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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역사] 42/52화: 사이크스-피코 협정과 밸푸어 선언: 중동 분쟁의 설계도

사이크스-피코 협정 중동 분할 지도 일러스트

전쟁의 한복판에서 그어진 선

지난 41화에서 우리는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화염 속에서 600년 오스만 제국이 어떻게 무너져 내렸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갈리폴리에서 흘린 피, 아랍 반란의 함성, 그리고 무드로스 정전협정까지—제국의 해체는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해체의 과정에서,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중동의 미래를 결정짓는 비밀 문서들이 작성되고 있었습니다.

1916년의 사이크스-피코 협정과 1917년의 밸푸어 선언. 이 두 문서는 오늘날 중동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분쟁의 ‘설계도’라고 불립니다. 팔레스타인 문제, 이라크의 종파 갈등, 시리아 내전, 쿠르드족의 비극, 레바논의 복잡한 정치 구조—이 모든 것의 뿌리를 추적하면 결국 이 두 문서에 도달합니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이 어떻게 결정되었고, 왜 그런 결정이 내려졌으며, 그것이 어떤 연쇄 반응을 일으켰는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번 42화에서는 비밀 외교의 어둠 속에서 태어난 이 두 문서의 탄생 배경, 내용,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모순의 구조를 팩트에 기반하여 깊이 있게 들여다보겠습니다.

사이크스-피코 협정 영토 분할 다이어그램

사이크스-피코 협정의 배경: 전쟁과 제국주의의 교차점

오스만 영토를 둘러싼 욕망의 역사

유럽 열강이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탐낸 것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40화에서 다루었던 ‘동방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죠. 19세기 내내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유럽의 병자’로 불리던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를 놓고 끊임없이 암투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오스만이 1914년 11월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편에 서서 참전하면서, 이 암투는 공개적인 분할 계획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영국에게는 몇 가지 전략적 급선무가 있었습니다. 첫째, 수에즈 운하의 보호. 이집트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던 영국에게 수에즈 운하는 인도로 가는 생명선이었습니다. 오스만군이 시나이 반도를 넘어 운하를 위협하는 상황은 악몽이었습니다. 둘째, 메소포타미아(오늘날의 이라크)의 석유. 1908년 이란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된 이후, 영국 해군이 석탄에서 석유로 연료를 전환하면서 페르시아만 일대의 석유 자원은 국가 안보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셋째, 러시아와의 동맹 유지. 동부전선에서 독일과 싸우고 있는 러시아를 전쟁에 묶어두는 것이 영국의 전략적 이익이었고, 이를 위해 러시아의 오랜 숙원—콘스탄티노플과 해협 지대 확보—을 인정해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이해관계는 또 달랐습니다. 프랑스는 수세기에 걸쳐 레반트 지역, 특히 시리아와 레바논에 문화적·경제적·종교적 영향력을 구축해왔습니다. 십자군 시대부터 이어진 레바논 마론파 기독교인과의 유대, 19세기 프랑스 예수회의 교육 활동, 다마스쿠스와 베이루트에 대한 경제적 투자—이 모든 것이 프랑스로 하여금 시리아를 자국의 ‘자연스러운 영향권’으로 간주하게 만들었습니다.

후세인-맥마흔 서신: 첫 번째 약속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이해하려면, 그보다 앞서 이루어진 또 다른 약속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1915년 7월부터 1916년 3월까지,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 빈 알리와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 헨리 맥마흔 사이에 총 열 통의 서신이 오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후세인-맥마흔 서신(Hussein-McMahon Correspondence)’입니다.

배경은 이러했습니다. 후세인은 오스만 제국 내에서 메카와 메디나의 수호자라는 특별한 지위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오스만 정부의 중앙집권화 정책—특히 청년 튀르크당의 범투르크주의—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아랍의 독립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이 불만을 이용하여 오스만 제국의 배후에서 아랍 반란을 일으키게 하려 했습니다.

서신의 핵심 내용은 이것이었습니다. 후세인은 아랍인들이 오스만에 대항해 봉기하는 대가로, 전쟁 후 아랍 독립 국가의 수립을 요구했습니다. 그가 제시한 영토 범위는 광대했습니다—북쪽으로는 메르신과 아다나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는 이란 국경, 남쪽으로는 인도양, 서쪽으로는 홍해와 지중해에 이르는 거대한 아랍 왕국이었습니다.

