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며 — 십자군의 예루살렘, 88년의 점령
지난 26화에서 우리는 십자군 전쟁을 중동의 시선으로 다시 살펴보았습니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 도시 안에서 벌어진 대학살은 이슬람 세계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무슬림과 유대인 가릴 것 없이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알아크사 모스크는 피로 물들었습니다. 이후 십자군은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고, 레반트 해안을 따라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국, 에데사 백국 등 이른바 ‘십자군 국가’를 건설했습니다.
그로부터 88년, 이슬람 세계는 분열과 내분 속에서도 서서히 반격의 기운을 모아가고 있었습니다. 장기 왕조의 이마드 앗딘 장기가 1144년 에데사를 탈환하며 첫 불씨를 지폈고, 그의 아들 누르 앗딘이 시리아를 통일하며 반격의 토대를 닦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역사의 무대에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쿠르드족 출신의 젊은 장군,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 서양에서는 살라딘(Saladin)이라 불리는 인물입니다.
이번 27화에서는 살라딘이 어떻게 분열된 이슬람 세계를 하나로 묶고, 십자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여 예루살렘을 되찾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여준 놀라운 관용이 왜 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회자되는지를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살라딘의 출생과 성장 — 쿠르드족 소년에서 이슬람의 영웅으로
티크리트의 쿠르드족 가문
살라딘은 1137년(또는 1138년), 오늘날 이라크 북부의 티크리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문은 쿠르드족으로, 아버지 나짐 앗딘 아이유브는 티크리트의 성채 사령관이었습니다. 쿠르드족은 아랍인도 튀르크인도 아닌 독자적인 민족으로, 이란계 언어를 사용하는 산악 민족이었습니다.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 민족적 출신보다 종교적 헌신과 군사적 능력이 더 중요했기에, 쿠르드족 출신이라는 사실이 살라딘의 출세를 가로막지는 않았습니다.
살라딘의 아버지 아이유브와 삼촌 시르쿠흐는 장기 왕조의 누르 앗딘 밑에서 복무하는 유능한 군인이었습니다. 살라딘은 어린 시절 바알베크와 다마스쿠스에서 자라며, 쿠란 학습과 이슬람 신학, 아랍 문학, 그리고 군사 훈련을 두루 받았습니다. 동시대 사료들은 젊은 살라딘이 전쟁보다 학문과 종교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전합니다. 이슬람 법학(피크흐)과 하디스에 깊은 조예가 있었고, 시와 문학을 즐겼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누르 앗딘의 그늘에서
살라딘의 정치적 성장을 이해하려면, 먼저 누르 앗딘 마흐무드라는 인물을 알아야 합니다. 누르 앗딘은 장기 왕조의 2대 지도자로, 아버지 이마드 앗딘 장기가 닦아놓은 기반 위에 시리아 전역을 통일한 인물입니다. 그는 단순한 군사 지도자가 아니라, ‘지하드’의 이념을 체계화하고 이슬람 세계의 통합을 종교적 사명으로 내세운 정치가였습니다.
누르 앗딘은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삼고, 병원과 학교(마드라사)를 세우며, 이슬람 법에 기반한 정의로운 통치를 추구했습니다. 그의 궁극적 목표는 이집트까지 포함하는 이슬람 세계의 대통합이었고, 이를 통해 십자군을 몰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살라딘은 바로 이 누르 앗딘의 전략적 비전 속에서 성장했고, 훗날 그 비전을 완성하는 인물이 됩니다.

이집트 원정과 권력의 기반 — 파티마 왕조의 종말
시르쿠흐의 이집트 원정
1160년대,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는 극심한 내부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23화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때 강성했던 시아파 파티마 왕조는 이 시기에 이르면 실질적인 권력이 칼리프가 아닌 재상(와지르)에게 넘어간 상태였고, 재상 자리를 둘러싼 권력 투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집트의 한 재상 파벌이 누르 앗딘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또 다른 파벌은 예루살렘 왕국의 십자군에게 도움을 구했습니다. 이집트는 이슬람 세계와 십자군 모두에게 전략적 보물이었습니다. 나일강의 비옥한 농지, 홍해와 지중해를 잇는 교역로, 그리고 막대한 인구와 재원 — 이집트를 장악하는 쪽이 전쟁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습니다.
누르 앗딘은 자신의 최고 장군인 시르쿠흐(살라딘의 삼촌)를 이집트로 파견했습니다. 1164년부터 1169년까지 시르쿠흐는 세 차례에 걸쳐 이집트 원정을 수행했고, 젊은 살라딘은 삼촌을 따라 원정에 참가했습니다. 살라딘은 처음에는 이 원정에 별로 내키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삼촌의 명령과 누르 앗딘의 의지를 따라 이집트 땅을 밟게 됩니다.
