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의 시대가 끝나고, 성직자의 시대가 열리다
지난 47화에서 우리는 네 차례 중동전쟁이 지역의 지도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아랍 산유국들이 석유 무기화에 나서면서 세계 경제는 격동에 휩싸였고, 이 석유 붐의 최대 수혜국 중 하나가 바로 이란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6년 뒤인 1979년, 그 풍요로운 이란에서 세계사를 바꾼 혁명이 일어납니다.
1979년 이란 혁명은 20세기 후반 가장 극적인 정치 변동 중 하나입니다. 2,500년 이어져 온 왕정 체제가 무너지고, 세계 역사상 최초로 시아파 이슬람 성직자가 통치하는 신정(神政) 공화국이 탄생했습니다. 냉전 시대 미국의 가장 충실한 중동 동맹이 하룻밤 사이에 가장 강력한 적대 세력으로 변했고, 이 사건은 이후 중동 전체의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재편했습니다.
이번 48화에서는 이란 혁명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리고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전례 없는 정치 실험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했는지를 살펴봅니다. 이를 위해서는 혁명 이전 반세기에 걸친 팔라비 왕조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팔라비 왕조의 등장: 근대 이란의 출발점
레자 칸, 군인에서 왕이 되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이란을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는 극심한 쇠퇴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영국과 러시아가 이란을 사실상의 반식민지로 분할 관리했고, 중앙 정부의 권위는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1905~1911년 입헌혁명으로 의회(마즐레스)가 설립되었지만, 외세 간섭과 내부 분열로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습니다.
이 혼란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레자 칸(Reza Khan)이었습니다. 이란 북부 마잔다란 출신의 직업 군인이었던 그는 영국이 훈련시킨 코사크 여단의 장교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1921년 2월, 레자 칸은 쿠데타를 일으켜 테헤란을 장악했고, 이후 4년에 걸쳐 차근차근 권력을 공고히 한 끝에 1925년 12월 마즐레스의 승인을 받아 카자르 왕조를 폐위하고 스스로 샤(Shah, 왕)에 올랐습니다. 이것이 팔라비(Pahlavi) 왕조의 시작이었습니다.
레자 샤는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44화에서 다룬 바 있습니다)를 롤모델로 삼아 급진적인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전국 도로망과 트랜스이란 철도 건설, 테헤란 대학교 설립, 사법 체계의 세속화, 여성의 베일 착용 금지(1936년 ‘캐시프에 헤자브’ 칙령) 등 위로부터의 개혁을 밀어붙였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시아파 성직자(울라마) 계급의 권한은 크게 축소되었고, 반대 세력에 대한 가혹한 탄압이 이어졌습니다.
냉전의 그림자: 모함마드 레자 샤의 즉위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레자 샤가 나치 독일에 우호적 태도를 보이자 영국과 소련이 이란을 공동 점령했습니다. 레자 샤는 강제 퇴위되어 남아프리카로 추방되었고, 그의 아들 모함마드 레자 팔라비(Mohammad Reza Pahlavi)가 2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때부터 이란 혁명까지 38년간 이어지는 이 젊은 왕의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초기의 모함마드 레자 샤는 아버지만큼 강력한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전후 이란 정치는 다양한 세력이 경합하는 비교적 개방적인 시기를 맞았고, 이 시기에 이란 현대사의 결정적 사건 중 하나인 석유 국유화 운동이 일어납니다.

모사데크와 석유 국유화: 1953년 쿠데타의 그림자
1940년대 말, 이란의 석유는 영국 자본의 앵글로-이라니안 석유회사(AIOC, 후일의 BP)가 사실상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이란 정부가 받는 로열티는 미미했고, 이란인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1951년 3월, 국민전선(National Front)의 지도자 모함마드 모사데크(Mohammad Mosaddegh)가 총리로 취임하면서 석유 국유화 법안을 전격 통과시켰습니다.
모사데크는 세속적 민족주의자이자 법률가로,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란의 석유 수익을 이란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약속으로 폭발적인 대중적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고, 이란 석유에 대한 국제적 보이콧을 조직하며 경제적 압박에 나섰습니다.
냉전의 논리가 여기에 개입했습니다. 이란의 경제 위기가 심화되면서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미국의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영국의 요청에 응했습니다. 1953년 8월, CIA(작전명 ‘아약스’)와 영국 MI6가 공동으로 기획한 쿠데타가 실행되었습니다.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지만, 며칠 뒤 두 번째 시도에서 모사데크 정부는 전복되었습니다. 모사데크는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고, 가택 연금 상태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1953년 쿠데타는 이란 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미국과 영국의 개입으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무너졌다는 사실은 이란 국민들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었고, 이후 반미·반서방 감정의 원류가 되었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야 미국 국무부는 이 쿠데타에서의 역할을 공식 인정했습니다.
모함마드 레자 샤의 절대 권력: 백색혁명에서 억압까지
백색혁명(1963): 위로부터의 근대화
1953년 쿠데타 이후 권좌에 복귀한 모함마드 레자 샤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독재 체제를 강화한 그는 1963년 1월, 이란 역사상 가장 야심찬 개혁 프로그램인 ‘백색혁명(Enqelāb-e Sefid)’을 국민투표에 부쳤습니다.
백색혁명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토지 개혁: 대지주의 토지를 정부가 매입하여 소작농에게 분배. 봉건적 토지 구조를 해체하겠다는 목표였습니다.
- 산림 국유화: 국토의 산림과 목초지를 국가 관리 하에 두는 조치.
- 국영 기업 민영화: 일부 국영 기업의 주식을 노동자와 민간에 매각.
- 이익 분배 제도: 산업체 노동자들에게 이윤의 일부를 분배하는 제도 도입.
- 여성 참정권: 여성에게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부여.
- 문맹 퇴치 군단(Literacy Corps): 징병된 고등교육 이수자들을 농촌에 파견하여 문맹 퇴치 교육.