맥마흔의 답신은 의도적으로 모호했습니다. 그는 “순수하게 아랍적인” 지역에서의 아랍 독립을 지지한다고 하면서도, 몇 가지 지역을 제외했습니다.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알레포 서쪽에 위치한 시리아의 일부 지역은 순수하게 아랍적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제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영국의 동맹국 프랑스의 이익이 관련된 지역”에 대해서도 유보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 모호한 표현이 훗날 엄청난 논쟁의 씨앗이 됩니다. 특히 팔레스타인이 제외 지역에 포함되는지 여부는 영국과 아랍 측이 완전히 다른 해석을 내놓게 되는 핵심 쟁점이 되었습니다. 맥마흔의 문구에서 “다마스쿠스 서쪽”이라는 표현이 레바논 해안만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팔레스타인까지 포함하는지는 지금까지도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입니다. 다만 1939년 영국 정부가 소집한 조사위원회는 “팔레스타인이 아랍에 약속된 지역에서 제외되었다고 볼 근거가 불충분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어쨌든 후세인은 이 서신을 아랍 독립에 대한 영국의 확고한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이를 토대로 1916년 6월 아랍 대반란(Arab Revolt)을 선언했습니다. T. E. 로렌스—’아라비아의 로렌스’—가 활약한 바로 그 반란입니다.

콘스탄티노플 협정: 러시아와의 거래

영국이 후세인과 서신을 교환하던 바로 그 시기, 또 다른 비밀 합의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915년 3월,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에게 전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과 보스포루스·다르다넬스 해협을 넘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것이 ‘콘스탄티노플 협정’입니다. 수세기 동안 러시아가 갈망해온 ‘따뜻한 바다로의 출구’를 마침내 보장하겠다는 것이었죠.

이 약속은 훗날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가 전쟁에서 이탈하면서 무효화되지만, 그 존재 자체가 중요합니다. 영국은 같은 시기에 최소 세 가지 서로 다른—그리고 서로 모순되는—약속을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이크스-피코 협정: 비밀 분할의 탄생

두 외교관의 만남

1915년 말, 영국 정부는 프랑스와의 이해관계를 조율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동맹 내부의 영토 분쟁이 전쟁 수행 자체를 방해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영국 측에서는 마크 사이크스 경(Sir Mark Sykes), 프랑스 측에서는 프랑수아 조르주-피코(François Georges-Picot)가 협상 대표로 나섰습니다.

마크 사이크스는 요크셔 출신의 보수당 하원의원이자 오스만 제국 여행가로, 중동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오스만 제국을 여행하며 아랍어와 터키어를 익혔고, 중동 문제에 대한 영국 정부의 핵심 자문역을 맡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의 지식은 깊이보다는 넓이에 치중한 면이 있었고, 무엇보다 그는 아랍인들의 민족적 열망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프랑수아 조르주-피코는 베이루트 주재 프랑스 총영사 출신으로, 시리아에 대한 프랑스의 역사적 권리를 열렬히 신봉하는 외교관이었습니다. 그의 가문은 프랑스 식민지 확장의 역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고, 그 자신도 프랑스의 레반트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협상에서 피코는 매우 공격적이었습니다. 영국 측 기록을 보면, 사이크스가 “피코는 시리아에 대해 한 치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태도”라고 본국에 보고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협정의 내용: 지도 위의 선

1916년 1월, 두 사람은 합의에 도달했고, 이것이 5월 영국·프랑스 양국 정부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러시아도 같은 해 가을에 합류했습니다. 공식 명칭은 ‘아시아-터키 협정(Asia Minor Agreement)’이었지만, 두 협상가의 이름을 따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협정의 핵심은 오스만 제국의 아랍 속주를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권으로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프랑스 직접 통치 지역(청색 지역, Zone A directe): 레바논과 시리아의 지중해 연안 지역, 즉 오늘날의 레바논 전역과 시리아의 해안 지대(라타키아, 타르투스 등), 그리고 터키 남부의 킬리키아(아다나, 메르신 일대)가 프랑스의 직접 통치 아래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영국 직접 통치 지역(적색 지역, Zone B directe): 메소포타미아 남부, 즉 오늘날 이라크의 바그다드와 바스라 주, 그리고 쿠웨이트가 영국의 직접 통치 아래 놓였습니다. 이 지역은 영국이 이미 전쟁 초기부터 군사작전을 벌이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프랑스 영향권(A 지역): 시리아 내륙(다마스쿠스, 알레포, 모술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은 프랑스의 영향 아래 놓이되, 명목상 “독립적인 아랍 국가 또는 아랍 국가 연합”이 세워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다만 이 ‘독립’이라는 단어의 실질적 의미는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프랑스가 고문을 파견하고 경제적 특혜를 누리며 사실상 보호국처럼 운영할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영국 영향권(B 지역): 메소포타미아 북부(모술 인근)와 트랜스요르단(오늘날의 요르단)이 영국의 영향 아래 놓였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명목상 아랍의 자치를 인정하되 실질적으로는 영국이 통제하는 구조였습니다.

팔레스타인의 국제 관리: 가장 논쟁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대부분은 “국제 공동 관리(international administration)” 아래 두기로 했습니다. 이는 두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첫째, 예루살렘은 기독교·이슬람·유대교 세 종교의 성지로서 어느 한 국가가 독점할 수 없다는 논리. 둘째, 영국과 프랑스 어느 쪽도 상대방이 이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이파 항구만은 영국이 확보하기로 했는데, 이는 향후 메소포타미아 석유를 지중해로 운송하기 위한 파이프라인 종착지로 계획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분할의 물리적 형태는 매우 단순했습니다. 사이크스는 실제로 지도 위에 아크레(오늘날 이스라엘 아코) 부근 지중해 연안의 ‘e’ 지점에서 이라크 북부 키르쿠크 인근의 ‘k’ 지점까지 대각선 하나를 그었고, 이 선의 북쪽은 프랑스, 남쪽은 영국의 영향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가들이 말하는 “사이크스의 선(Sykes Line)”입니다.