세 차례의 이집트 원정
제1차 원정(1164년)에서 시르쿠흐는 이집트에 진입하여 빌베이스를 점령했지만, 십자군 왕국의 아말리크 1세가 개입하면서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양측은 결국 이집트에서 동시에 철수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제2차 원정(1167년)에서 시르쿠흐는 다시 이집트로 진군했고, 살라딘은 알렉산드리아의 방어를 맡았습니다. 이것이 살라딘이 독자적인 군사 지휘관으로서 두각을 나타낸 첫 번째 사건입니다. 살라딘은 십자군과 이집트 연합군의 포위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리아를 성공적으로 방어했으며, 주민들의 존경을 얻었습니다. 다시 한번 양측이 철수 합의를 했지만, 이집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결정적인 제3차 원정(1168~1169년)은 예루살렘 왕국의 아말리크 1세가 먼저 이집트를 침공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십자군은 빌베이스에서 잔혹한 학살을 자행했고, 이에 공포를 느낀 이집트인들은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시르쿠흐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시르쿠흐는 신속하게 이집트로 진군하여 십자군을 물리쳤고, 1169년 1월 파티마 칼리프로부터 재상(와지르) 직위를 받았습니다.
살라딘의 재상 취임
그러나 시르쿠흐는 재상이 된 지 불과 두 달 만인 1169년 3월에 급사합니다. 식중독이나 과식이 원인이라는 설이 있으나, 정확한 사인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시르쿠흐의 뒤를 이어 재상 자리에 오른 것은 다름 아닌 살라딘이었습니다. 당시 살라딘은 31세의 청년이었고, 누르 앗딘의 장교들 사이에서도 가장 유력한 후보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파티마 칼리프 알아디드가 경험이 적어 다루기 쉬울 것이라 판단하여 살라딘을 선택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습니다. 수니파인 살라딘이 시아파 파티마 왕조의 재상이 된 것입니다. 살라딘은 처음에는 파티마 칼리프의 권위를 존중하는 듯 행동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수니파로의 전환을 차근차근 준비했습니다. 그는 파티마 왕조의 군사 엘리트인 흑인 노예 병사들과 아르메니아인 근위대의 반란을 진압하고, 자신의 쿠르드족과 튀르크족 병사들로 군대를 재편했습니다.
1171년, 파티마 칼리프 알아디드가 병으로 사망하자, 살라딘은 금요 예배에서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 칼리프의 이름으로 설교(후트바)를 올리도록 지시했습니다. 이것은 파티마 왕조의 공식적인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23화에서 다룬 것처럼 909년 이래 262년간 존속해온 시아파 칼리프 왕조가 이렇게 조용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집트는 다시 수니파 세계로 편입되었고, 살라딘은 명목상으로는 누르 앗딘의 신하이자 아바스 칼리프의 대리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집트의 독립적인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이슬람 세계의 통합 — 살라딘의 20년 여정
누르 앗딘과의 긴장
살라딘이 이집트를 장악하면서, 그와 누르 앗딘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이 생겨났습니다. 누르 앗딘은 살라딘을 자신의 부하로 여겼고, 이집트의 수입을 시리아로 보내 십자군과의 전쟁 비용에 충당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살라딘은 다양한 구실을 대며 이집트의 자원을 자신의 권력 기반 강화에 사용했습니다. 누르 앗딘이 직접 이집트로 원정하여 살라딘을 응징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지만, 1174년 5월 누르 앗딘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이 긴장은 해소되었습니다.
누르 앗딘의 죽음은 살라딘에게 역사적 기회를 열어주었습니다. 누르 앗딘의 후계자는 11세의 어린 아들 알살리흐 이스마일이었고, 장기 왕조의 장군들은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분열했습니다. 살라딘은 이 혼란을 틈타 시리아로 진군합니다.
시리아 장악 — 무력과 외교의 병행
살라딘의 시리아 진출은 신중하고 전략적이었습니다. 그는 무력 정복만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외교, 혼인 동맹, 그리고 이슬람 통합이라는 대의명분을 교묘하게 결합했습니다.
1174년 10월, 살라딘은 다마스쿠스에 입성했습니다. 도시의 주민들은 그를 환영했고, 누르 앗딘의 장기 왕조 잔존 세력은 큰 저항 없이 물러났습니다. 살라딘은 자신을 정복자가 아니라 ‘누르 앗딘의 유산을 보전하고 십자군에 맞서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는 보호자’로 포지셔닝했습니다.
