrian National Congress)는 파이살을 시리아 왕으로 선포했습니다. 이 ‘시리아’는 오늘날의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 요르단을 포함하는 대(大)시리아(Greater Syria)의 개념이었습니다.

파이살의 왕국은 아랍 민족주의의 희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꿈은 120일밖에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프랑스는 산레모 회의에서 시리아에 대한 위임통치권을 확보한 후, 즉각 군사 행동에 나섰습니다. 프랑스군 사령관 앙리 구로 장군은 파이살에게 최후통첩을 보냈고, 파이살이 이를 수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진격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20년 7월 24일, 마이살룬 전투(Battle of Maysalun)가 벌어졌습니다. 다마스쿠스 서쪽 마이살룬 고개에서 유세프 알-아즈마 국방장관이 이끄는 소규모 시리아군은 프랑스 정규군에 맞서 장렬히 싸웠지만, 장비와 병력의 압도적 열세를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알-아즈마는 전사했고, 프랑스군은 이틀 뒤 다마스쿠스에 입성했습니다. 파이살은 추방당했습니다.

마이살룬 전투는 아랍 민족주의 역사에서 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시리아에서 7월 24일은 아직도 추모의 날이며, 알-아즈마는 외세에 맞서 싸운 민족 영웅으로 기려지고 있습니다. 이 전투는 아랍인들에게 하나의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민족자결이란 강대국이 허락할 때만 가능한 것이라는 쓰라린 현실이었습니다.

제2장 — 프랑스 위임통치: 시리아와 레바논의 분리

2-1. ‘분할하여 통치하라’ — 프랑스의 시리아 운영

프랑스는 시리아 위임통치에 전형적인 ‘분할 통치(divide and rule)’ 전략을 적용했습니다. 1920년부터 1922년 사이에 프랑스는 시리아를 여러 개의 분리된 행정 단위로 쪼갰습니다. 이 분할의 기준은 주로 종교와 종파였습니다.

  • 다마스쿠스 국가(State of Damascus): 내륙의 수니파 다수 지역
  • 알레포 국가(State of Aleppo): 북부의 수니파 다수 지역
  • 알라위 국가(State of the Alawites): 서북부 해안 산악지대, 알라위파 소수가 다수인 지역
  • 자발 드루즈 국가(State of Jabal Druze): 남부 산악지대, 드루즈파 소수가 다수인 지역
  • 알렉산드레타 산작(Sanjak of Alexandretta): 튀르크계 인구가 상당수인 북서부 항구 지역
  • 대레바논(Grand Liban/Greater Lebanon): 마론파 기독교인이 다수인 지역 + 확장 영토

이 분할에는 명확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습니다. 단일한 아랍 민족주의 운동이 형성되는 것을 막고, 각 종파 공동체를 서로 견제하게 만들어 프랑스의 통제를 용이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소수 종파인 알라위파, 드루즈파, 마론파 기독교인들에게 자치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이들을 수니파 다수에 대한 ‘방파제’로 활용했습니다.

프랑스의 시리아 통치 방식은 매우 직접적이었습니다. 영국이 이라크에서 간접 통치를 시도한 것과 달리, 프랑스는 시리아에 직접적인 행정 통제를 가했습니다. 프랑스인 관료들이 핵심 행정직을 차지했고, 아랍어 대신 프랑스어가 공식 행정 언어로 사용되었습니다. 프랑스 군대가 전국에 배치되었고,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은 가차 없었습니다.

프랑스의 분할 통치 전략은 흥미롭게도 시리아의 종파적 정체성을 오히려 강화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았습니다. 프랑스 통치 이전에 알라위파나 드루즈파의 정체성은 지역적·부족적 성격이 강했지만, 프랑스가 이들에게 별도의 행정 단위와 군사 조직을 부여하면서 종파적 정체성이 ‘정치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훗날 시리아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특히 프랑스가 알라위파 청년들을 적극적으로 군에 편입시킨 것은, 수십 년 뒤 알라위파 출신의 하페즈 알-아사드가 군사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토양이 되었습니다.

2-2. 대(大)레바논의 창설 — 인위적 국가의 탄생

프랑스 위임통치의 가장 결정적인 결정 중 하나는 1920년 9월 1일 ‘대레바논(Grand Liban)’의 선포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레바논 국가의 직접적인 기원입니다.

역사적으로 ‘레바논’이라는 개념은 레바논 산맥의 마론파 기독교인 공동체를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스만 시대에 레바논 산악지대는 특별 자치 지역(무타사리피야)으로 존재했으며, 그 경계는 비교적 좁았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마론파 기독교인들이 확실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마론파 기독교인 지도자들의 요청과 자국의 전략적 이익을 결합하여, 이 작은 산악 자치지역을 훨씬 넓은 영토로 확장했습니다. 대레바논에는 베이루트 시, 트리폴리 시, 시돈 시, 베카 계곡, 그리고 남부 레바논이 포함되었습니다. 이 확장된 영토에는 수니파 무슬림, 시아파 무슬림, 드루즈파 등 비기독교 인구가 대거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결정의 논리는 이랬습니다. 프랑스는 중동에서 기독교인의 ‘보호자’ 역할을 자임하고 있었고, 마론파 공동체는 프랑스와 수세기에 걸친 문화적·종교적 유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론파 지도자들은 독립 국가의 형태로 자신들의 공동체를 보호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좁은 산악지대만으로는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었기에, 비옥한 농경지(베카 계곡)와 주요 항구도시(베이루트, 트리폴리, 시돈)를 포함하는 확장된 영토를 요구했습니다.