표면적으로 이 개혁들은 진보적이었습니다. 토지 개혁은 봉건 체제 해체를 목표로 했고, 여성 참정권은 이란의 근대화 수준을 끌어올렸으며, 문맹률은 실제로 크게 낮아졌습니다. 그러나 실제 집행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들이 드러났습니다.
토지 개혁은 의도와 달리 농촌 공동체를 파괴했습니다. 분배받은 토지가 너무 작아 자립이 불가능한 농민들은 결국 땅을 팔고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테헤란 남부에는 거대한 빈민가가 형성되었고, 이 도시 빈민층은 훗날 혁명의 핵심 동력이 됩니다. 또한 토지 개혁 과정에서 시아파 종교 재단(와크프)의 토지도 대거 몰수되면서 성직자 계급의 경제적 기반이 흔들렸습니다.
성직자 계급의 반발과 호메이니의 등장
백색혁명에 가장 강렬하게 반대한 인물이 바로 루홀라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였습니다. 당시 60세의 고위 시아파 성직자(아야톨라)였던 호메이니는 곰(Qom)의 종교 학교에서 강의하고 있었습니다.
호메이니의 반대는 단순히 성직자 계급의 이익 수호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백색혁명을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도구로 규정했고, 샤의 세속화 정책이 이슬람의 근본 가치를 훼손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여성 참정권과 종교 재단 토지 몰수, 그리고 미군에 대한 치외법권 부여(이른바 ‘지위협정’)에 격렬히 반대했습니다.
1963년 6월 3일(이슬람력으로 무하람월, 시아파의 가장 신성한 애도의 달), 호메이니는 곰에서 샤를 직접 비판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이 연설에서 그는 샤를 야지드(680년 카르발라에서 후세인을 살해한 우마이야 칼리프 — 17화 참조)에 비유하며, 이란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식민지가 되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이 연설은 시아파의 역사적 기억과 현실의 정치적 불만을 결합한 것으로, 이란 대중에게 강력한 감정적 호소력을 가졌습니다.
호메이니는 즉시 체포되었고, 이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습니다. 1963년 6월 5일(이란력 호르다드 15일, ‘호르다드 15일 봉기’로 불립니다), 정부는 군대를 투입해 시위를 진압했습니다. 공식 사망자는 수십 명이었으나, 반체제 측은 수백에서 수천 명이 희생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 사건은 샤 정권과 시아파 성직자 계급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결렬의 시작이었습니다.
1964년 11월, 미군의 이란 내 치외법권을 보장하는 ‘지위협정(SOFA)’ 법안이 마즐레스를 통과했습니다. 호메이니는 이를 “이란의 주권을 미국에 팔아넘기는 행위”라고 격렬히 비난했고, 샤 정권은 그를 터키로 추방했습니다. 호메이니는 이후 이라크 남부의 나자프로 이동했는데, 이곳은 시아파의 최고 성지 중 하나로 이맘 알리의 묘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14년간 망명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정치사상을 체계화하고, 이란 내부의 반체제 네트워크와 연락을 유지했습니다.

SAVAK: 공포의 비밀경찰
샤의 통치를 뒷받침한 핵심 기구는 SAVAK(사바크, Sāzemān-e Ettelā’āt va Amniyat-e Keshvar, ‘국가정보안보기구’)이었습니다. 1957년 CIA와 이스라엘 모사드의 지원 하에 설립된 SAVAK은 이란 현대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기관이 되었습니다.
SAVAK의 활동 범위는 사실상 제한이 없었습니다. 정치적 반대 세력의 감시, 체포, 심문, 그리고 암살까지 자행했습니다.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는 1970년대 이란을 세계 최악의 인권 침해국 중 하나로 지목했으며, 1976년 보고서에서 SAVAK이 체계적인 고문을 행하고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추산에 따르면 SAVAK은 수만 명의 정보원을 운영했으며, 대학, 직장, 심지어 가정 내부까지 침투한 감시망을 구축했습니다.
SAVAK의 탄압은 좌파 세력(투데당 — 이란 공산당, 무자헤딘에 할크, 페다이얀에 할크)과 종교 세력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수천 명의 정치범이 에빈 감옥에 수감되었고, 많은 이들이 고문으로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무차별적 탄압은 세속 좌파와 종교 세력이라는 전혀 다른 두 반체제 흐름을 공통의 적(샤 정권)에 대항하여 연대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습니다.
석유 붐과 그 모순: 풍요 속의 불만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석유 가격이 네 배로 급등하면서 이란은 막대한 오일머니를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이란은 OPEC의 주도적 회원국으로서 유가 인상의 최대 수혜국이었습니다. 샤는 이 돈으로 이란을 ‘중동의 일본’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비전을 추진했습니다.
대규모 산업화 프로젝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핵발전소 건설 계획(부셰르), 대규모 석유화학 단지, 최신 군사 장비 도입(미국산 F-14 전투기, 영국제 전차 등) — 1970년대 이란의 군사비 지출은 세계 최상위권이었습니다. 테헤란의 스카이라인에는 현대적 고층 빌딩이 들어섰고, 상류층은 서구식 라이프스타일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이 겉보기의 번영 이면에는 심각한 구조적 모순이 누적되고 있었습니다.
- 극심한 빈부격차: 석유 수익의 대부분이 왕실과 소수 엘리트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샤의 팔라비 재단은 이란 최대 기업체로, 국가 경제의 상당 부분을 통제했습니다. 왕실 가족과 측근들의 부정부패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 인플레이션과 주거난: 석유 수익이 급격히 유입되면서 물가가 치솟았고, 특히 테헤란의 부동산 가격은 서민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올랐습니다. 식료품 가격 상승은 도시 빈민층의 생활을 압박했습니다.