이후 살라딘은 홈스, 하마, 알레포 등 시리아의 주요 도시들을 하나씩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습니다. 알레포는 장기 왕조의 마지막 거점으로 가장 오래 저항했지만, 1183년에 결국 살라딘에게 항복했습니다. 이로써 살라딘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손에 넣었고, 십자군 국가들을 남쪽과 동쪽에서 동시에 압박할 수 있는 전략적 포위망을 완성했습니다.

아이유브 왕조의 기틀
살라딘은 정복한 영토를 가문 중심으로 통치했습니다. 형제, 조카, 사촌 등 아이유브 가문의 인물들을 각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했고, 이것이 후에 아이유브 왕조(1171~1260년)의 기틀이 됩니다. 이집트에는 형제 알아딜을, 예멘에는 동생 투란샤를, 각 시리아 도시에는 신뢰할 수 있는 가문 구성원을 배치했습니다.
동시에 살라딘은 종교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프로부터 이집트와 시리아의 통치자로 공식 인정을 받았고, 마드라사(이슬람 학교)를 건설하여 수니파 정통 교리를 확산시켰습니다. 이집트에서는 파티마 왕조 시절의 시아파 교육 기관들을 수니파 마드라사로 전환했습니다. 병원(비마리스탄)과 수피 수도원(한카)도 세워 대중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살라딘의 통합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이 시기에 이스마일파(암살단, 아사신)가 살라딘을 두 차례나 암살 시도했습니다. 시리아 산악 지대에 근거지를 둔 이스마일파의 지도자 라시드 앗딘 시난(구노인이라 불림)은 살라딘의 팽창을 위협으로 여겼습니다. 한 번은 살라딘이 잠을 자다가 암살자의 칼에 베일 뻔한 적도 있었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결국 살라딘은 이스마일파와 일종의 불가침 합의를 맺어 후방의 위협을 제거했습니다.
하틴 전투 — 십자군 왕국의 운명이 결정된 하루
전쟁의 도화선 — 르노 드 샤티용의 도발
살라딘이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는 동안, 십자군 국가들 내부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왕국에는 온건한 평화파와 강경한 전쟁파가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나병을 앓으면서도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한 보두앵 4세(나병왕)는 살라딘과 여러 차례 휴전을 맺으며 왕국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1185년 보두앵 4세가 사망하고, 뒤를 이은 보두앵 5세도 곧 사망하면서, 예루살렘 왕위는 기 드 뤼지냥에게 돌아갔습니다.
기 드 뤼지냥은 경험 부족한 왕이었고, 강경파의 영향력이 커졌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문제적인 인물이 르노 드 샤티용(레이날드 오브 샤티용)이었습니다. 트란스요르단의 영주였던 르노는 무슬림 상인 대상(카라반)을 약탈하고, 심지어 홍해에 함대를 파견하여 메카와 메디나 순례길의 무슬림 순례자들을 공격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이슬람 세계 전체를 모욕하는 행위였습니다.
1186년 말, 르노는 살라딘과 예루살렘 왕국 사이의 휴전 협정을 노골적으로 위반하며 대규모 무슬림 카라반을 습격했습니다. 살라딘의 여동생이 그 카라반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전승도 있으나, 이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살라딘은 기 드 뤼지냥에게 르노를 처벌하고 약탈품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지만, 기는 르노를 통제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살라딘은 이를 전면전의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하틴으로 가는 길
1187년 6월, 살라딘은 이슬람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원정군을 소집했습니다. 이집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각지에서 모인 병력은 약 2만에서 3만에 달했으며, 여기에는 정규군, 튀르크계 기병, 쿠르드족 전사, 아랍 유목민 기병이 포함되었습니다.
살라딘은 먼저 갈릴리 호수 서쪽의 티베리아스를 공격하여 십자군의 출동을 유도했습니다. 티베리아스는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의 아내가 지키고 있었기에, 십자군으로서는 구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레몽 3세 자신은 살라딘과 오랫동안 외교적 관계를 유지해온 인물로, 이 전투에서 출격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레몽은 군사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살라딘이 원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수원지를 떠나 사막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티베리아스는 내 아내의 성이고, 잃게 되면 나의 손실이 가장 크지만, 그럼에도 출격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르노 드 샤티용과 성전기사단장 제라르 드 리드포르가 레몽을 비겁자라 비난하며 출격을 주장했고, 기 드 뤼지냥은 결국 전쟁파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1187년 7월 4일, 하틴의 뿔
1187년 7월 3일, 십자군 주력 약 2만 명(중기병 1,200명 포함)은 세포리의 수원지를 떠나 티베리아스를 향해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7월의 팔레스타인은 살인적인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시기였습니다. 살라딘은 바로 이것을 노렸습니다.