문제는 영토 확장이 인구 구성의 근본적 변화를 수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좁은 레바논 산악지대에서 마론파는 확실한 다수였지만, 대레바논에서는 간신히 상대적 다수를 유지하는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1932년에 실시된 인구 조사(레바논 역사상 유일한 공식 인구 조사)에서도 기독교인은 전체 인구의 약 51%에 불과했고, 이마저도 조사 방법론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 인구학적 모순은 레바논 정치 시스템의 태생적 불안정성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1943년 독립 시 수립된 ‘국민협약(National Pact)’은 종파별 권력 배분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 대통령은 마론파, 총리는 수니파, 국회의장은 시아파가 맡는 식이었습니다. 이 시스템은 1932년 인구 조사의 종파별 비율에 기반한 것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 인구 비율은 크게 변했지만 정치 시스템은 고정된 채 남아 있었습니다. 이 괴리는 결국 1975년부터 1990년까지 15년간 이어진 레바논 내전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레바논 종파 정치 시스템 형성 과정

2-3. 1925년 대(大)시리아 반란 — 드루즈의 봉기

프랑스의 분할 통치에 대한 가장 큰 저항은 1925년에 폭발했습니다. 이 반란은 자발 드루즈 지역에서 시작되었지만, 곧 시리아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반란의 직접적 원인은 프랑스 위임통치 당국의 오만과 무능이었습니다. 자발 드루즈의 프랑스 총독 가브리엘 카르비예 대위는 드루즈 지도자들을 공개적으로 모욕하고, 강제 노역을 부과하며, 드루즈 사회의 전통과 관습을 무시했습니다. 드루즈 지도자 술탄 알-아트라쉬는 프랑스 당국에 여러 차례 불만을 제기했지만 무시당했고, 결국 1925년 7월 무장 봉기를 선언했습니다.

반란은 처음에는 드루즈의 지역적 저항으로 시작되었지만,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합류하면서 반(反)프랑스 민족 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1925년 10월, 반란은 다마스쿠스까지 확산되었습니다. 다마스쿠스의 구시가지에서 시가전이 벌어졌고, 프랑스군은 이에 대해 도시 전체에 대한 포격을 감행했습니다. 1925년 10월 18일의 다마스쿠스 포격은 국제적 비난을 받았지만, 프랑스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반란은 1927년까지 약 2년간 계속되었으며, 프랑스는 막대한 군사력을 동원해 진압했습니다. 프랑스는 6만 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했고, 항공기를 이용한 폭격까지 실시했습니다. 반란 과정에서 수천 명의 시리아인이 사망했고, 다마스쿠스와 여러 도시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비록 군사적으로는 실패했지만, 대시리아 반란은 중요한 정치적 유산을 남겼습니다. 프랑스는 이후 통치 방식을 일부 조정하여 시리아에 제한적 자치를 허용하기 시작했고, 시리아 민족주의 운동은 더욱 조직화되었습니다. 1928년에는 시리아 제헌의회가 소집되어 헌법 초안을 작성했는데, 이 헌법은 대시리아(레바논, 팔레스타인 포함)의 통일과 위임통치 거부를 선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당연히 이를 거부했습니다.

2-4. 알렉산드레타 문제 — 프랑스가 튀르키예에 넘긴 시리아 영토

프랑스 위임통치 시기의 또 다른 중요한 영토 문제는 알렉산드레타 산작(오늘날 튀르키예의 하타이 주)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시리아 위임통치령의 일부로 배정되었지만, 튀르크계 인구가 상당수(약 40%)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1930년대 후반, 유럽에서 전운이 감돌면서 프랑스는 튀르키예와의 관계 유지가 전략적으로 중요해졌습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튀르키예는 알렉산드레타에 대한 영유권을 지속적으로 주장했고, 프랑스는 이를 수용하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1938년, 프랑스와 튀르키예의 합의 하에 알렉산드레타는 ‘하타이 공화국’이라는 독립 국가가 되었다가, 1939년 6월에 주민 투표를 거쳐 튀르키예에 편입되었습니다. 이 투표 과정은 논란이 많았습니다. 튀르키예가 대규모 튀르크계 인구를 이주시켜 투표 결과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투표 이후 아랍계와 아르메니아계 주민 수만 명이 시리아로 피난했습니다.

시리아는 이 영토 이전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시리아의 공식 지도에는 오랫동안 하타이 주가 시리아 영토로 표시되었으며, 이 문제는 시리아-튀르키예 관계의 만성적 갈등 요인이 되었습니다. 위임통치국인 프랑스가 자국의 전략적 이익을 위해 위임통치 대상 국가의 영토를 제3국에 넘겨버린 이 사례는, 위임통치 제도의 본질 — 결국 강대국의 이익을 위한 도구 — 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제3장 — 영국 위임통치 (1): 이라크의 인위적 탄생

3-1. 세 개의 빌라예트, 하나의 나라

오늘날의 이라크는 오스만 제국 시대에 세 개의 별도 행정 구역(빌라예트, vilayet)이었습니다:

  • 바스라 빌라예트: 남부, 시아파 아랍인 다수
  • 바그다드 빌라예트: 중부, 수니파 아랍인 다수(하지만 시아파도 상당수)
  • 모술 빌라예트: 북부, 쿠르드족 다수 + 튀르크멘, 아시리아 기독교인, 아랍인 혼재

이 세 빌라예트는 역사적으로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통합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문화적으로도 이질적이었습니다. 남부의 시아파 부족사회, 중부의 수니파 도시 엘리트, 북부의 쿠르드 산악 부족은 서로 다른 언어, 관습, 정치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스만 시대에도 이 세 지역은 각각 별도의 총독이 다스렸습니다.

그렇다면 영국은 왜 이 세 빌라예트를 하나의 나라로 묶었을까요? 여기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석유입니다. 모술 빌라예트의 키르쿠크 지역에 막대한 석유 매장이 확인되었습니다. 영국은 이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모술을 반드시 자국의 영향권에 넣어야 했습니다. 모술만 별도의 단위로 남기면 프랑스나 (전쟁 전 광업 이권을 가지고 있던) 독일의 영향력이 재침투할 여지가 있었기에, 바그다드-바스라와 묶어 단일 위임통치령으로 만든 것입니다.

둘째, 전략적 완충 지대입니다. 영국에게 이라크는 인도로 가는 길목의 핵심 거점이었습니다. 페르시아만에서 인도양으로 이어지는 해상 루트와, 이란·러시아 세력에 대한 육상 완충 지대로서의 역할이 중요했습니다. 단일한 ‘이라크’가 분열된 소국들보다 이 역할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셋째, 행정적 편의입니다. 영국은 이미 전쟁 중에 인도군을 동원하여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점령했고, 단일한 군사 행정 체계를 구축한 상태였습니다. 이를 분리하기보다는 유지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이라크’라는 국가는 태생적으로 심각한 내적 모순을 안고 있었습니다. 인구의 약 60%를 차지하는 시아파 아랍인, 약 20%의 수니파 아랍인, 약 17%의 쿠르드족(대부분 수니파이지만 민족적 정체성이 더 강함), 그리고 튀르크멘, 아시리아 기독교인, 야지디 등 소수 집단이 하나의 국경 안에 모여 있었지만, 이들을 묶어주는 ‘이라크 국민’으로서의 공유된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3-2. 1920년 이라크 반란 — 최초의 대규모 저항

영국의 이라크 지배에 대한 첫 번째 대규모 저항은 위임통치가 공식화되기도 전인 1920년 여름에 발생했습니다. ‘1920년 이라크 반란(ثورة العشرين)’이라 불리는 이 봉기는 이라크 현대사의 기원적 사건 중 하나입니다.