- 문화적 소외감: 급격한 서구화는 전통적 가치관을 가진 많은 이란인들에게 정체성의 위기를 야기했습니다. 테헤란 북부의 서구화된 상류층 문화와 남부 빈민가의 전통적 생활 사이의 괴리는 같은 도시 안에서도 극명했습니다.
- 정치적 자유의 부재: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표현의 자유는 전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1975년 샤는 모든 정당을 해산하고 단일 정당 체제(레스타히즈당)를 선포했는데, 이는 오히려 합법적 정치 참여의 마지막 통로마저 막아버렸습니다.
미국 학자 에르반드 아브라하미안(Ervand Abrahamian)이 지적했듯이, 혁명 전 이란의 핵심 모순은 “경제적 근대화와 정치적 독재의 결합”이었습니다. 샤는 사회를 빠르게 변화시키면서도 그 변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사회 세력(교육받은 중산층, 도시 노동자, 대학생)에게 정치적 발언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호메이니의 정치사상: ‘법학자의 통치(벨라야트에 파키)’
나자프에서 다듬어진 혁명 이론
이라크 나자프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호메이니는 단순한 반체제 성직자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슬람 정치사상사에서 혁명적이라 할 만한 새로운 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1970년, 나자프의 종교 학교에서 행한 일련의 강의를 정리한 저서 『이슬람 정부: 법학자의 통치(Hokumat-e Eslami: Velayat-e Faqih)』가 그것입니다.
호메이니의 핵심 주장은 이러했습니다. 시아파 신학에서 열두 번째 이맘(마흐디)은 874년에 ‘은폐(가이바)’에 들어갔으며, 그가 돌아올 때까지 무슬림 공동체는 올바른 지도자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전통적으로 시아파 성직자들은 이 기간 동안 정치 권력과 거리를 두는 ‘정교분리적’ 태도를 취해왔습니다 — 세속 권력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며, 완전한 정의는 마흐디의 귀환에 의해서만 실현된다는 관점이었습니다.
호메이니는 이 전통적 해석에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그는 은폐 기간에도 이슬람 법(샤리아)은 시행되어야 하며, 이를 올바르게 시행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는 이슬람 법학에 정통한 최고위 성직자(파키, 법학자)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이슬람 공동체의 정치적 최고 권위는 왕이나 대통령이 아니라 법학자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벨라야트에 파키(Velāyat-e Faqih)’, 즉 ‘법학자의 통치’ 이론입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 이슬람 사회의 최고 지도자는 종교법에 정통한 법학자여야 한다.
- 이 법학자는 은폐된 이맘을 대리하여 정치·사법·군사 전반의 최종 결정권을 갖는다.
- 왕정은 이슬람과 양립할 수 없으며, 이란의 2,500년 왕정 전통 자체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 서구 민주주의도, 마르크스주의도 아닌 이슬람 자체가 완전한 정치·사회 시스템을 제공한다.
이 이론은 시아파 성직자 사회 내부에서도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최고위 성직자(마르자에 타클리드) 중 상당수는 성직자의 직접적 정치 통치에 반대했으며, 이라크의 대아야톨라 아볼가셈 호이(Abu al-Qasim al-Khoei)를 비롯한 주류 학자들은 정교분리적 전통을 고수했습니다. 그러나 호메이니의 이론은 이란 내의 젊은 성직자들과 종교적 학생 운동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카세트테이프 혁명
호메이니의 강의와 연설은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되어 이란 국내에 밀반입되었습니다. 1970년대의 카세트테이프는 오늘날의 소셜 미디어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SAVAK의 검열을 피해 모스크에서 모스크로, 바자르(시장)에서 바자르로, 가정에서 가정으로 전달되었습니다. 호메이니 특유의 단호하고 직설적인 연설 스타일은 녹음을 통해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 ‘카세트테이프 혁명’은 기술이 정치 변혁의 도구가 된 초기 사례로 평가됩니다. 중앙집중적 미디어(텔레비전, 라디오, 신문)가 국가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던 시대에, 소형 녹음 장치라는 분산형 매체가 반체제 메시지의 확산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혁명의 전개: 1977~1979년
1977년: 균열의 시작
1970년대 중반, 국제 석유 시장의 변동으로 이란 경제에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975~1976년 석유 수익이 예상치를 밑돌자 샤 정권은 긴축 정책으로 전환했고, 이는 건설 붐의 급격한 위축과 대량 실업으로 이어졌습니다. 동시에 인플레이션은 여전히 높아 서민 경제가 이중으로 압박받았습니다.
국제적 환경도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1977년 1월 취임한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인권 외교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이는 이란에 미묘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SAVAK의 인권 침해가 국제적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샤는 카터 행정부의 눈치를 살피며 제한적이나마 정치적 공간을 열어주었습니다. 정치범 일부가 석방되고, 국제 인권 단체의 감옥 방문이 허용되었습니다.
이 좁은 틈을 통해 반체제 운동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1977년 가을, 지식인과 변호사 그룹이 공개 서한을 통해 정치적 자유화를 요구했습니다. 시인 밤다드와 작가 알레 아흐마드의 유산을 잇는 문학적·지적 저항이 공개적 형태를 띠기 시작한 것입니다.
1978년 1월: 곰(Qom)의 발화
혁명의 직접적 도화선은 1978년 1월 7일 정부 관영 신문 에텔라아트(Ettelā’āt)에 실린 한 편의 기사였습니다. ‘이란과 적과 흑의 식민주의(Iran and Red and Black Colonialism)’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호메이니를 인도 출신의 영국 첩자로 묘사하며, 그의 과거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 기사의 배후에는 샤의 측근인 궁정부 장관 호베이다(Hoveyda)가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의도는 호메이니의 신망을 떨어뜨리는 것이었으나, 효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곰의 신학생들이 즉각적인 항의 시위에 나섰고, 경찰의 발포로 여러 명이 사망했습니다(정확한 숫자는 논란 — 정부 측은 2명, 반체제 측은 70명 이상을 주장).