살라딘은 기병대를 동원하여 십자군의 행군로를 따라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화살 세례를 퍼부으며 행군 속도를 늦추고, 수원지로의 접근을 차단했습니다. 십자군 병사들은 갈증과 더위에 시달리면서 7월 4일 새벽 하틴의 뿔(Horns of Hattin)이라 불리는 사화산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극도로 지친 상태였습니다.
살라딘은 바짝 마른 관목에 불을 질렀습니다. 연기와 열기가 이미 탈수 상태인 십자군을 더욱 괴롭혔습니다. 살라딘의 아들 알아프달은 훗날 이날의 전투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나는 아버지 곁에서 처음으로 전투를 목격했습니다. 십자군이 우리 이슬람 군대에게 밀렸을 때, 나는 기뻐서 ‘우리가 이겼다!’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프랑크인들이 다시 돌진해왔고, 무슬림 병사들이 언덕 위로 밀려났습니다. 나는 다시 ‘우리가 이겼다!’고 외쳤지만, 아버지는 나를 돌아보며 조용히 하라고 했습니다. ‘저 텐트가 쓰러지기 전에는 우리가 이긴 게 아니다.’ 그리고 얼마 후, 왕의 붉은 텐트가 무너졌고, 아버지는 말에서 내려 감사의 절을 올렸습니다.”
하틴 전투의 결과는 압도적이었습니다. 십자군 야전군은 사실상 전멸했습니다. 예루살렘 왕 기 드 뤼지냥이 포로로 잡혔고, 르노 드 샤티용, 성전기사단장 제라르 드 리드포르, 그리고 수백 명의 기사와 귀족이 생포되었습니다. 가장 신성한 유물로 여겨진 ‘진정한 십자가(True Cross)’ 성유물도 무슬림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르노 드 샤티용의 최후
전투 후 살라딘의 텐트에서 벌어진 장면은 역사적으로 매우 유명합니다. 포로로 잡힌 기 드 뤼지냥 왕과 르노 드 샤티용이 살라딘 앞에 끌려왔습니다. 더위와 갈증에 지친 기 왕이 비틀거리자, 살라딘은 장미수를 섞은 냉수를 그에게 건넸습니다. 아랍의 전통에서 포로에게 음식이나 물을 주는 것은 그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기 왕이 물잔을 르노에게 건네자, 살라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에게 물을 준 것이 아니다.” 이것은 르노에게는 관용을 베풀 의사가 없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살라딘은 르노에게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르노는 거절했습니다. 살라딘은 직접 칼을 들어 르노의 어깨를 베었고, 근위병이 마무리했습니다.
이 장면에서 살라딘의 성격이 잘 드러납니다. 그는 휴전 협정을 위반하고 무슬림 순례자를 학살한 르노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처벌했지만, 전쟁의 규칙을 따른 적에게는 관대함을 보였습니다. 기 드 뤼지냥 왕은 이후 석방되었고,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의 기사 200여 명은 처형되었지만, 일반 병사들 중 상당수는 몸값을 받고 풀려났습니다.
예루살렘 재탈환 — 1187년 10월 2일
해안 도시들의 연쇄 함락
하틴 전투 이후, 십자군 국가들의 방어체계는 무너졌습니다. 야전군이 전멸했기에 각 성과 도시는 자체 수비병만으로 버텨야 했습니다. 살라딘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1187년 7월부터 9월까지 석 달도 채 되지 않는 기간에, 그는 레반트 해안의 주요 거점들을 줄줄이 함락시켰습니다.
아크레(아코)는 7월 10일에 항복했고, 이어서 야파, 시돈, 베이루트, 아스칼론이 차례로 무너졌습니다. 대부분의 도시는 큰 전투 없이 협상으로 항복했습니다. 살라딘은 항복하는 도시의 기독교인들에게 안전한 철수를 허용했고, 이는 다른 도시들의 저항 의지를 약화시키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반면 저항하다 함락된 일부 도시에서는 약탈이 벌어지기도 했으니, 이는 항복을 유도하기 위한 전략적 차별화이기도 했습니다.