반란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습니다. 첫째, 영국이 전쟁 중 아랍인들에게 약속한 독립이 위임통치로 둔갑한 것에 대한 분노가 있었습니다. 둘째, 영국의 직접 군사 행정이 현지 부족 지도자들의 권위와 관습을 무시한 것에 대한 반발이 있었습니다. 셋째, 시리아에서 파이살이 왕으로 선포된 소식이 이라크의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했습니다.

반란은 1920년 6월 중부 이라크의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시작되어 빠르게 남부와 중부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주목할 점은 이 반란에서 수니파와 시아파가 연대했다는 것입니다. 바그다드의 수니파 울라마와 남부의 시아파 성직자들이 공동으로 반영국 운동을 호소했고, 수니파와 시아파 모스크에서 번갈아 합동 집회가 열렸습니다. 이 종파 간 연대는 이라크 민족주의의 초기 발현이자, 공동의 적 앞에서 종파적 차이가 일시적으로 뒷전으로 밀린 사례였습니다.

영국은 반란 진압에 막대한 비용을 치렀습니다. 약 10만 명의 영국·인도 병력이 동원되었고, 반란 진압에만 약 4천만 파운드(당시 영국 재정에 상당한 부담)가 소요되었습니다. 영국군 사상자는 약 2,000명, 이라크 측 사상자는 약 8,400명 이상으로 추산됩니다. 특히 영국은 이라크에서 최초로 항공기를 이용한 공중 폭격을 민간인 지역에 대해 실시했는데, 이는 식민지 반란 진압에 공군력을 사용한 초기 사례 중 하나였습니다.

영국의 식민 장관 윈스턴 처칠은 이라크에서의 막대한 비용에 경악했고, 이를 계기로 이라크의 통치 방식을 직접 군사 행정에서 간접 통치로 전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이 파이살의 이라크 왕 즉위로 이어지게 됩니다.

3-3. 파이살의 이라크 왕국과 ‘카이로 회의’

1921년 3월, 처칠이 주재한 카이로 회의(Cairo Conference)는 영국의 중동 정책을 재편하는 자리였습니다. 이 회의에는 T. E. 로렌스, 거트루드 벨(Gertrude Bell) 등 중동 전문가들이 참석했습니다.

카이로 회의의 핵심 결정은 프랑스에 의해 시리아에서 쫓겨난 파이살을 이라크의 왕으로 앉히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여러 의도가 복합된 결정이었습니다. 영국은 파이살에게 시리아에서의 배신에 대한 일종의 보상을 해줌으로써 아랍 세계에서의 신뢰를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동시에 파이살이라는 합법적 권위를 가진 아랍 군주를 내세워 간접 통치의 비용을 줄이려 했습니다.

1921년 8월, 이라크에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고, 파이살은 96%의 찬성으로 이라크 왕에 선출되었습니다. 물론 이 투표는 영국이 철저히 관리한 것으로, 다른 후보가 사실상 없는 상태에서의 일방적 추인이었습니다. 거트루드 벨은 당시의 상황을 “우리가 후보를 선택하고, 유권자들에게 동의를 구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기록했습니다.

파이살 1세의 이라크 통치(1921-1933)는 식민 권력과 민족 열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하는 과정이었습니다. 파이살은 형식적으로 주권 국가의 군주였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영국 고등판무관에게 있었습니다. 1922년의 영-이라크 조약은 이 관계를 공식화했는데, 이라크는 외교·국방·재정 등 핵심 영역에서 영국의 ‘자문’을 받아야 했고, 이 ‘자문’은 사실상 명령이었습니다.

파이살은 이 상황에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이라크의 국가 건설을 추진했습니다. 근대적 관료제를 정비하고, 교육 제도를 확충하며, 국민 통합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영국이 만들어놓은 이라크의 구조적 문제 — 소수 수니파 엘리트의 과대 대표, 시아파 다수의 정치적 소외, 쿠르드족의 자치 요구 — 는 그의 능력으로 해결하기에는 너무 깊은 것이었습니다.

파이살 1세는 1933년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는데,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이라크라는 국가는 있지만 이라크 국민은 아직 없다(There is still no Iraqi people but unimaginable masses of human beings, devoid of any patriotic idea).” 이 한 문장은 위임통치가 만든 인위적 국가의 본질적 딜레마를 정확히 포착하고 있습니다.

3-4. 이라크의 ‘독립’과 영국의 그림자

이라크는 1932년 10월 국제연맹에 정식 가입하며 형식적 독립을 달성한 최초의 위임통치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독립’은 실질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독립 직전인 1930년에 체결된 영-이라크 동맹 조약은 영국에 다음과 같은 권한을 보장했습니다: 이라크 내 두 곳의 공군 기지 사용권, 전시에 이라크 군사시설과 영토의 자유로운 사용, 무기 판매 독점권 등. 이라크의 외교 정책은 사실상 영국과의 협의를 통해 결정되었고, 이라크군의 훈련과 장비는 영국이 담당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독립 이후 이라크의 내적 갈등이 본격화되었다는 것입니다. 1933년에는 아시리아 기독교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시멜레 학살)이 발생했고, 쿠르드족의 반란은 반복되었습니다.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1936년에는 바크르 시드키 장군이 이라크 역사상 최초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후 이라크는 쿠데타와 반쿠데타의 악순환에 빠져들었습니다.