여기서 시아파의 독특한 문화적 관행이 혁명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아파 전통에서는 사망 후 40일(아르바인, چهلم)에 추모 행사를 거행합니다. 곰 희생자들의 아르바인인 2월 18일, 타브리즈에서 대규모 추모 시위가 벌어졌고 다시 유혈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 희생자들의 아르바인에는 또 다른 도시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다시 유혈 사태와 추모가 이어지는 ’40일 주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40일 주기는 1978년 내내 반복되면서 시위의 규모와 지리적 범위를 점진적으로 확대했습니다. 곰 → 타브리즈 → 야즈드 → 이스파한 → 시라즈 → 마슈하드… 매 40일마다 새로운 도시에서 더 큰 시위가 일어났고, 매번 정부의 진압은 새로운 희생자를 만들어 다음 40일 주기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이 패턴은 샤 정권이 폭력적 진압도, 유화적 양보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했습니다.
1978년 8월: 시네마 렉스 화재 — 아바단의 비극
1978년 8월 19일, 남부 도시 아바단의 시네마 렉스 극장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400명 이상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극장 문이 바깥에서 잠겨 있었고, 소방대의 대응이 극히 늦었다는 점에서 방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샤 정권은 이슬람 과격파의 소행이라고 발표했지만, 대부분의 이란 국민은 SAVAK이 배후라고 믿었습니다. 진실은 오늘날까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으나(혁명 이후 재판에서 한 남성이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논란이 계속됨), 당시의 정치적 효과는 명확했습니다. 시네마 렉스 참사는 샤 정권에 대한 마지막 남은 대중적 신뢰마저 무너뜨렸습니다.
검은 금요일(1978년 9월 8일): 돌이킬 수 없는 선
1978년 9월 8일은 이란 혁명사에서 ‘검은 금요일(جمعه سیاه)’로 기억됩니다. 전날 밤 샤는 테헤란에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이 소식이 모든 시민에게 전달되지는 못했습니다. 9월 8일 아침, 테헤란 남부 잘레(Jaleh) 광장에 수천 명의 시위대가 모였고, 군대가 발포했습니다.
사망자 수는 극단적으로 엇갈립니다. 정부 측 발표는 87명이었으나, 반체제 측은 수천 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학계에서는 수백 명 선으로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숫자의 정확성과 별개로, 검은 금요일의 정치적 의미는 절대적이었습니다. 샤 정권이 비무장 시민에게 군대를 투입하여 총격을 가했다는 사실은 이란 사회에 충격파를 보냈습니다.
검은 금요일 이후 혁명 운동은 양적·질적으로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습니다. 중산층과 바자르 상인(바자리)들이 대거 합류했고, 석유 산업 노동자들의 파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란 경제의 생명줄인 석유 생산이 마비되기 시작한 것은 샤 정권에 치명적이었습니다.

1978년 10~12월: 총파업과 체제의 마비
1978년 가을, 이란은 사실상의 총파업 상태에 돌입했습니다. 석유 산업 노동자들이 먼저 파업에 들어갔고, 이어서 은행, 언론, 정부 기관, 공장, 학교가 문을 닫았습니다. 바자르 상인들은 가게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바자르의 파업은 경제적 타격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란에서 바자르는 단순한 시장이 아니라 전통적 경제 네트워크이자 사회적 결절점이었으며, 모스크·성직자 계급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석유 생산량이 일일 600만 배럴에서 사실상 제로에 가까운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국가 수입의 90% 이상을 석유에 의존하던 이란 경제가 마비되었고, 샤 정권은 기본적인 국가 운영조차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11월 5일, 테헤란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면서 영국 대사관과 여러 은행, 서구식 상점이 불탔습니다. 샤는 군사 정부를 수립하고 아즈하리(Azhari) 장군을 총리로 임명했지만, 군사 정부도 파업을 막지 못했습니다. 샤는 텔레비전에 출연해 “나는 혁명의 메시지를 들었다”고 말했지만, 이 늦은 양보는 이미 효력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타수아와 아슈라: 백만 인의 행진(1978년 12월)
1978년 12월 10~11일은 이슬람력 무하람월의 타수아(9일)와 아슈라(10일)에 해당했습니다. 아슈라는 680년 카르발라에서 예언자 무함마드의 손자 후세인이 우마이야 군대에 의해 순교한 날로, 시아파에서 가장 신성한 애도의 날입니다(17화 참조).
이 이틀 동안 테헤란에서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추산은 다양하지만, 100만에서 200만 명이 거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당시 테헤란 인구가 약 450만이었음을 고려하면, 도시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거리에 나온 것입니다.
시위대는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 “마르그 바르 샤(샤에게 죽음을)”, “호메이니 라흐바르(호메이니가 지도자다)”를 외쳤습니다. 카르발라의 후세인 서사는 자연스럽게 현재의 투쟁과 겹쳐졌습니다. 샤는 현대의 야지드, 시위에 참여하는 민중은 후세인의 추종자, 그리고 순교한 시위대는 카르발라의 순교자와 동일시되었습니다. 시아파의 종교적 기억이 혁명적 정치 행동의 언어이자 동력으로 전환된 것입니다.
이 거대한 시위는 사실상 샤 정권에 대한 국민투표와 같았습니다. 군부 역시 이 규모의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호메이니, 이라크에서 파리로
1978년 10월, 혁명의 열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은 이란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호메이니를 추방했습니다. 호메이니는 여러 아랍 국가를 타진한 끝에 프랑스 파리 근교 느플르샤토(Neauphle-le-Château)에 거처를 정했습니다.
파리 이동은 역설적으로 호메이니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나자프에서는 이란과의 통신이 제한적이었으나, 파리에서는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국제 전화로 이란 내부와 실시간 소통이 가능해졌습니다. BBC 페르시아어 방송, 각국 특파원들의 인터뷰, 국제 전화 — 호메이니는 파리의 작은 집에서 사실상 혁명의 원격 지휘부를 운영했습니다.