9월 말까지 십자군의 손에 남은 주요 거점은 몇 곳 되지 않았습니다. 안티오키아, 트리폴리, 티르(튀르), 그리고 목표인 예루살렘이 아직 함락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예루살렘 포위전
1187년 9월 20일, 살라딘의 군대는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도시 안에는 약 6만 명의 기독교인이 있었고, 전투 가능한 기사는 고작 2명뿐이었습니다. 나머지는 피난민, 여성, 아이들이었습니다. 도시의 방어를 맡은 것은 발리앙 디벨린(Balian of Ibelin)이라는 기사였습니다.
발리앙은 원래 살라딘의 안전통행증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려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도시에 도착하자 주민들이 방어를 이끌어달라고 간청했고, 발리앙은 머물기로 결정했습니다. 살라딘은 발리앙이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해 불쾌감을 표했지만, 전시 상황의 특수성을 이해하고 큰 문제 삼지는 않았습니다.
살라딘은 처음에 평화로운 항복을 제안했습니다. 주민들에게 재산을 가지고 안전하게 떠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시 안의 기독교인들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한 성스러운 땅이었고, 평화적 양도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살라딘은 공성전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도시의 서쪽과 남쪽에서 공격했지만, 1099년 십자군이 침입한 그 방향으로 방어가 집중되어 있어 효과가 없었습니다. 살라딘은 공격 방향을 북동쪽 올리브산 방면으로 전환했고, 이는 효과적이었습니다. 투석기와 갱도 파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9월 29일에는 성벽 일부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발리앙의 최후 협상
상황이 절망적이 되자, 발리앙 디벨린은 살라딘에게 항복 협상을 제안했습니다. 살라딘은 처음에는 거절했습니다. 그는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 무슬림들에게 저지른 대학살을 언급하며, 같은 방식으로 도시를 정복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발리앙은 절박한 위협을 했습니다. “만약 협상이 불가하다면, 우리는 도시 안의 모든 무슬림 포로 5,000명을 죽이고, 알아크사 모스크와 바위의 돔을 파괴한 뒤, 가족을 죽이고 마지막 한 명까지 싸울 것입니다.” 이것은 블러프였을 수도, 진심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살라딘은 이슬람의 세 번째로 성스러운 장소(하람 알샤리프)가 파괴되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습니다.
살라딘은 측근들과 논의한 끝에 협상에 응했습니다.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남성은 10디나르, 여성은 5디나르, 어린이는 1디나르의 몸값을 내고 안전하게 퇴거할 수 있다.
- 몸값을 낼 수 없는 빈민들은 40일의 유예 기간을 준다.
- 정교회 기독교인들은 원하면 도시에 잔류할 수 있다(십자군과 달리 원주민 기독교인들은 무슬림과의 공존 경험이 있었다).
- 도시 안의 재산과 상품은 반출할 수 있다.
1187년 10월 2일, 금요일, 이슬람력으로 라잡 월 27일 — 이것은 무함마드의 ‘밤의 여행과 승천(이스라와 미라지)’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무함마드가 예루살렘에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그 기념일에, 살라딘은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이 시기적 일치가 우연인지 의도된 것인지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지만, 어느 쪽이든 이슬람 세계에 강렬한 상징적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살라딘의 관용 — 1099년과 1187년의 극명한 대비
대학살 대신 관용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 벌어진 일을 떠올려봅시다. 십자군 연대기 작가들조차 자랑스럽게 기록한 대학살이 있었습니다. 무슬림과 유대인 수만 명이 학살되었고, 알아크사 모스크 안에서 피가 무릎까지 찼다는 (과장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시체는 거리에 쌓였고, 유대인들은 회당에 몰려 산 채로 불태워졌습니다.
1187년 살라딘의 예루살렘 정복은 그와 극명하게 대비되었습니다. 조직적인 학살은 없었습니다. 약탈도 엄격히 통제되었습니다. 살라딘은 도시에 치안 병력을 배치하여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했습니다. 교회들은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성묘 교회(예수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는 곳)는 정교회 기독교인들에게 운영이 맡겨졌습니다.