영국이 만들어놓은 이라크의 구조적 문제 — 인위적 국경 안에 묶인 이질적 공동체들, 소수 수니파의 지배 구조, 쿠르드족 자치 문제, 석유를 둘러싼 이해관계 — 는 독립 이후에도 해결되지 않은 채 증폭되었고, 이는 20세기 후반과 21세기까지 이라크 비극의 구조적 원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제4장 — 영국 위임통치 (2): 팔레스타인과 트란스요르단

4-1.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 양립 불가능한 약속의 충돌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는 중동의 모든 위임통치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가장 폭발적인 유산을 남긴 것이었습니다. 그 근본 원인은 영국이 같은 땅에 대해 양립 불가능한 두 가지 약속을 동시에 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영국은 1915-1916년 후세인-맥마흔 서한을 통해 아랍인들에게 독립 아랍 국가를 약속했습니다(팔레스타인의 포함 여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지만, 아랍 측은 포함으로 해석). 다른 한편으로 1917년 밸푸어 선언을 통해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에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국제연맹이 승인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의 공식 문서에는 밸푸어 선언의 내용이 전문(前文)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즉, 위임통치의 목적 자체가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의 고향을 건설하는 것”으로 명시된 것입니다. 동시에 위임통치 조항은 “팔레스타인의 비유대인 주민들의 시민적·종교적 권리가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고도 규정했습니다. 이 두 목표가 장기적으로 양립 가능하다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위임통치 초기인 1920년대에 유대인 이민이 본격화되면서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습니다. 1917년 밸푸어 선언 당시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는 전체의 약 8%(약 56,000명)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위임통치 기간 동안 대규모 이민이 이루어져, 1931년에는 약 17%(175,000명), 1939년에는 약 30%(약 450,000명)까지 증가했습니다.

유대인 이민자들은 유럽에서 자본과 기술을 가지고 왔고, 체계적으로 토지를 구입하여 공동체(이슈브, Yishuv)를 확장해갔습니다. 시온주의 기관들 — 유대기관(Jewish Agency), 유대국민기금(JNF) 등 — 은 사실상 ‘국가 안의 국가’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자체적인 교육 체계, 의료 체계, 노동 조합(히스타드루트), 준군사 조직(하가나)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아랍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러한 변화를 자신들의 존재 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했습니다. 토지 구입으로 인한 아랍 농민들의 퇴거, 유대인 노동 우선 고용 정책(히브리 노동), 증가하는 이민 물결은 아랍 주민들 사이에서 깊은 불안과 분노를 야기했습니다.

4-2. 팔레스타인의 폭발 — 1929년과 1936-1939년

팔레스타인에서의 아랍-유대 갈등은 위임통치 기간 동안 점점 격화되었습니다. 중요한 분기점이 된 사건들이 있습니다.

1929년 서쪽 벽(통곡의 벽) 폭동: 예루살렘의 서쪽 벽은 유대교와 이슬람 모두에게 성스러운 장소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고대 성전의 유일한 잔재이며, 무슬림들에게는 알-아크사 모스크와 바위의 돔이 있는 하람 알-샤리프(성전산)의 일부입니다. 1929년 8월, 이 장소를 둘러싼 종교적 긴장이 폭력 사태로 폭발했습니다. 헤브론에서는 유대인 67명이 학살당했고(헤브론 학살),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양측의 폭력이 이어졌습니다. 총 사망자는 유대인 133명, 아랍인 116명(대부분 영국군의 진압 과정에서)이었습니다.

1936-1939년 아랍 대반란(Great Arab Revolt):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기간의 가장 대규모 충돌이었습니다. 1936년 4월, 아랍 고위위원회(Arab Higher Committee)의 주도 아래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총파업이 선언되었습니다. 파업은 곧 무장 봉기로 발전했고, 3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아랍 반란군은 영국 군대 및 경찰, 유대인 정착촌을 공격했고, 한때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장악하기도 했습니다.

영국은 반란 진압에 2만 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했고, 가혹한 탄압 조치를 실시했습니다. 가옥 철거, 집단 처벌, 행정 구금, 사형 등이 광범위하게 시행되었습니다. 반란 과정에서 약 5,000명의 아랍인이 사망했고, 15,000명 이상이 부상했으며, 5,600명이 투옥되었습니다. 아랍 지도부는 와해되었고, 아랍 사회의 군사적·정치적 역량은 심각하게 약화되었습니다. 이 약화는 10년 뒤 1948년 전쟁에서 아랍 측의 취약성으로 직결됩니다.

반란 기간 중 영국은 필 위원회(Peel Commission, 1937)를 파견하여 상황을 조사했습니다. 필 위원회는 역사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랍인과 유대인의 열망은 근본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며, 유일한 해결책은 **분할(partition)** — 즉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와 유대 국가로 나누는 것 — 이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이는 ‘두 국가 해결(two-state solution)’ 개념의 최초의 공식적 제안이었습니다. 아랍 측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고, 시온주의 지도부는 원칙적으로 수용하되 구체적 경계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반란이 진행 중이던 1939년,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짙어지면서 영국은 정책을 급선회했습니다. 1939년 맥도날드 백서(White Paper)는 향후 5년간 유대인 이민을 75,000명으로 제한하고, 이후에는 아랍인의 동의 없이는 이민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또한 10년 내에 아랍인과 유대인이 공유하는 독립 팔레스타인 국가를 수립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했습니다. 이 백서는 시온주의 운동을 격분시켰고, 영국에 대한 유대 지하 무장 조직들의 저항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1930년대 영국 위임통치 팔레스타인의 갈등 구도

4-3. 트란스요르단 — 압둘라의 왕국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요르단 강 동쪽 지역, 즉 트란스요르단(Transjordan)의 분리였습니다. 이 결정은 오늘날의 요르단 왕국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원래 국제연맹이 승인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은 요르단 강 양쪽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21년, 파이살의 형 압둘라 이븐 후세인이 프랑스에 의해 쫓겨난 동생의 복수를 위해 시리아를 공격하겠다며 군대를 이끌고 트란스요르단으로 진군해 왔습니다.

영국은 이 상황을 독특한 방식으로 해결했습니다. 처칠은 카이로 회의에서 압둘라를 만나, 시리아 공격을 포기하는 대가로 트란스요르단의 통치권을 주겠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압둘라는 이를 수락했고, 트란스요르단 토후국(Emirate of Transjordan)이 탄생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1922년 영국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서 트란스요르단을 분리하여 밸푸어 선언의 적용 범위에서 제외시켰다는 것입니다. 즉, 요르단 강 동쪽에서는 유대인 이민과 정착이 허용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시온주의 지도부는 이를 강하게 비판했고, 수정주의 시온주의(Revisionist Zionism)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자보틴스키는 이를 “유대 민족 고향의 77%를 절단한 행위”라고 규탄했습니다.