서방 언론에 비치는 호메이니의 이미지도 중요했습니다. 그는 사과나무 아래에서 소박하게 앉아 있는 영적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서방 기자들에게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약속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이란 내의 세속적 자유주의자들과 좌파 세력도 호메이니를 샤를 몰아내기 위한 상징적 구심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 혁명 이후의 이란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서는 각자 다른 기대를 품고 있었지만, ‘반(反)샤’라는 하나의 목표 아래 일시적으로 연합한 것입니다.
1979년 1월 16일: 샤의 출국
1978년 말, 샤는 마지막 카드를 꺼냈습니다. 자유주의 성향의 샤푸르 바흐티아르(Shapour Bakhtiar)를 총리로 임명한 것입니다. 바흐티아르는 모사데크 시절 국민전선에서 활동한 인물로, 정치범 석방, SAVAK 해체, 이스라엘과의 단교, 석유의 남아프리카 수출 중단 등 과감한 조치를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바흐티아르를 지지하는 세력은 거의 없었습니다. 국민전선은 그를 제명했고, 호메이니는 그를 ‘불법 정부’의 수반으로 규정하며 일체의 협력을 거부했습니다. 혁명의 기세는 이미 어떤 타협도 받아들이지 않는 수준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1979년 1월 16일, 모함마드 레자 샤 팔라비는 눈물을 흘리며 이란을 떠났습니다. 공식적으로는 ‘휴양’이었지만, 모든 사람이 그것이 영원한 이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공항에서 이란의 흙 한 줌을 손에 쥐고 비행기에 오르는 샤의 모습은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중계되었습니다.
테헤란 거리에서는 즉각적인 환호가 터져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자동차 경적을 울리고, 과자를 나누어 먹으며, 샤의 동상을 끌어내렸습니다. 파흘라비 왕조의 54년(레자 샤부터) 혹은 38년(모함마드 레자 샤부터)의 통치가 사실상 막을 내린 순간이었습니다.
이슬람 공화국의 탄생: 1979년 2~4월
호메이니의 귀환(2월 1일)
1979년 2월 1일, 호메이니는 14년 4개월간의 망명을 끝내고 이란으로 돌아왔습니다. 에어프랑스 특별기가 테헤란 메라바드 공항에 착륙했을 때, 공항과 시내를 잇는 거리에는 수백만 명의 인파가 운집해 있었습니다. 외신 기자들은 그 인파를 300만에서 600만으로 추산했는데, 이는 테헤란 역사상 가장 큰 군중이었습니다.
비행기에서 기자가 물었습니다. “이란으로 돌아온 소감이 어떻습니까?” 호메이니는 “히치(هیچ) — 아무것도”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유명한 일화는 다양하게 해석되었지만, 호메이니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개인적 감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 즉 이 순간이 개인의 귀환이 아니라 신의 뜻이 실현되는 과정이라는 종교적 관점의 표현이었습니다.
호메이니는 곧바로 테헤란 남부의 베헤슈테 자흐라 묘지(혁명 희생자들이 묻힌 곳)를 방문하여 연설했습니다. 이 연설에서 그는 바흐티아르 정부를 “불법”으로 선언하고, “내가 정부를 임명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이 선언은 이란에 두 개의 권력 중심이 병존하는 ‘이중 권력’ 상황의 공식적 시작이었습니다.
이중 권력과 2월 혁명(바흐만 22일)
2월 4일, 호메이니는 메흐디 바자르간(Mehdi Bazargan)을 임시 정부 총리로 임명했습니다. 바자르간은 경건한 무슬림이면서도 프랑스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교육받은 기술관료로, 자유주의적 이슬람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호메이니가 바자르간을 선택한 것은 온건한 이행을 원하는 중산층과 서방에 대한 안심 메시지였습니다.
이제 이란에는 바흐티아르의 샤 임명 정부와 바자르간의 호메이니 임명 정부가 동시에 존재했습니다. 이 상황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2월 9~11일이 결정적이었습니다. 2월 9일 밤, 테헤란 외곽의 파라하바드 공군기지에서 기술하사관들(호마파얀)이 봉기했습니다. 이들은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호메이니의 귀환 영상에 감동받은 젊은 기술병들로, 기지 내에서 호메이니 지지 시위를 벌였습니다. 샤에게 충성하는 근위대(자벤단)가 이들을 진압하려 했으나 시민들이 기지 주변에 몰려들며 충돌이 확대되었습니다.
2월 10일, 군부 최고사령부는 결정적 순간에 직면했습니다. 전면적 군사 개입으로 혁명을 진압할 것인가, 아니면 중립을 선언할 것인가. 미국은 이란 군부에 상반된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국가안보보좌관은 군사적 강경 대응을 지지했고,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은 유혈 사태 방지를 우선시했습니다. 결국 카터 대통령은 명확한 지침을 주지 못했고, 혼란 속에서 이란 군부는 2월 11일 오후 “정치적 분쟁에서 중립을 지킨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선언은 혁명의 군사적 승리를 의미했습니다. 무장한 시민들이 경찰서와 군 시설에서 무기를 탈취했고, SAVAK 본부와 정부 청사가 점령되었습니다. 바흐티아르 총리는 은신처로 도피했고(이후 프랑스로 망명), 에빈 감옥의 문이 열려 정치범들이 풀려났습니다. 1979년 2월 11일(이란력 바흐만 22일), 혁명이 승리한 것입니다.