살라딘은 개인적으로도 관대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몸값을 낼 수 없는 수천 명의 빈민들에 대해, 살라딘의 형제 알아딜이 1,000명의 몸값을 대신 지불하겠다고 요청했고, 살라딘은 이를 허락했습니다. 살라딘 자신도 수백 명의 몸값을 면제해주었습니다. 발리앙 디벨린의 간청으로 추가로 수천 명이 풀려났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1만 5,000명의 기독교인이 몸값을 지불하지 못하여 노예가 되었다는 기록도 있어, 살라딘의 관용이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람 알샤리프(성전산)의 정화
살라딘이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하람 알샤리프(성전산)의 이슬람 성소 복원이었습니다. 바위의 돔(쿠밧 알사흐라)은 십자군 시대에 기독교 교회(주의 성전, Templum Domini)로 전용되어 있었고, 꼭대기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알아크사 모스크는 성전기사단의 본부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일부는 마구간과 곡물 창고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철거되었고, 모스크 내부는 장미수로 정화되었습니다. 살라딘은 누르 앗딘이 미리 제작해두었던 화려한 민바르(설교단)를 알아크사 모스크에 설치했습니다. 누르 앗딘은 예루살렘 재탈환을 확신하며 수년 전에 이 민바르를 알레포에서 제작시켰는데, 자신은 그날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살라딘이 그 유지를 이어받은 것입니다. (이 민바르는 안타깝게도 1969년에 한 호주인 극단주의자의 방화로 소실되었습니다.)
첫 번째 금요 예배에서 이맘 이마드 앗딘 알이스파하니가 올린 설교(후트바)는 이슬람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설교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이 도시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며, 예언자가 밤의 여행에서 하늘로 올라간 곳이니, 하느님의 축복이 이 도시와 이 도시를 되찾은 이에게 내리기를.”

살라딘의 통치 철학과 인물 분석
살라딘의 성격과 리더십
살라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시대 사료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자 서기관이었던 이마드 앗딘 알이스파하니, 그리고 역사가 바하 앗딘 이븐 샤다드의 기록은 살라딘의 일상과 성격을 상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바하 앗딘에 따르면, 살라딘은 쿠란의 가르침에 깊이 헌신한 인물이었습니다. 매일 다섯 번의 예배를 거르지 않았고, 라마단 금식을 엄격히 준수했으며, 이슬람 법학에 대한 토론을 즐겼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재산을 축적하지 않았습니다. 사망 시 그의 개인 재산은 금화 한 닢과 은화 몇 개에 불과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벌어들인 수입의 대부분을 군사비와 자선에 썼기 때문입니다.
살라딘은 부하들에 대해 너그러웠고, 적에게도 일정한 예우를 갖추었습니다. 제3차 십자군 전쟁 중 영국 왕 리처드 1세(사자심왕)가 병에 걸렸을 때, 살라딘이 과일과 얼음을 보내고 자신의 주치의를 보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또한 리처드의 말이 전투 중 쓰러졌을 때, 살라딘이 새 말 두 필을 보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이러한 기사도적 행동은 서양에서도 살라딘을 존경하게 만들었고, 단테의 <신곡>에서 살라딘이 지옥의 첫 번째 원(림보)에 — 즉, 고귀한 이교도들 사이에 — 배치된 것은 이러한 존경의 반영입니다.
하지만 살라딘을 지나치게 이상화하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냉정한 정치적 계산을 할 줄 아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이슬람 세계 통합 과정에서 동료 무슬림 도시들을 포위하고 공격한 것도 사실이며, 하틴 전투 후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 기사 200여 명을 처형한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정치적 필요에 따라 약속을 유연하게 해석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살라딘은 성인이 아니라 시대의 탁월한 정치 군사 지도자였으며, 그의 관용도 전략적 계산과 종교적 신념이 결합된 결과물이었습니다.
경제적 기반과 군사 체계
살라딘의 군사적 성공 뒤에는 탄탄한 경제적 기반이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 농업 생산력은 중동 최고 수준이었고,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를 통한 지중해 교역은 막대한 세수를 보장했습니다. 여기에 시리아의 도시 경제와 메소포타미아의 자원이 더해지면서, 살라딘은 장기간의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재정적 여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살라딘의 군사 체계는 이크타(iqta) 제도에 기반했습니다. 이크타는 군사 복무의 대가로 토지의 세금 징수권을 부여하는 일종의 봉토 제도로, 25화에서 다룬 셀주크 튀르크의 제도를 계승한 것입니다. 이 체계의 장점은 상비군을 유지하지 않고도 전쟁 시 대규모 병력을 소집할 수 있다는 것이었지만, 단점은 토지 보유자들의 충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살라딘의 군대는 장기 원정 시 병력 이탈 문제를 겪기도 했습니다.