트란스요르단은 위임통치 기간 내내 비교적 평온했습니다. 압둘라는 영국에 충실한 동맹이었고, 그의 통치 아래 트란스요르단은 작지만 안정적인 정치 단위로 발전했습니다. 영국의 지원으로 아랍 군단(Arab Legion)이라는 정예 군대가 창설되었는데, 이 군대는 영국인 장교 존 바고트 글럽(글럽 파샤)이 지휘하며 중동에서 가장 효과적인 아랍 군대 중 하나로 성장했습니다.

트란스요르단의 ‘창설’은 영국이 얼마나 즉흥적으로 중동의 지도를 그렸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요르단이라는 국가는 역사적 선례도, 자연적 국경도, 뚜렷한 민족적 정체성도 없는 상태에서 순전히 영국의 정치적 편의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처칠이 후에 농담처럼 말한 “일요일 오후에 펜 한 자루로 트란스요르단을 만들었다”는 일화는 과장이 섞여 있지만, 이 국가 창설의 즉흥적 성격을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제5장 — 잊힌 민족, 잊힌 약속: 쿠르드족과 기타 소수 집단

5-1. 쿠르드족 — 국가 없는 세계 최대 민족

위임통치 시대의 국경 획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집단 중 하나가 쿠르드족입니다. 쿠르드족은 약 3,000만~4,000만 명(추정치에 따라 다름)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국가 없는 민족’으로, 오늘날 튀르키예, 이라크, 이란, 시리아 4개국에 걸쳐 거주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쿠르드족의 독립 국가는 한때 국제적으로 약속된 적이 있었습니다. 1920년 8월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Treaty of Sèvres)은 오스만 제국의 해체를 규정하면서, 동부 아나톨리아의 쿠르드 거주 지역에 자치 쿠르드 국가의 수립을 예상하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조약 제62~64조는 쿠르드 자치 지역의 설정과, 이후 국제연맹에 독립을 청원할 수 있는 권리를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세브르 조약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튀르크 민족주의 운동이 승리하여 1923년 로잔 조약(Treaty of Lausanne)이 세브르 조약을 대체했는데, 로잔 조약에는 쿠르드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습니다. 쿠르드족의 독립 가능성은 외교 테이블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다.

영국도 쿠르드족의 독립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쿠르드족 거주 지역, 특히 모술과 키르쿠크에는 석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쿠르드족이 독립하면 이 석유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할 수 있다고 우려했고, 따라서 모술 빌라예트를 이라크에 포함시키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라크 내 쿠르드족은 처음부터 바그다드 중앙정부의 권위에 저항했습니다. 셰이크 마흐무드 바르진지는 1919년, 1922년, 1930년 세 차례에 걸쳐 쿠르드 독립 반란을 일으켰고, 매번 영국군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영국은 쿠르드 반란 진압에도 공중 폭격을 적극 활용했으며, 심지어 아서 “포격기” 해리스(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 도시 폭격으로 악명 높은)가 이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위임통치가 만든 국경은 쿠르드 민족을 네 나라로 분단시켰고, 이후 100년 동안 쿠르드족은 각 국가에서 차별과 탄압을 경험하면서도 국가 수립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라크에서의 안팔 작전(1988), 튀르키예에서의 PKK 무장투쟁, 시리아 내전에서의 로자바 자치 등, 쿠르드 문제는 오늘날에도 중동 정치의 가장 복잡한 난제 중 하나입니다.

쿠르드족 거주 지역과 위임통치 국경선

5-2. 아시리아 기독교인의 비극

위임통치 시대의 국경 획정 과정에서 잊힌 또 다른 집단이 아시리아 기독교인(Assyrians)입니다. 아시리아인들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아시리아 제국의 후예를 자처하는 기독교 소수 집단으로,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만 제국에 의해 대규모 학살(아시리아 대학살/세이포)을 경험한 바 있었습니다.

전쟁 중 영국은 아시리아인들에게 자치 또는 보호를 약속하며 협력을 이끌어냈고, 아시리아인들은 영국군의 보조 부대로 복무했습니다. 위임통치 기간에도 아시리아인들은 영국이 조직한 ‘이라크 부대(Iraq Levies)’의 핵심 구성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라크가 1932년 독립하면서 아시리아인들의 처지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영국이 떠난 후 이라크 정부는 아시리아인들을 영국의 협력자이자 분리주의 세력으로 간주했습니다. 1933년 8월, 이라크군은 북부의 아시리아인 마을 시멜레(Simele)를 비롯한 여러 마을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수백에서 수천 명의 아시리아 민간인이 학살당했고(정확한 숫자는 논쟁 중), 수만 명이 시리아와 이란으로 도피했습니다.

시멜레 학살은 여러 면에서 중요한 사건입니다. 첫째, 이라크 ‘독립’ 후 영국이 약속한 소수 집단 보호가 무의미했음을 증명했습니다. 둘째, 이 학살을 지휘한 바크르 시드키 장군은 아시리아인 학살로 민족 영웅이 되었고, 이 인기를 바탕으로 1936년 쿠데타를 일으켜 이라크 역사상 최초의 군사 정권을 수립했습니다. 셋째, 시멜레 학살은 국제적으로도 주목을 받아, 라파엘 렘킨이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용어를 고안하는 데 영감을 준 사건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5-3. 알렉산드레타의 아르메니아인, 팔레스타인의 드루즈

위임통치의 국경선은 수많은 소수 집단의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알렉산드레타가 튀르키예에 편입되면서 그곳의 아르메니아인 공동체는 다시 한번 이산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1915-1923)의 생존자들 중 상당수가 프랑스 시리아 위임통치령의 알렉산드레타에 정착해 있었는데, 튀르키예 편입이 결정되자 대부분이 시리아와 레바논으로 재이주해야 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드루즈 공동체, 이라크의 야지디 공동체, 시리아의 이스마일파 등 크고 작은 종교·민족 집단들은 강대국이 그은 국경선에 의해 각자 다른 국가에 편입되었고, 새로운 국가에서 소수자로서의 불안정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제6장 — 석유와 이해관계: 위임통치 뒤의 경제적 논리

6-1. 석유가 국경을 결정하다

위임통치 시대의 국경 획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석유라는 요소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20세기 초, 석유는 군사력과 산업력의 핵심 자원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석유의 전략적 중요성을 실감한 영국은 중동의 석유 자원 확보를 최우선 전략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미 전쟁 전인 1912년, 오스만 제국 내의 석유 이권을 둘러싸고 영국, 독일, 네덜란드 등이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튀르크 석유 회사(Turkish Petroleum Company, TPC)가 설립되어 모술 빌라예트의 석유 개발권을 획득했는데, 이 회사의 지분은 영국계(앵글로-페르시안 석유 회사와 영국 투자자), 독일계(도이체 방크), 네덜란드계(로열 더치-셸)가 나눠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독일의 지분을 전쟁 배상으로 몰수하고 이를 프랑스에 넘겼습니다. 이것이 1920년 산레모 석유 협정(San Remo Oil Agreement)으로, 사이크스-피코 협정의 석유 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는 TPC(후에 이라크 석유 회사, IPC로 개명)의 독일 지분 25%를 획득하는 대가로 모술 빌라예트를 영국 위임통치령 이라크에 포함시키는 데 동의했습니다.