지역 현실의 완전한 무시

이 협정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현지의 민족적·종교적·부족적 현실을 거의 완전히 무시했다는 점입니다. 두 외교관이 그은 선은 사막 위에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직선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선들은 수천 년간 형성된 부족 영역, 교역 경로, 수자원 유역, 종파 분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쿠르드족의 분할: 약 2,500만에서 3,500만 명에 이르는 쿠르드족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 없는 민족 집단 중 하나입니다. 그들의 거주 지역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의해 영국 영향권(이라크 북부)과 프랑스 영향권(시리아 북동부)으로 갈라졌고, 이후 터키, 이란까지 포함하면 네 개 국가에 걸쳐 분산되었습니다.

이라크의 종파 봉합: 영국 영향권으로 들어간 메소포타미아에는 시아파 아랍인(남부), 수니파 아랍인(중부), 쿠르드족(북부), 그리고 아시리아 기독교인, 투르크멘, 야지디 등 다양한 집단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하나의 정치 단위로 묶는 것은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실험이었고, 그 결과는 우리가 알다시피 20세기 내내 불안정과 갈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시리아와 레바논의 인위적 분리: 역사적으로 ‘대시리아(Greater Syria)’ 또는 ‘빌라드 알샴(Bilad al-Sham)’으로 불리던 지역은 오늘날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을 모두 포함하는 문화적 단위였습니다. 이 지역이 프랑스와 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여러 개의 국가로 쪼개졌습니다.

사이크스와 피코의 비밀 협상 장면

비밀의 누설과 충격

볼셰비키의 폭로

사이크스-피코 협정은 철저한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후세인에게도, 아랍 반란의 지도자들에게도, 심지어 영국·프랑스 의회에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 비밀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1917년 11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직후였습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끄는 볼셰비키 정부는 차르 정부의 비밀 외교 문서들을 공개했습니다. 이는 제국주의 전쟁의 실체를 폭로하려는 이념적 목적도 있었지만, 동시에 러시아가 전쟁에서 이탈하기 위한 명분 만들기이기도 했습니다. 사이크스-피코 협정의 전문이 러시아 신문 이즈베스티야에 실렸고, 곧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충격은 엄청났습니다. 오스만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던 아랍 반란군에게, 자신들이 약속받은 독립이 실은 처음부터 허구였다는 사실은 배신 그 자체였습니다. 샤리프 후세인은 격분했습니다. 그는 영국에 해명을 요구했고, 영국은 “이것은 초기 논의일 뿐 확정된 것이 아니다”라고 얼버무렸습니다. 맥마흔은 후세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협정의 내용은 당신에게 한 약속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다”고 안심시키려 했지만, 이는 명백한 거짓이었습니다.

T. E. 로렌스는 이 모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랍 반란군과 함께 싸우면서 영국 정부가 아랍인들에게 한 약속과 프랑스와 맺은 비밀 협정 사이의 괴리를 몸소 겪었습니다. 전쟁 후 그가 쓴 『지혜의 일곱 기둥(Seven Pillars of Wisdom)』에는 이 배신감이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로렌스는 자신이 “아랍인들에게 사기를 쳤다”는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오스만의 역이용

흥미롭게도, 오스만 제국은 이 문서의 공개를 역으로 이용하려 했습니다. 제말 파샤(시리아 총독)는 협정의 사본을 후세인의 측근 파이살에게 보내면서, “보시오, 영국과 프랑스는 당신들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오. 우리와 다시 손잡읍시다”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파이살은 이미 오스만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차라리 영국이라는 불확실한 동맹자와 함께 가는 것을 택했습니다. 나중에 보면 이 선택 역시 비극적 결과로 이어지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밸푸어 선언: 두 번째, 더 치명적인 약속

시오니즘 운동의 성장

사이크스-피코 협정이 중동의 영토를 분할한 지도라면, 밸푸어 선언은 그 지도 위에 완전히 새로운 변수를 삽입한 폭탄이었습니다. 이 선언을 이해하려면 먼저 시오니즘 운동의 흐름을 짚어야 합니다.

유럽에서 유대인들이 겪은 수세기 간의 박해—특히 19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의 대규모 포그롬(유대인 학살)—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자체 국가 건설의 열망을 키웠습니다. 1896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저널리스트 테오도르 헤르츨이 『유대인 국가(Der Judenstaat)』를 출간했고, 이듬해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스트 회의가 열렸습니다. 회의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을 위한 공법으로 보장된 고향(home)을 건설한다”는 바젤 강령을 채택했습니다.