제3차 십자군 전쟁의 그림자
유럽의 충격과 반응
예루살렘 함락 소식은 유럽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교황 우르바노 3세는 이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사망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소식을 들은 직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것은 사실입니다). 후임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취임 즉시 새로운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는 칙서 <자비로운 하느님(Audita tremendi)>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유럽의 세 강대국 군주가 동시에 응답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바르바로사),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영국의 리처드 1세(사자심왕)가 각각 대군을 이끌고 성지로 향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3차 십자군 전쟁(1189~1192년)입니다.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는 10만 대군(과장된 숫자일 가능성이 높지만, 중세 기준으로 거대한 군대였음은 분명)을 이끌고 육로로 출발했지만, 1190년 소아시아의 살레프 강을 건너다 익사하면서 그의 원정군은 와해되었습니다. 살라딘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리처드 사자심왕이라는 새로운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리처드와 살라딘 — 전설적 라이벌
리처드 1세는 살라딘과 함께 제3차 십자군 전쟁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1191년 리처드는 아크레(아코)를 함락하고, 아르수프 전투에서 살라딘을 격파하여 해안선을 탈환했습니다. 리처드의 군사적 능력은 살라딘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리처드는 예루살렘까지 진군하지 못했습니다. 병참선이 길어지고, 내분이 심화되면서 두 차례 예루살렘 근처까지 접근했다가 철수했습니다. 특히 리처드가 아크레에서 무슬림 포로 2,700명을 처형한 사건은 살라딘의 관용과 극명하게 대비되어, 서양 역사학계에서도 오랫동안 논쟁이 되었습니다. 리처드는 몸값 협상이 지연되자 포로들을 학살한 것인데, 이는 순수한 잔혹함이라기보다 전쟁의 냉정한 실용적 계산(빠르게 남진해야 했기에 포로를 데리고 다닐 수 없었다)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결국 1192년, 리처드와 살라딘은 야파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예루살렘은 무슬림의 수중에 남되, 기독교 순례자들에게 자유로운 방문을 허용한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해안선의 아크레에서 야파까지는 십자군이, 내륙은 살라딘이 통제하는 분할 체제가 성립되었습니다. 두 지도자가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서신과 사절을 통한 교류는 빈번했고, 상호 존중의 태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살라딘의 마지막 날들
소진된 몸과 영혼
야파 조약이 체결된 지 불과 5개월 후인 1193년 3월 4일, 살라딘은 다마스쿠스에서 사망했습니다. 향년 55세(또는 56세)였습니다. 사인은 장티푸스로 추정되지만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수십 년간 계속된 전쟁과 원정, 정치적 스트레스가 그의 건강을 갈아먹었을 것입니다.
사망 당시 그의 개인 재산은 금화 47 디르함과 은화 한 닢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장례 비용조차 충당하기 어려워 측근이 돈을 모아야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것은 살라딘이 평생 개인적 부의 축적보다 군사와 자선에 재원을 투입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화입니다.
살라딘은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모스크 옆에 묻혔고, 그의 묘소는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습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1898년 다마스쿠스를 방문했을 때, 이 묘소에 대리석 관을 기증했는데, 살라딘의 유해는 여전히 원래의 나무 관에 안치되어 있고 빌헬름의 관은 옆에 전시용으로 놓여 있습니다.
살라딘 이후의 아이유브 왕조
살라딘의 사후, 그의 제국은 아이유브 가문 내에서 분열되었습니다. 이집트는 아들 알아지즈에게, 다마스쿠스는 아들 알아프달에게, 알레포는 아들 알자히르에게 돌아갔고, 형제 알아딜이 가문 내 권력 투쟁에서 최종 승자가 되어 이집트와 시리아를 재통합했습니다. 아이유브 왕조는 1260년 맘루크의 쿠데타로 끝날 때까지 약 90년간 존속했습니다.
역사적 평가 — 신화와 현실 사이의 살라딘
이슬람 세계에서의 살라딘
살라딘은 이슬람 세계에서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 중 한 명입니다. 예루살렘을 되찾은 영웅이자, 정의롭고 관대한 통치자의 모범으로 기억됩니다. 근대에 들어 살라딘은 아랍 민족주의의 상징으로도 활용되었습니다. 이집트의 나세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공교롭게도 살라딘과 같은 티크리트 출신) 등이 자신을 살라딘에 비유했습니다.
하지만 살라딘이 쿠르드족이라는 사실은 아랍 민족주의적 해석과 긴장을 빚기도 합니다. 쿠르드족에게 살라딘은 자신들의 민족적 영웅이며, 이라크 쿠르드 자치구의 살라흐 앗딘 주(州)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한편 이집트에서 살라딘은 시아파 파티마 왕조를 무너뜨리고 수니파를 복원한 인물로 기억되기도 합니다.