즉, 모술이 이라크의 일부가 된 것은 쿠르드족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석유 이권의 분배 결과였습니다. 국경은 민족이나 지리가 아닌 석유 파이프라인의 경로를 따라 그어진 것이었습니다.

6-2. ‘빨간 선’ 협정과 석유 카르텔의 탄생

석유와 국경의 관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1928년의 ‘빨간 선 협정(Red Line Agreement)’입니다. 이라크 석유 회사(IPC)의 주주들 —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의 석유 기업들 — 은 이 협정에서 옛 오스만 제국의 영토(튀르키예 본토와 이집트, 쿠웨이트를 제외한) 내에서는 IPC를 통해서만 석유를 개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IPC의 아르메니아계 사업가 칼루스테 굴벤키안이 회의석상에서 빨간 연필로 옛 오스만 제국의 국경을 지도 위에 그었다고 합니다. 이 ‘빨간 선’ 안에는 이라크, 시리아, 팔레스타인, 아라비아 반도(사우디아라비아의 대부분 포함)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빨간 선 협정은 중동 석유 산업의 구조를 수십 년간 규정했습니다. 서방 석유 기업들은 이 협정을 통해 중동의 석유 자원을 과점적으로 통제했고, 석유 생산국들은 이 카르텔에서 제한된 로열티만 받을 뿐 자국의 자원에 대한 실질적 통제권이 없었습니다. 이 구조는 1950년대부터 석유 국유화 운동이 시작되면서 도전받기 시작했고, 1960년 OPEC의 창설과 1970년대의 석유 국유화 물결로 최종적으로 해체되었습니다.

6-3. 걸프의 작은 국가들 — 석유 시대 이전의 국경

위임통치 시대에 영국은 걸프 지역의 작은 토후국들의 경계도 확정했습니다.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트루셜 국가들(오늘날의 UAE) 등은 이미 19세기부터 영국과 보호 조약을 맺고 있었지만,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1922년, 영국의 퍼시 콕스 고등판무관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이븐 사우드와 이라크의 국경을 확정하는 우까이르 의정서(Uqair Protocol)를 주도했습니다. 이 협상에서 콕스는 사실상 일방적으로 지도 위에 국경선을 그었는데, 이 과정에서 쿠웨이트의 영토 약 3분의 2가 이라크와 사우디아라비아에 할당되었습니다. 쿠웨이트 대표는 이 결정에 항의했지만 무시당했습니다.

이 시기에 확정된 국경선은 나중에 막대한 석유가 발견되면서 엄청난 경제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쿠웨이트-이라크 국경 분쟁은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의 배경 중 하나가 되었고, 걸프 소국들 간의 해상 경계 분쟁은 해저 유전의 관할권과 직결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7장 — 위임통치의 종말과 독립의 여명

7-1. 제2차 세계대전의 충격

제2차 세계대전은 위임통치 체제에 치명적 타격을 가했습니다.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 — 위임통치의 두 축 — 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켰고, 동시에 아랍 민족주의 운동에 새로운 동력을 제공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1940년 6월 독일에 항복한 후 시리아와 레바논은 비시 프랑스(나치 독일 협력 정부) 관할에 놓였습니다. 1941년 6월-7월, 영국군과 자유 프랑스군이 시리아·레바논에 진군하여 비시 프랑스군을 축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 샤를 드골은 시리아와 레바논의 독립을 약속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 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1943년, 레바논이 독립을 선포하고 프랑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헌법 개정을 단행하자, 프랑스는 레바논 대통령과 각료들을 체포·구금하는 극단적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 사건은 국제적 비난을 초래했고, 영국과 미국의 압력으로 프랑스는 구금자들을 석방해야 했습니다. 이후 레바논과 시리아의 독립은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 되었습니다.

이라크에서는 전쟁 초기인 1941년 4월, 라시드 알리 알-가일라니가 이끄는 친독일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습니다. 영국은 즉각 군사 개입하여 쿠데타를 진압하고 이라크를 재점령했습니다. 이 사건은 이라크의 ‘독립’이 얼마나 허구적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7-2. 각국의 독립 과정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위임통치 체제는 급속히 해체되었습니다. 각국의 독립 과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이라크: 1932년 형식적 독립(국제연맹 가입). 그러나 1958년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될 때까지 영국의 영향력이 지속.
  • 레바논: 1943년 11월 22일 독립 선포, 1946년 프랑스군 완전 철수.
  • 시리아: 1946년 4월 17일 프랑스군 완전 철수로 독립 달성. 매년 4월 17일을 독립기념일로 기념.
  • 트란스요르단: 1946년 5월 25일 독립, 압둘라가 국왕으로 즉위. 국호는 ‘요르단 하심 왕국’으로 변경.
  • 팔레스타인: 1948년 5월 14일 영국 위임통치 종료. 같은 날 이스라엘 독립 선포 → 제1차 중동전쟁 발발. 독립 아랍 팔레스타인 국가는 수립되지 못함.

이 독립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팔레스타인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위임통치 시대에 확정된 국경 그대로 독립했다는 것입니다.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꿈꾸던 통일 아랍 국가는 실현되지 못했고, 영국과 프랑스가 그은 인위적 국경선이 그대로 국제적으로 승인된 국경이 되었습니다.

7-3. 아랍 연맹의 창설과 그 한계

위임통치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분리된 아랍 국가들을 다시 묶어보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1945년 3월 22일 카이로에서 아랍 연맹(League of Arab States)이 창설된 것입니다. 창설 회원국은 이집트,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트란스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예멘 7개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랍 연맹은 처음부터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각국의 지도자들은 아랍 통합을 수사적으로 지지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국의 주권과 기득권을 양보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위임통치가 만든 국경선은 이미 각국 지배 엘리트의 권력 기반이 되어 있었기에, 국경의 해체는 곧 자신들의 권력 기반 해체를 의미했습니다.