초기 시오니즘 운동은 팔레스타인만을 고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르헨티나, 우간다, 키프로스 등도 후보지로 논의되었습니다. 영국 정부가 1903년에 제안한 ‘우간다 계획’은 시오니스트 내부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결국 팔레스타인 이외의 지역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유대교의 역사적·종교적 성지인 예루살렘과 에레츠 이스라엘(이스라엘의 땅)에 대한 종교적·문화적 연결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초 팔레스타인에는 이미 소규모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했지만, 인구의 대다수는 아랍 무슬림과 기독교인이었습니다. 1914년 기준으로 팔레스타인의 총 인구 약 70만 명 중 유대인은 약 8만 5천 명(12% 내외)이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종교적 이유로 성지에 거주하는 전통적 유대인 공동체(‘올드 이슈브’)였습니다. 시오니스트 이주자(‘뉴 이슈브’)는 1882년 이후 점차 늘어나고 있었지만 아직 소수였습니다.

하임 바이츠만과 영국 정치의 교차

밸푸어 선언이 나오게 된 과정에는 여러 인물과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러시아 출신의 화학자 하임 바이츠만(Chaim Weizmann)입니다.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던 바이츠만은 전쟁 중 영국 해군이 필요로 하는 아세톤(무연 화약의 원료)을 대량 생산하는 발효법을 개발했습니다. 이 공로로 그는 영국 정치 엘리트, 특히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 군수장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그리고 전직 총리이자 현직 외무장관인 아서 밸푸어와 직접 교류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습니다.

바이츠만은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시오니즘의 목표를 영국의 전략적 이익과 연결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의 논리는 대략 이랬습니다. 팔레스타인에 친영국적인 유대인 국가가 세워지면, 그것은 수에즈 운하의 동쪽을 지키는 완충지대가 될 수 있다. 또한 전 세계 유대인 공동체—특히 미국과 러시아의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어 전쟁 수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마지막 논점은 당시의 역사적 맥락에서 특히 중요했습니다. 1917년은 전쟁의 향방이 불확실한 시기였습니다. 미국은 그해 4월에야 참전을 선언했고, 러시아는 2월 혁명 이후 전쟁 지속 여부가 불투명했습니다. 영국 정부는—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과대평가였지만—유대인 공동체가 미국의 적극적 참전과 러시아의 전쟁 지속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동시에 독일도 시오니스트들과 접촉하고 있었다는 정보가 영국에 들어왔습니다. 오스만의 동맹국인 독일이 먼저 유대인 고향 건설을 약속하면, 시오니스트 운동이 독일 편으로 기울 수 있었습니다. 이 ‘경쟁’ 요소도 영국의 결정을 재촉했습니다.

선언문의 탄생과 그 내용

밸푸어 선언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1917년 초부터 여러 차례의 초안이 작성되고, 수정되고, 논쟁을 거쳤습니다. 초기 초안은 훨씬 더 강력한 표현을 담고 있었습니다. 시오니스트 측이 처음 제안한 문구는 “팔레스타인을 유대 민족의 고향으로 재건(reconstitute)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 정부 내부에서도 반대 의견이 있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당시 유일한 유대인 각료였던 인도성 장관 에드윈 몬태규(Edwin Montagu)의 반대입니다. 몬태규는 동화주의 유대인으로서, 시오니즘이 유대인을 ‘이중 충성’의 혐의에 빠뜨릴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그는 각의에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겠다고 선언하면, 이것은 유대인의 해방이 아니라 유대인에 대한 차별의 새로운 근거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런 내부 논의를 거쳐, 최종 문안은 상당히 약화되었습니다. 1917년 11월 2일, 아서 밸푸어 외무장관이 시오니스트 연맹 회장 라이오넬 월터 로스차일드 남작에게 보낸 편지 형태로 발표된 선언문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폐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을 위한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의 설립을 호의적으로 바라보며(view with favour), 이 목적의 달성을 촉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단, 팔레스타인에 현존하는 비유대계 공동체의 시민적·종교적 권리를 침해하는 어떤 행위도 이루어져서는 안 되며, 다른 어떤 나라에서든 유대인이 향유하는 권리와 정치적 지위를 침해하는 어떤 행위도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 명확히 이해되어야 합니다.”

67단어에 불과한 이 짧은 문장이, 이후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중동에서 가장 격렬한 분쟁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선언문의 내재적 모순

밸푸어 선언은 태생적으로 모순을 안고 있었습니다. 이 모순은 우연이 아니라,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이해관계를 하나의 문서에 담으려 한 결과였습니다.

첫째,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이라는 표현의 의도적 모호성. 이것이 독립된 유대인 국가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기존 국가 안에서의 자치적 공동체를 의미하는가? 시오니스트들은 전자로 해석했고, 영국 관료들 중 일부는 후자로 이해했습니다. 이 모호성은 의도적이었습니다. 밸푸어 자신은 1919년 “우리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대 다수파를 점진적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라고 밝혔지만, 공식 문서에서는 그렇게까지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비유대계 공동체’라는 표현. 당시 팔레스타인 인구의 약 88%를 차지하던 아랍인들이 ‘비유대계 공동체’라는 부정적 정의(negative definition)로 지칭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시사적입니다. 다수를 구성하는 주민들이 마치 소수 예외 집단처럼 취급된 것입니다. 또한 이 조항은 ‘시민적·종교적(civil and religious)’ 권리만을 언급했지, ‘정치적(political)’ 권리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 누락이 의도적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역사학자들의 해석이 갈립니다.