서양에서의 살라딘
흥미롭게도 살라딘은 서양에서도 오랫동안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중세 유럽의 기사 문학에서 살라딘은 ‘고귀한 이교도’의 전형으로 등장합니다. 단테의 <신곡>에서 림보에 배치된 것 외에도,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서 지혜로운 인물로 묘사되었으며, 발터 스콧의 소설 <탈리스만>(1825)에서는 리처드 사자심왕과 맞먹는 영웅으로 그려졌습니다. 레싱의 희곡 <현자 나단>(1779)에서도 관용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이러한 서양에서의 긍정적 이미지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특히 강화되었습니다. 볼테르를 비롯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살라딘의 관용을 기독교의 불관용과 대비시키며, 종교적 광신에 대한 비판의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현대 역사학의 재평가
현대 역사학은 살라딘에 대해 보다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합니다. 영국의 중세사 학자 조너선 필립스는 살라딘의 관용이 순수한 도덕적 선택이라기보다, 전략적 계산과 이슬람 법의 전쟁 규범, 그리고 개인적 신앙의 복합적 결과물이었다고 분석합니다.
예루살렘에서의 관대한 처우는 여러 실용적 이유가 있었습니다. 대학살은 아직 항복하지 않은 다른 십자군 거점들의 결사 항전을 유발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기독교인들로부터 받은 몸값은 군비 충당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로서 예언자 무함마드의 전쟁 윤리(비전투원 보호, 포로 관대 처우 등)를 따르는 것은 종교적 정당성을 강화하는 데 필수적이었습니다.
살라딘이 무슬림 동포를 상대로 한 전쟁(이슬람 세계 통합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동료 무슬림 도시들을 포위하고 공격하는 데 예루살렘 재탈환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비판자들은 살라딘의 ‘성전(지하드)’ 선언이 실제로는 개인적 야심과 왕조 건설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반면 옹호자들은 분열된 이슬람 세계의 통합 없이는 십자군 격퇴가 불가능했으므로, 이 과정은 필연적이었다고 봅니다.
진실은 아마 그 사이에 있을 것입니다. 살라딘은 깊은 종교적 신념과 냉정한 정치적 현실주의를 겸비한 인물이었고, 이 두 측면이 갈등하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했습니다. 그의 관용은 진심이었지만, 동시에 현명한 전략이기도 했습니다.
살라딘의 유산이 오늘에 전하는 것
전쟁 속의 인간성
살라딘의 이야기가 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는 이유는, 그것이 전쟁 속에서도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영원한 질문에 하나의 답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답은 아닐지라도, 1099년의 대학살과 1187년의 관용 사이의 간극은 지도자의 선택이 역사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를 보여줍니다.
살라딘은 복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88년 전의 대학살은 그에게 보복의 완벽한 명분을 주었습니다. 그의 병사들 중 상당수도 보복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이것이 순수한 자비심이든, 전략적 판단이든, 아니면 이슬람 전쟁 윤리에 대한 헌신이든, 그 결과는 동일했습니다 — 수만 명의 생명이 구해졌고, 예루살렘은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문명 간 대화의 가능성
살라딘과 리처드의 관계는 적대적이면서도 상호 존중적이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서신을 교환하고, 선물을 보내고, 서로의 용기를 인정했습니다. 이것은 ‘문명의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현대의 일부 담론에 대한 역사적 반례가 됩니다. 13세기의 적들이 보여준 상호 존중이, 21세기의 우리가 아직도 도달하지 못한 수준인 경우가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이것을 지나치게 낭만화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군 전쟁은 여전히 잔혹한 전쟁이었고, 양측 모두 폭력과 잔인함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인간성의 순간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역사가 우리에게 남기는 귀중한 교훈입니다.
마무리 — 예루살렘 이후의 중동
살라딘의 예루살렘 재탈환은 십자군 전쟁의 전환점이었지만, 전쟁의 끝은 아니었습니다. 제3차 십자군의 리처드 사자심왕이 해안선을 되찾으면서, 십자군 국가들은 축소된 형태로 한 세기 더 존속했습니다. 그리고 살라딘 사후 아이유브 왕조는 내부 분열과 외부의 새로운 위협에 직면하게 됩니다.
다음 28화에서는 몽골 제국의 등장과 중동 침공을 다룰 예정입니다. 칭기즈 칸과 그의 후계자들이 몰고 온 전례 없는 파괴의 폭풍은,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프 왕조를 포함하여 이슬람 세계의 기존 질서를 완전히 뒤흔들어놓았습니다. 동쪽에서 밀려온 기마 군단이 어떻게 중동의 역사를 다시 한번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는지, 그 경천동지의 이야기를 만나보겠습니다.
이미지는 Leonardo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이미지는 Claude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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