아랍 연맹이 처음으로 집단 행동에 나선 것은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이었지만, 이 전쟁에서 아랍 측의 패배는 아랍 연맹의 무력함과 아랍 국가들 간의 분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각국은 팔레스타인 해방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영토적·전략적 이익을 추구했습니다. 요르단의 압둘라 왕은 팔레스타인에 독립 아랍 국가를 세우는 것보다 웨스트뱅크를 자국에 합병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고, 이집트, 시리아 등 다른 참전국들도 각자의 계산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제8장 — 직선 국경선의 유산: 100년 후의 중동

8-1. 인위적 국경이 남긴 구조적 모순

위임통치 시대에 그어진 국경선은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중동의 정치 지형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국경선이 남긴 구조적 모순을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국가와 민족의 불일치. 위임통치의 국경선은 민족·종교·부족의 경계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쿠르드족은 네 나라로 나뉘었고, 아랍인은 수십 개의 국가로 분산되었습니다. 각 국가 내에는 이질적인 집단들이 섞여 있어, 국민 정체성의 형성이 지속적인 도전이 되었습니다.

둘째, 소수파 지배 구조의 형성. 프랑스와 영국의 분할 통치 전략은 여러 국가에서 소수 집단이 권력을 장악하는 구조를 낳았습니다. 이라크에서는 인구의 약 20%에 불과한 수니파 아랍인이 2003년까지 지속적으로 권력을 독점했고, 시리아에서는 인구의 약 12%인 알라위파가 1970년부터 하페즈 알-아사드 가문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이러한 소수파 지배 구조는 다수파의 불만과 저항, 그리고 지배 소수파의 가혹한 탄압이라는 악순환을 초래했습니다.

셋째, 종파주의(sectarianism)의 정치화. 위임통치 이전에도 중동에 종교적·종파적 다양성은 존재했지만, 종파가 정치적 정체성의 핵심 축이 된 것은 위임통치 시대부터였습니다. 프랑스가 시리아를 종파별로 분할하고, 레바논에 종파 기반 정치 체제를 도입한 것, 영국이 이라크에서 수니파 엘리트를 우대하고 시아파 다수를 정치적으로 소외시킨 것 — 이러한 정책들이 종파적 정체성을 정치화하고 고착시켰습니다.

넷째, 자원의 불균등 배분. 위임통치의 국경선은 석유와 수자원 같은 핵심 자원의 분포와 관계없이 그어졌습니다. 어떤 나라는 막대한 석유를 가진 반면, 바로 이웃한 나라는 자원이 빈약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요르단 강의 수자원을 둘러싼 분쟁,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의 수량 배분 문제 등은 위임통치가 만든 국경의 직접적 유산입니다.

8-2. 사이크스-피코의 망령 — ISIS와 국경선의 도전

위임통치 국경선에 대한 가장 극적인 도전은 2014년 ISIS(이라크-시리아 이슬람 국가)의 등장으로 나타났습니다. ISIS의 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는 “사이크스-피코의 국경을 파괴한다”고 선언하며, 이라크와 시리아 사이의 국경선을 물리적으로 해체하는 퍼포먼스를 벌였습니다.

ISIS의 등장은 여러 면에서 위임통치 국경선의 실패를 상징합니다. 이라크의 수니파 아랍인들 — 2003년 미국의 침공 이후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탈바트화(de-Ba’athification)로 직업을 잃은 — 이 ISIS의 핵심 지지 기반이 되었습니다. 시리아에서는 내전으로 국가가 사실상 분열되면서 ISIS가 동부 시리아를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라크와 시리아의 수니파 지역을 아우르는 ISIS의 ‘영토’는, 사이크스-피코 이전에 이 지역이 하나의 문화적·사회적 공간이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ISIS는 군사적으로 패배했고, 이라크-시리아 국경은 복원되었습니다. 그러나 ISIS가 제기한 근본적 질문 — 위임통치의 국경선이 이 지역의 주민들에게 정당성을 가지는가? — 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8-3. 레바논의 만성적 위기

프랑스가 만든 대레바논의 유산은 오늘날 레바논의 만성적 정치 위기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습니다. 1943년의 국민협약에 기반한 종파 기반 권력 배분 시스템은 레바논 정치를 영구적으로 교착 상태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1975-1990년 레바논 내전은 이 시스템의 모순이 폭발한 결과였습니다. 내전을 종결한 1989년 타이프 협정은 종파 시스템을 수정했지만 폐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결과 레바논은 오늘날에도 효과적인 정부 구성, 대통령 선출, 기본적 공공 서비스 제공에 반복적으로 실패하고 있습니다. 2019년의 경제 위기와 2020년 베이루트 항구 폭발 사건은 이 구조적 실패의 극적인 표출이었습니다.

레바논의 비극적 아이러니는, 마론파 기독교인들이 프랑스에 요청하여 얻어낸 ‘대레바논’이 바로 그 마론파의 정치적 지배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확장된 영토에 포함된 무슬림 인구의 높은 출산율로 인해 기독교인은 이미 20세기 중반에 과반수를 잃었고, 이는 1975년 내전의 핵심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8-4. 이라크 — 끝나지 않는 통합의 도전

영국이 세 개의 빌라예트를 하나로 묶어 만든 이라크는 건국 이래 한 번도 진정한 국민 통합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수니파의 독점적 지배(왕정기, 바트당 시대), 쿠르드족의 반복적 반란(1961-1970, 1974-1975, 1980년대), 시아파의 저항과 탄압(1991 봉기) — 이 모든 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국가의 내적 모순이 표출된 것이었습니다.