셋째, 한 민족에게 다른 민족이 살고 있는 땅을 약속했다는 근본적 부당성. 아서 쾨스틀러는 이를 두고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한 민족(영국)이 두 번째 민족(유대인)에게 세 번째 민족(아랍인)의 땅을 약속했다.” 밸푸어 자신도 이 모순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1919년 그가 작성한 각서에는 놀라운 솔직함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시오니즘이 옳건 그르건, 그 전통과 현재의 필요와 미래의 희망이 현재 그 땅에 살고 있는 70만 아랍인의 바람과 편견보다 더 깊은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다시 말해, 70만 아랍인의 의사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1917년 밸푸어 선언 편지 일러스트

세 가지 약속의 모순 구조

후세인-맥마흔 서신 vs. 사이크스-피코 vs. 밸푸어

이제 영국이 거의 동시에 만들어낸 세 가지 약속을 나란히 놓고 보면, 그 모순의 구조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후세인-맥마흔 서신(1915-16)은 아랍인에게 독립 국가를 약속했습니다. 적어도 후세인은 그렇게 이해했고, 이를 근거로 아랍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사이크스-피코 협정(1916)은 같은 영토를 영국과 프랑스가 나누어 지배하겠다는 비밀 합의였습니다. 아랍의 ‘독립’은 명목에 불과하고 실질적으로는 식민 지배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밸푸어 선언(1917)은 이 영토의 일부(팔레스타인)에 또 다른 민족(유대인)의 고향을 세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세 약속은 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었습니다. 같은 땅을 아랍인에게도 약속하고, 영국·프랑스가 나누어 먹기도 하고, 유대인에게도 약속한 것이니까요. 영국이 이렇게 서로 모순되는 약속들을 남발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최우선이었고, 그 과정에서 아랍의 반란이 필요했고, 프랑스와의 동맹 유지가 필요했고, 유대인 공동체의 지지가 필요했습니다. 전후에 이 모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는 “나중에 생각하자”는 식이었습니다.

데이비드 프롬킨이 그의 명저 『모든 평화를 끝낸 평화(A Peace to End All Peace)』에서 지적했듯이, “영국의 중동 정책은 전쟁의 긴급함 속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상호 모순되는 여러 약속들은 전후 정리되기는커녕 더 얽히게 되었다.”

모순이 제도화된 과정: 위임통치

전쟁이 끝난 후, 이 모순들은 해소되기는커녕 국제법적 외피를 입고 제도화되었습니다. 1919년 파리 강화회의와 1920년 산레모 회의를 거쳐, 국제연맹의 ‘위임통치(Mandate)’ 체제가 만들어졌습니다.

위임통치는 식민지와는 다르다고 주장되었습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이전 오스만 영토의 주민들은 “아직 스스로 통치할 준비가 되지 않았으므로” 선진국이 일시적으로 대신 통치하며 독립을 준비시킨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것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의 분할을 국제법적으로 정당화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에 대한 위임통치권을 받았습니다. 영국은 이라크, 트랜스요르단, 팔레스타인에 대한 위임통치권을 받았습니다. 특히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헌장에는 밸푸어 선언의 문구가 그대로 삽입되었고, 영국에게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 설립을 위한 적절한 정치적·행정적·경제적 조건을 확보할” 의무가 부여되었습니다.

이로써 밸푸어 선언은 한 나라 외무장관의 사적 서한에서 국제법적 구속력을 가진 문서로 격상되었습니다.

아랍의 분노와 저항

파이살의 시리아 왕국과 좌절

후세인의 아들 파이살은 전쟁 중 아랍 반란군을 이끌고 다마스쿠스에 입성한 영웅이었습니다. 1918년 10월, 오스만군이 철수한 다마스쿠스에서 파이살은 아랍 정부를 수립하려 했습니다. 1920년 3월, 시리아 국민의회(Syrian National Congress)는 파이살을 대시리아 왕국(팔레스타인과 레바논 포함)의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산레모 회의에서 시리아에 대한 프랑스의 위임통치가 확정되었고, 프랑스는 파이살에게 퇴위를 요구했습니다. 파이살이 이를 거부하자, 1920년 7월 프랑스군 앙리 구로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다마스쿠스로 진격했습니다. 마이살룬 전투에서 시리아 군은 무참히 패배했고, 파이살은 추방되었습니다.

전쟁 중 영국이 약속한 아랍 독립은 이렇게 불과 4개월 만에 프랑스의 포탄에 의해 산산조각 났습니다. 이 사건은 아랍 민족주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배신의 상징으로 기억됩니다.