이슬람 공화국 국민투표(1979년 3~4월)
혁명 직후의 이란은 다양한 정치 세력이 경합하는 혼란스러운 상태였습니다. 호메이니를 따르는 이슬람주의 세력, 바자르간과 같은 자유주의적 이슬람주의자, 국민전선의 세속 민족주의자, 투데당(공산당), 무자헤딘에 할크(이슬람-마르크스주의), 페다이얀에 할크(마르크스-레닌주의), 쿠르드족·아제리족·아랍계의 소수민족 운동 등이 혁명 이후의 이란을 두고 각자의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호메이니는 가장 조직적인 기반(모스크 네트워크, 바자르 상인, 도시 빈민층)과 가장 강력한 대중적 카리스마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혁명의 방향을 신속하게 결정하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1979년 3월 30~31일,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습니다. 투표 용지에는 단 하나의 질문만 있었습니다: “이전의 군주제를 이슬람 공화국으로 대체하는 데 동의합니까?” 선택지는 ‘예(녹색)’와 ‘아니오(적색)’ 두 가지뿐이었습니다. ‘민주 공화국’이나 ‘이슬람 민주 공화국’ 같은 대안은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공식 결과는 98.2%의 찬성이었습니다. 투표율은 약 89%로 발표되었습니다. 이 결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비밀투표가 완전히 보장되지 않았다는 지적, 녹색(찬성)과 적색(반대) 용지의 시각적 비대칭성, 일부 지역에서의 협박 사례 등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나 혁명 직후의 열광적 분위기와 호메이니의 압도적 대중적 지지를 고려하면, 다수의 이란인이 실제로 이슬람 공화국을 지지했을 것이라는 것이 대부분 역사학자들의 평가입니다.
1979년 4월 1일, 호메이니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جمهوری اسلامی ایران, Jomhuri-ye Eslāmi-ye Irān)의 수립을 공식 선포했습니다. 이 날은 이후 이란의 국경일 ‘이슬람 공화국의 날’이 되었습니다.
이슬람 공화국의 구조: 신정과 공화의 이중 체제
1979년 헌법: 벨라야트에 파키의 제도화
이슬람 공화국의 헌법 제정 과정은 혁명 내부의 권력 투쟁이 압축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이었습니다. 초기에 바자르간 임시 정부가 준비한 헌법 초안은 비교적 온건한 내용이었습니다.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을 모델로 삼아 대통령제 공화국에 이슬람적 요소를 가미한 정도였고, 벨라야트에 파키는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호메이니는 이 초안의 심의를 위해 ‘전문가 회의(마즐레스에 호브레간)’를 소집했고, 선거를 통해 구성된 73인의 이 회의에서 이슬람주의 세력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습니다. 전문가 회의는 초안을 근본적으로 재작성하여 벨라야트에 파키를 헌법의 핵심 원리로 삽입했습니다.
1979년 12월 국민투표로 확정된 이란 이슬람 공화국 헌법의 핵심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 최고지도자(라흐바르): 국가의 최고 권위. 군 통수권, 사법부 수장 임명권, 국영 방송 통제권, 외교·국방 정책의 최종 결정권을 가짐. 벨라야트에 파키 원리에 따라 이슬람 법학에 정통한 성직자가 맡음.
- 대통령: 국민 직접 선거로 선출. 행정부 수장이지만, 최고지도자에 종속. 임기 4년, 연임 1회 가능.
- 이슬람 의회(마즐레스): 290석의 단원제 의회. 국민 직접 선거로 선출. 입법권을 가지되, 모든 법안은 헌법수호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함.
- 헌법수호위원회(쇼라예 네가반): 6인의 이슬람 법학자(최고지도자 임명)와 6인의 일반 법률가(사법부 수장 추천, 의회 승인)로 구성. 의회 법안의 이슬람법·헌법 합치성 심사, 선거 후보자 자격 심사 권한.
- 전문가 회의(마즐레스에 호브레간): 88인의 성직자로 구성. 국민 직접 선거로 선출(단, 후보자 자격은 헌법수호위원회가 심사). 최고지도자의 선출, 감시, 필요 시 해임 권한.
- 사법부: 수장은 최고지도자가 임명. 이슬람법에 기반한 사법 체계 운영.
- 혁명수비대(세파흐에 파스다란, IRGC): 정규군과 별개의 군사 조직. 혁명 체제 수호가 주 임무. 최고지도자 직속.
이 체계의 핵심은 ‘공화적’ 요소(대통령 선거, 의회)와 ‘신정적’ 요소(최고지도자, 헌법수호위원회)의 병존입니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신정적 요소가 공화적 요소를 통제하는 위계가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대통령과 의회가 있지만, 헌법수호위원회가 후보자를 걸러내고 법안을 거부할 수 있으며, 최고지도자가 최종적인 국가 의사결정권을 보유합니다.
호메이니 본인은 초대 최고지도자에 취임했습니다. 헌법에 따르면 최고지도자는 이슬람 법학의 최고 권위자(마르자에 타클리드)여야 했는데, 호메이니는 이 조건에 부합하는 가장 명백한 인물이었습니다.

혁명위원회와 이슬람 법정: 혁명의 폭력적 측면
혁명 직후 전국 각지에 자생적으로 형성된 ‘혁명위원회(코미테)’와 ‘혁명 법정’은 혁명의 어두운 면을 보여줍니다. 구체제 인사들에 대한 재판이 급속히 진행되었고, 그 과정은 적법 절차의 기준에 크게 미달했습니다.
전 총리 호베이다, SAVAK 수장 나시리, 다수의 장성과 고위 관료가 혁명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습니다. 사디크 할할리(Sadegh Khalkhali) 판사가 주도한 이 재판들은 며칠, 때로는 몇 시간 만에 판결과 집행이 이루어졌으며, 변호인 접견권이나 항소 절차가 실질적으로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국제사면위원회와 인권 단체들은 이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혁명 초기 수개월간 수백 명이 처형된 것으로 추산되며, 구체제 인사뿐 아니라 동성애자, ‘간통자’ 등 이슬람 도덕법 위반자에 대한 처형도 포함되었습니다. 바자르간 임시 총리는 이 과정에 반대했지만 실질적 통제력이 없었습니다.