사담 후세인의 바트당 정권(1968-2003)은 이 모순을 극단적 억압으로 관리했습니다. 쿠르드족에 대한 안팔 작전(1988, 화학무기 사용 포함), 시아파에 대한 체계적 탄압, 쿠웨이트 침공(1990, 쿠웨이트와의 국경 분쟁이 한 원인) —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위임통치가 만든 구조적 문제에서 파생된 것이었습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바트당 정권 붕괴 이후, 이라크는 종파 기반 민주주의로 전환했지만, 이는 종파 갈등을 제도화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쿠르드 자치구(KRG)는 사실상 독립 국가에 가까운 자치를 행사하고 있으며, 2017년에는 독립 국민투표까지 실시했습니다(이라크 중앙정부와 국제 사회의 반대로 독립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이라크가 하나의 국가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은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8-5. 시리아 — 분할의 그림자

프랑스가 시리아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었다가 다시 합친 역사는 시리아의 국가 정체성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2011년 시작된 시리아 내전에서 알라위파, 수니파, 쿠르드족, 드루즈파 등 각 공동체가 사실상 별도의 군사·정치 세력으로 활동한 것은, 프랑스가 구획한 종파별 행정 단위의 유령이 되살아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내전 중 시리아가 사실상 여러 개의 통제 영역으로 분할된 것 — 아사드 정부 통제 지역(서부, 알라위파 중심), 반군 통제 지역(북서부, 수니파 중심), 쿠르드 자치 지역(북동부), ISIS 통제 지역(동부) — 은 프랑스 위임통치 시대의 분할 지도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했습니다. 물론 이것이 프랑스 위임통치의 직접적 ‘결과’라고 단순화할 수는 없지만, 위임통치가 심어놓은 종파적 정치 구조가 이러한 분열의 토양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제9장 — 위임통치의 역사적 평가

9-1. ‘문명화의 사명’이라는 허구

위임통치의 공식적 명분은 ‘아직 스스로를 통치할 준비가 되지 않은 민족들을 교육하고 보호하여 궁극적으로 독립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유럽 제국주의의 오래된 정당화 논리인 ‘문명화의 사명(mission civilisatrice)’을 국제법적 외피로 포장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현실에서 위임통치국들은 해당 지역의 자립적 발전보다 자국의 전략적·경제적 이익을 일관되게 우선시했습니다. 석유 이권의 확보, 군사 기지의 유지, 지역 세력 균형의 관리 — 이것이 위임통치의 실질적 목표였습니다. 교육과 인프라 건설이 일부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위임통치 체제의 안정적 유지를 위한 것이지 해당 지역 주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국제연맹의 위임통치위원회(Permanent Mandates Commission)가 존재하여 이론적으로 위임통치의 감독 기능을 수행했지만, 실질적인 강제력은 없었습니다. 위임통치국들은 연례 보고서를 제출하고 심사를 받았지만, 위원회의 권고를 무시해도 별다른 제재가 없었습니다.

9-2. 반사실적 질문: 위임통치 없이 중동은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서 ‘만약에’는 학술적으로 엄밀하지 않지만, 사고 실험으로서의 가치는 있습니다. 만약 위임통치가 없었다면 중동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의 가능성은 파이살의 아랍 왕국이 존속하여 대시리아(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 요르단)가 하나의 국가로 발전하는 시나리오입니다. 이 경우 레바논의 종파 분쟁이나 팔레스타인 분쟁의 양상은 상당히 달랐을 수 있습니다. 다만, 대시리아 내부의 민족·종교적 다양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므로, 또 다른 형태의 내적 갈등이 발생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쿠르드 독립 국가가 세브르 조약대로 수립되는 시나리오입니다. 이 경우 쿠르드족의 100년 독립 투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라크와 시리아, 튀르키예의 내적 역학도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반사실적 시나리오들은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 분명한 것은, 위임통치가 만든 현실의 국경선은 10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중동 정치의 기본 프레임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국경선 안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국가적 정체성을 발전시켜왔기에, 이제 이 국경을 바꾸는 것은 또 다른 거대한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위임통치의 유산은 그래서 더욱 비극적입니다 — 잘못된 출발점에서 시작되었지만,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9-3. 교훈과 성찰

위임통치 시대의 역사는 여러 가지 교훈을 제공합니다.

첫째, 외부 세력이 그은 국경은 장기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것입니다. 해당 지역 주민들의 역사적·문화적·종교적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 국경은 끊임없이 도전받게 됩니다. 국경이 정당성을 획득하려면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둘째, ‘분할 통치’는 단기적으로는 효과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파괴적이라는 것입니다. 프랑스와 영국이 종파·민족 차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은 통치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지만, 그 결과로 종파주의가 정치의 핵심 축으로 고착되어 오늘날까지 해당 국가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셋째, 국제 규범과 실제 행동의 괴리에 대한 경고입니다. 위임통치는 민족자결과 독립 지원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식민지배의 연장이었습니다. 고상한 원칙이 강대국의 이익 추구를 위한 수사적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위임통치의 역사는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넷째, 역사적 결정의 장기적 파급력에 대한 인식입니다. 1920년대에 내려진 결정들 — 이라크의 국경, 레바논의 창설,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의 조건 — 이 100년 뒤에도 수백만 명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는 정치적 결정, 특히 국경과 정치 체제에 관한 결정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결론 — 지도 위의 선, 삶 위의 상처

위임통치 시대는 중동 현대사의 ‘원죄(original sin)’라 불리기도 합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자(尺)와 연필로 그은 국경선은, 그 선 위에 살고 있던 수천만 명의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탄생한 국가들은 태생적으로 내적 정당성의 결핍을 안고 출발했고, 이 결핍은 1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중동의 정치적 불안정의 근본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위임통치의 국경선만이 중동의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입니다. 독립 이후 각국의 지도자들의 선택, 냉전의 영향, 석유 정치, 이슬람주의의 부상 등 수많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왔습니다. 하지만 위임통치가 만든 구조적 틀 — 인위적 국경, 종파 기반 정치, 소수파 지배 구조 — 이 이후의 모든 정치적 발전의 기본 무대를 설정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지난 42화에서 사이크스-피코 협정과 밸푸어 선언이라는 ‘설계도’를 살펴보았다면, 이번 43화에서는 그 설계도가 어떻게 현실의 국가로 구현되었는지를 추적해보았습니다. 종이 위의 선이 어떻게 현실의 국경이 되고, 그 국경이 어떻게 민족을 나누고, 종파를 정치화하고, 갈등의 구조를 만들어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44화에서는 이 위임통치의 유산이 가장 폭발적으로 표출된 사건 — 이스라엘의 건국과 그에 따른 첫 번째 중동전쟁, 그리고 팔레스타인 난민의 탄생 — 을 다루겠습니다. 밸푸어 선언과 위임통치가 뿌린 씨앗이 어떻게 20세기 가장 길고 복잡한 분쟁으로 성장했는지, 그 첫 번째 장을 함께 펼쳐보겠습니다.

이미지는 Leonardo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이미지는 Claude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 시리즈: 중동의 역사 (총 52화 중 4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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