쫓겨난 파이살에게 영국은 일종의 보상으로 이라크의 왕좌를 제안했습니다. 이라크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외지인을 왕으로 앉힌 것입니다. 1921년 카이로 회의에서 윈스턴 처칠(당시 식민성 장관)이 주도한 이 결정은 중동의 인위적 국경선에 인위적 왕가를 얹는 이중의 인위성이었습니다. 파이살의 형 압둘라에게는 트랜스요르단이 배정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충돌의 시작

밸푸어 선언 이후,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본격화되었습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여러 차례의 ‘알리야(aliyah, 이주의 물결)’가 이어졌고, 특히 1930년대 나치 독일의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면서 이주민 수가 급증했습니다.

유대인 인구가 늘어나고 토지 구매가 확대되면서, 아랍 주민들의 불안과 분노도 커져갔습니다. 1920년 네비 무사 사건, 1921년 야파 폭동, 그리고 1929년 헤브론 학살 등 유혈 충돌이 반복되었습니다. 영국 위임통치 당국은 두 공동체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했지만, 본질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두 가지 약속—유대인 고향 건설과 아랍인 권리 보호—사이에서 어느 쪽도 만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이어진 ‘아랍 대반란(Arab Revolt in Palestine)’은 영국 위임통치와 시오니즘 모두에 대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대규모 저항이었습니다. 총파업으로 시작된 이 반란은 곧 무장 투쟁으로 발전했고, 영국은 약 2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이를 진압했습니다. 진압 과정에서 아랍 측 사상자는 5,000명 이상에 달했고, 아랍 지도부는 와해되었습니다. 이 지도부의 와해는 1947-48년 팔레스타인 분할과 제1차 중동전쟁에서 아랍 팔레스타인인들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핵심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사이크스-피코 협정이 만든 국경들의 유산

이라크: 세 개의 빌라예트가 된 하나의 나라

사이크스-피코 협정의 가장 논쟁적인 유산 중 하나가 이라크입니다. 오스만 시대에 이 지역은 세 개의 별도 빌라예트(주)—모술, 바그다드, 바스라—로 나뉘어 관리되었습니다. 각각은 뚜렷한 인구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술은 쿠르드족과 투르크멘이 다수인 산악 지대, 바그다드는 수니파 아랍인이 지배적인 중부 평원, 바스라는 시아파 아랍인이 압도적 다수인 남부 습지대였습니다.

이 세 빌라예트를 하나의 국가로 합친 것은 순전히 영국의 전략적 계산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영국은 바스라의 석유와 해상 접근성, 바그다드의 행정 기반, 모술의 석유 매장량을 하나의 경제 단위로 통합하기를 원했습니다. 특히 모술 유전은 원래 사이크스-피코 협정에서 프랑스 영향권에 속했지만, 영국이 전후 협상에서 이를 가져왔습니다. 1918년 11월 정전 직전 영국군이 모술을 점령한 것은 이 유전을 확보하기 위한 의도적 행동이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라크라는 국가는 공통의 역사적 정체성이나 민족적 일체감 없이 외부에서 설계된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후 이라크 역사에서 반복된 쿠데타, 종파 갈등, 쿠르드족 탄압, 그리고 2003년 이후의 혼란까지—모든 것의 뿌리에는 이 인위적 국가 형성이 있습니다.

시리아와 레바논: 분할 통치의 극단

프랑스의 시리아·레바논 위임통치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의 또 다른 유산입니다. 프랑스는 사이크스-피코에서 획득한 영역을 자신의 식민 이익에 맞게 다시 잘게 쪼갰습니다.

‘대레바논(Grand Liban)’의 창설이 대표적입니다. 프랑스는 자국과 역사적 유대가 깊은 마론파 기독교인을 위한 별도의 정치 단위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무타사리프 레바논(Mount Lebanon)’만으로는 경제적으로 자립이 어려웠기 때문에, 베이루트, 트리폴리, 시돈, 베카 계곡 등 무슬림이 다수인 주변 지역을 합쳐 ‘대레바논’을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기독교인의 인구적 우위가 희석되었고, 이것이 훗날 레바논의 종파 정치와 1975-90년 내전의 구조적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시리아 본토에서도 프랑스는 분할 통치(divide and rule)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알라위파 국가, 드루즈 국가, 알레포 국가, 다마스쿠스 국가 등으로 분할하여 아랍 민족주의의 결집을 방지하려 했습니다. 이 분할은 결국 통합되어 시리아 공화국이 되었지만, 종파·지역 간 긴장의 씨앗은 남았습니다. 특히 소수 알라위파가 군사 엘리트를 장악하고 종국에는 하피즈 알아사드가 권력을 잡게 되는 과정에, 프랑스 위임통치 시기 알라위파를 군에 편중 충원한 정책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요르단: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나라

트랜스요르단(오늘날의 요르단)의 탄생은 사이크스-피코 체제의 즉흥성을 잘 보여줍니다. 원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영역에 포함되어 있던 요르단강 동안 지역은, 1921년 처칠이 주재한 카이로 회의에서 갑자기 별도의 정치 단위로 분리되었습니다. 시리아에서 쫓겨난 파이살의 형 압둘라가 프랑스에 대한 복수를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자, 영국이 이를 무마하기 위해 트랜스요르단의 에미르(군주) 자리를 제안한 것입니다.