혁명의 급진화: 미국 대사관 인질 사태(1979~1981)
444일의 위기
1979년 11월 4일, ‘이맘의 노선을 따르는 학생들(Daneshjooyān-e Mosalmān-e Payrow-e Khatt-e Emām)’이라고 자칭하는 대학생 그룹이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52명의 미국 외교관과 직원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이 사건의 직접적 배경은 10월 22일 카터 대통령이 암 치료를 이유로 샤의 미국 입국을 허가한 것이었습니다. 이란인들은 1953년 쿠데타의 악몽을 떠올렸습니다. 미국이 다시 한번 샤를 복권시키려 한다는 공포가 확산되었고, 학생들은 대사관 점거를 통해 미국의 개입을 차단하고 샤의 송환을 요구했습니다.
호메이니는 초기에 이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으나, 대중적 열광을 보고 즉시 학생들의 행동을 승인했습니다. 그는 대사관을 ‘스파이의 소굴(لانه جاسوسی)’로 규정하고, 인질 사태를 ‘제2의 혁명’이라 불렀습니다.
인질 사태의 정치적 효과는 다층적이었습니다:
- 국내 정치의 급진화: 인질 사태는 이란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급진파에게 결정적 우위를 제공했습니다. ‘반미’와 ‘혁명 순수성’이 정치적 리트머스 테스트가 되면서, 온건파인 바자르간 총리가 사임에 몰렸습니다. 바자르간은 알제리에서 열린 회의에서 미국 국가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와 악수한 사진이 공개되면서 정치적으로 매장되었습니다.
- 헌법 투표 동원: 인질 사태 과정에서 반미 열기가 고조되었고, 이는 12월의 헌법 국민투표에서 벨라야트에 파키를 포함한 급진적 이슬람 헌법에 대한 압도적 찬성표로 이어졌습니다.
- 미-이란 관계의 단절: 미국은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를 시작했고, 1980년 4월 외교 관계를 단절했습니다. 이 단절은 오늘날까지(2026년 현재) 지속되고 있으며, 중동 정치의 근본적 구조를 규정하는 축 중 하나입니다.
- 카터 대통령의 정치적 몰락: 1980년 4월의 인질 구출 작전(이글 클로 작전)이 사막에서 참담하게 실패하면서, 카터 행정부의 무능함이 부각되었습니다. 이는 같은 해 11월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의 승리에 기여한 요인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인질들은 444일 만인 1981년 1월 20일, 레이건 대통령 취임식 당일에 석방되었습니다. 알제리의 중재로 타결된 이 합의의 타이밍은 카터에 대한 마지막 모욕이었고, 이란 혁명 정권의 반미 노선이 얼마나 철저한 정치적 계산에 기반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입니다.
혁명 이후의 이란: 내부 정리와 대외 충돌
반체제 세력 숙청과 ‘문화혁명’
1980~1981년, 이슬람 공화국은 혁명에 함께 참여했던 비이슬람주의 세력을 체계적으로 배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대통령 아볼하산 바니사드르(Abolhassan Banisadr, 1980년 1월 당선)는 호메이니에 의해 1981년 6월 해임되고 프랑스로 망명했습니다.
무자헤딘에 할크(MEK)는 1981년 6월부터 무장 투쟁에 나섰고, 이란 내에서 대규모 폭탄 테러를 자행하여 수십 명의 고위 관료가 사망했습니다. 이에 대한 정권의 보복은 가혹했습니다. 수천 명의 MEK 구성원과 지지자가 체포·처형되었습니다.
투데당(공산당) 역시 1983년 해산되고 지도부가 투옥되었습니다. 1988년에는 감옥에 수감 중이던 정치범 수천 명이 대량 처형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는 호메이니의 파트와(종교적 칙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 1988년 대학살의 규모는 오늘날까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으나, 인권 단체들은 수천 명에서 만 명 이상으로 추산합니다.
1980년 4월에는 ‘문화혁명’이 선포되어 전국의 대학이 2~3년간 폐쇄되었습니다. 이슬람 가치에 부합하도록 교육과정을 재편한다는 명목이었으며, 이 기간 동안 수천 명의 교수와 학생이 추방되었습니다.
여성에 대한 정책도 급격히 변화했습니다. 1979년 3월 8일(국제 여성의 날), 히잡 의무화에 반대하는 여성 시위가 벌어졌지만 결국 억압되었습니다. 1983년에는 공공장소에서의 히잡 착용이 법적으로 의무화되었고, 가족법이 개정되어 여성의 이혼 청구권과 양육권이 축소되었습니다. 가정법원의 여성 판사 임명이 금지되었고, 일부 직종에서 여성이 배제되었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 혁명의 시험대
1980년 9월 22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침공하면서 8년에 걸친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담은 혁명으로 군대가 약화된 이란을 상대로 빠른 승리를 기대했고, 이란 남서부의 석유 부국 후제스탄(아랍계 주민이 많은 지역)을 장악하려 했습니다.
이 전쟁은 본 시리즈의 범위를 넘어서는 별도의 방대한 주제이므로 상세히 다루지는 않지만, 이슬람 공화국의 형성에 미친 영향은 반드시 언급해야 합니다:
- 체제 결집 효과: 외부의 침공은 혁명 직후 분열된 이란 사회를 국가 방어 아래 하나로 묶었습니다. ‘신성한 방어(Defā’-e Moqaddas)’로 명명된 이 전쟁은 이슬람 공화국에 민족주의적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 혁명수비대(IRGC)의 성장: 전쟁을 통해 IRGC는 정규군에 필적하는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고, 전후에는 경제·정치 영역으로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 바시지(Basij) 민병대: 자원 입대한 젊은이들(일부는 미성년자)로 구성된 바시지는 인해전술과 지뢰밭 돌파 등 막대한 인적 희생을 감수하는 전술로 투입되었습니다.