당시 처칠은 “일요일 오후에 제도판을 꺼내고 트랜스요르단이라는 나라를 만들어냈다”고 농담처럼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것이 단순한 일화가 아니라, 이 지역 국가 형성의 즉흥적 성격을 정확히 반영하는 말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쿠르드족: 지워진 약속

사이크스-피코 체제의 가장 비극적인 피해자 중 하나가 쿠르드족입니다. 1920년 세브르 조약에서는 쿠르드족 자치 지역의 설립이 명시되었고, 주민투표를 통한 독립 가능성까지 열어두었습니다. 그러나 1923년 로잔 조약에서 이 조항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무스타파 케말(아타튀르크)이 이끄는 새 터키 공화국의 군사적 성공이 열강의 계산을 바꿨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쿠르드족은 터키, 이라크, 시리아, 이란 네 나라에 걸쳐 분산되었고, 어느 나라에서도 완전한 자치권을 갖지 못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 없는 민족”이라는 수식어는 사이크스-피코 체제의 직접적 유산입니다.

밸푸어 선언의 장기적 파장

위임통치에서 분할까지

밸푸어 선언이 작성된 1917년부터 이스라엘이 건국된 1948년까지의 30년은, 이 선언이 품고 있던 모순이 점차 현실화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영국 위임통치 당국은 양쪽 모두를 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유대인 이주를 제한하면 시오니스트들이 반발했고, 이주를 허용하면 아랍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1939년 ‘맥도널드 백서’로 유대인 이주를 대폭 제한했을 때, 이는 나치 홀로코스트를 피해 달아나는 유대인들에게 피난처의 문을 닫아건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결정은 도덕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영국의 위임통치를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알려지면서 유대인 국가 건설에 대한 국제 여론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600만 유대인의 학살이라는 인류사 최악의 비극 앞에서, 유대인들이 자신만의 안전한 국가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은 강력한 도덕적 근거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당한 필요가 충족되는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에 이미 살고 있던 사람들의 운명은 또다시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1947년 UN 팔레스타인 분할안(총회 결의 181호)과 1948년 이스라엘 건국, 그리고 뒤이은 제1차 중동전쟁과 약 70만 팔레스타인 난민의 발생(아랍 측이 ‘나크바’, 즉 ‘대재앙’이라 부르는 사건)—이 모든 것은 밸푸어 선언이 시작한 연쇄 반응의 귀결이었습니다.

지금도 살아있는 밸푸어의 그림자

밸푸어 선언은 단순한 역사적 문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중동 정치에서 현재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밸푸어 선언은 그들의 고향을 빼앗긴 시발점입니다. 매년 11월 2일은 팔레스타인에서 ‘밸푸어의 날’로 기억되며, 항의 시위가 벌어집니다. 2017년 밸푸어 선언 100주년에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영국에 공식 사과를 요구했고, 일부에서는 국제사법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하자는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에게 밸푸어 선언은 유대 국가의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문서입니다. 2017년 100주년에는 이스라엘과 영국이 공동 기념행사를 가졌고, 당시 영국 총리 테레사 메이는 “우리는 밸푸어 선언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발언하여 팔레스타인 측의 반발을 샀습니다.

이 하나의 문서를 둘러싼 이 극단적으로 다른 두 개의 기억은,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이 왜 그토록 해결하기 어려운지를 보여줍니다. 같은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렇게 다른데, 어떻게 합의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세 가지 모순된 약속 비교 인포그래픽

사이크스-피코 체제에 대한 재평가

‘인위적 국경’이라는 신화와 현실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대한 가장 흔한 비판은 “유럽인들이 자로 그은 인위적 국경선이 중동 문제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이 주장에는 상당한 진실이 담겨 있지만, 동시에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도 있습니다.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은, 사이크스-피코 협정 이전에도 중동에 명확한 ‘자연스러운’ 국경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 이 지역은 빌라예트와 산자크 같은 행정 단위로 나뉘어 있었지만, 이것이 곧 민족 국가의 경계를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랍 민족주의 자체가 19세기 후반에야 형성되기 시작한 비교적 새로운 현상이었고, 아랍인들 사이에서도 단일 아랍 국가를 원하는 범아랍주의와 지역 단위의 독립을 원하는 흐름이 공존했습니다.

그러나 사이크스-피코 체제가 만든 국경선이 현지인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오로지 두 유럽 강대국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그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쿠르드족의 분할, 이라크의 인위적 통합, 시리아와 레바논의 강제 분리 등은 현지 주민들이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경계였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국경선 자체보다, 그 국경 안에서 어떤 정치 체제가 수립되었느냐에 있을 수 있습니다. 위임통치 체제는 현지에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토대를 구축하기보다는, 소수 엘리트를 통한 간접 통치를 선호했습니다. 영국은 수니파 소수가 시아파 다수를 통치하는 이라크의 구조를 만들었고, 프랑스는 레바논에서 기독교인 우위의 종파 할당제를 제도화했습니다. 이러한 통치 구조가 독립 후에도 계속되면서 종파 정치와 권위주의의 토양이 되었습니다.

ISIS와 사이크스-피코의 부활

2014년 ISIS(이슬람국가)가 이라크와 시리아의 접경 지역을 장악했을 때,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상징적 행위 중 하나는 이라크-시리아 국경의 모래 장벽을 불도저로 밀어버린 것이었습니다. ISIS는 이 영상을 전 세계에 유포하며 “사이크스-피코의 끝(The End of Sykes-Picot)”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ISIS의 선전이 역사를 단순화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이 이 협정의 이름을 사용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100년이 지난 후에도 사이크스-피코 협정이 아랍 세계에서 서구 제국주의의 배신과 부당함의 상징으로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사이크스-피코를 뒤집겠다”는 주장은 극단주의 세력뿐 아니라 일반 아랍인들 사이에서도 공감을 얻었습니다.

물론 사이크스-피코 이전의 어떤 ‘자연스러운’ 질서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100년 동안 형성된 국가 정체성, 제도, 이해관계는 단순히 국경선을 다시 그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협정이 만든 구조적 모순이 여전히 중동의 불안정을 설명하는 핵심 변수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역사의 교훈: 외부에서 설계된 질서의 한계

약속의 정치학

사이크스-피코 협정과 밸푸어 선언이 남긴 가장 보편적인 교훈은, 강대국이 자국의 이해관계만을 위해 다른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때 그 결과가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영국은 전쟁이라는 긴급한 상황 속에서 서로 모순되는 약속들을 남발했습니다. 아랍인에게는 독립을 약속하고, 프랑스와는 영토 분할을 합의하고, 유대인에게는 고향을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들 중 어느 하나도 완전히 이행되지 않았고, 그 모순의 대가는 약속을 한 영국이 아니라 현지 주민들이 치러야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영국의 ‘사악함’이나 ‘무능함’으로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물론 제국주의적 오만과 인종주의적 편견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밸푸어가 “70만 아랍인의 바람과 편견”이라고 말한 것에서 드러나듯이, 현지 주민들을 동등한 주체로 보지 않은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더 구조적으로 보면, 이것은 강대국 외교가 가진 근본적 한계—단기적 이익을 위해 장기적 결과를 무시하는 경향, 현지의 복잡성을 단순한 도식으로 환원하는 경향—의 전형적 사례입니다.

중동에서 이 역사가 기억되는 방식

오늘날 중동에서 사이크스-피코 협정과 밸푸어 선언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 정치적 담론의 핵심 레퍼런스입니다. “사이크스-피코”라는 이름은 외세 간섭, 배신, 부당한 국경, 민족자결의 부정을 상징하는 약칭이 되었습니다. 아랍 세계에서 현재의 정치적 불만을 표현할 때 “이것은 새로운 사이크스-피코다”라는 수사가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동시에, 이 역사에 대한 과도한 단순화에 대해서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동의 모든 문제를 사이크스-피코 탓으로 돌리는 것은 현지 정치 엘리트들의 책임, 냉전 시기 초강대국 경쟁의 영향, 석유 경제의 왜곡 효과 등 다른 중요한 요인들을 간과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역사는 단일 원인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사이크스-피코 체제는 중동 현대사의 중요한 ‘한’ 요인이지, ‘유일한’ 요인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문서가 중동의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형성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뉴스에서 보는 시리아 내전, 이라크의 종파 갈등,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 쿠르드족 문제—이 모든 것을 이해하려면, 1916년과 1917년에 런던과 파리의 밀실에서 만들어진 결정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마치며: 설계도는 어떻게 현실이 되었는가

사이크스-피코 협정과 밸푸어 선언은 ‘분쟁의 설계도’였습니다. 그러나 설계도가 곧바로 건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설계도가 현실의 분쟁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위임통치의 실제, 각국의 독립과 그 후의 혼란, 아랍-이스라엘 전쟁들, 냉전 시기의 개입—이 이후 역사의 핵심 줄기가 됩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 두 문서가 만든 구조적 모순이 이후 100년간 단 한 번도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국경선은 바뀌지 않았고, 쿠르드족은 여전히 국가가 없으며, 팔레스타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이라크와 시리아의 종파 갈등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1916-17년의 결정들이 만든 틀 안에서, 중동은 아직도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음 43화에서는 이 설계도 위에 세워진 건물들—영국과 프랑스의 위임통치가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었고, 각 지역에서 어떤 저항과 적응이 이루어졌으며, 독립 국가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식민 지배의 구체적 모습과 그 안에서 싹튼 민족주의의 다양한 흐름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미지는 Leonardo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이미지는 Claude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 시리즈: 중동의 역사 (총 52화 중 4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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