- 전쟁의 트라우마: 이란 측 사망자는 18만~50만 명(추산에 따라 다름), 부상자는 수십만 명에 달했습니다. 이라크의 화학무기 사용(할라브자 학살 등)은 이란인들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습니다.
1988년 7월, 호메이니는 전쟁 종결을 위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 598호를 수락했습니다. 그는 이를 “독배를 마시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전쟁은 영토 변화 없이 끝났지만, 양국에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남겼습니다.
이란 혁명의 세계사적 의미
시아파 정치 이슬람의 탄생
이란 혁명은 시아파 정치 이슬람이 실제로 국가를 장악한 최초이자 아직까지 유일한 사례입니다. 34화에서 살펴본 사파비 왕조(1501~1736)가 시아파를 이란의 국교로 만들었다면, 1979년 혁명은 시아파 성직자가 직접 정치 권력을 행사하는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이 모델은 중동 전역의 시아파 공동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레바논의 헤즈볼라(1982년 창설), 이라크의 시아파 정치 운동, 바레인과 사우디 동부의 시아파 활동가들이 이란 혁명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동시에 이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수니파 왕정 국가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시아파 초승달(Shia Crescent)’ 담론과 수니-시아 대립의 지정학적 구조화에 기여했습니다.
이슬람 부활 운동에 대한 자극
이란 혁명은 시아파에 국한되지 않는 더 넓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수니파 세계에서도 이슬람이 서구적 세속 이데올로기(자유주의, 사회주의)의 대안으로서 정치적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사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1980~90년대 전 세계 무슬림 사회에서 일어난 이슬람 부활(Islamic Revival) 운동의 직접적 촉매 중 하나였습니다.
같은 해인 1979년 11월,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대모스크 점거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이란 혁명과 직접적 인과관계는 없었으나 이슬람 세계 전반의 급진화 추세를 보여주는 동시대적 현상이었습니다.
냉전 구도의 균열
이란 혁명은 냉전의 양극 구도에 맞지 않는 ‘제3의 길’을 제시했습니다. 호메이니는 미국을 ‘대(大)사탄’, 소련을 ‘소(小)사탄’으로 규정하며 “동도 아니고 서도 아닌 이슬람 공화국(نه شرقی، نه غربی، جمهوری اسلامی)”을 구호로 내걸었습니다. 이는 비동맹 운동과도 다른,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독자적 국제 정치 노선이었습니다.
미국에 이란 혁명의 충격은 심대했습니다. ‘닉슨 독트린’ 하에서 이란은 걸프 지역의 ‘쌍둥이 기둥(Twin Pillars)’ 중 하나(다른 하나는 사우디아라비아)로서 미국의 중동 전략의 핵심이었습니다. 이 기둥의 붕괴는 미국으로 하여금 걸프 지역에 대한 직접적 군사 개입 태세를 강화하도록 이끌었고, 이는 1991년 걸프전과 2003년 이라크 침공으로 이어지는 긴 연쇄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혁명 수출론과 그 한계
호메이니와 이란 혁명 정권은 초기에 ‘혁명 수출(Sodur-e Enqelāb)’을 공식 외교 노선으로 표방했습니다. 이란 헌법 제154조는 “세계의 피억압자(모스타자핀)를 지지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걸프 왕정 국가들과 이라크 바트당 정권의 강한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이란-이라크 전쟁의 배경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혁명 수출’은 실질적으로 제한적 성과에 그쳤습니다. 레바논(헤즈볼라)을 제외하면 다른 나라에서 이란 모델의 직접적 복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시아파가 소수인 나라에서 시아파 신정 모델의 호소력이 제한적이라는 구조적 한계 때문이기도 했고, 이란-이라크 전쟁의 소모로 혁명 수출에 투자할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호메이니의 사망과 이후의 이란
1989년 6월: 시대의 종말
1989년 6월 3일, 루홀라 호메이니가 86세로 사망했습니다. 장례식에는 수백만 명이 운집했고, 관에 달려드는 인파 때문에 시신이 관 밖으로 떨어지는 혼란까지 발생했습니다. 호메이니의 카리스마적 권위는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이었기에, 그의 사망은 이슬람 공화국 체제의 존속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체제는 생존했습니다. 호메이니 사망 하루 전, 전문가 회의는 알리 하메네이(Ali Khamenei, 당시 대통령)를 차기 최고지도자로 선출했습니다. 하메네이는 호메이니와 같은 학문적 권위(마르자에 타클리드)를 갖추지 못했기에, 1989년 헌법 개정을 통해 최고지도자의 종교적 자격 요건이 완화되었습니다. 이는 벨라야트에 파키 이론의 원래 정신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으나, 체제의 연속성을 위해 실용적 선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메네이는 이후 30년 이상(2026년 현재까지) 최고지도자직을 유지하며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안정적 존속을 이끌었습니다. 라프산자니, 하타미, 아흐마디네자드, 로하니, 라이시에 이르기까지 여러 대통령이 교체되었지만 최고지도자 체제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란 혁명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다층적 혁명의 성격
이란 혁명은 단순히 ‘이슬람 혁명’으로만 환원할 수 없는 복합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렌즈를 제시합니다:
- 반식민·반제국 운동: 1953년 쿠데타 이후 누적된 반미·반서방 감정의 폭발. 미국이 지원하는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혁명.
- 계급 투쟁: 석유 붐의 혜택에서 소외된 도시 빈민과 농촌 이주민의 분노. 극심한 빈부격차에 대한 반발.
- 문화적 정체성 운동: 급격한 서구화에 따른 문화적 소외감. 전통적 가치와 이슬람적 정체성의 재확인.
- 민주주의 요구: SAVAK의 억압과 정치적 자유 부재에 대한 저항. 입헌혁명(1906)과 모사데크 운동(1951~53)의 미완의 과제 계승.
- 시아파 종교적 동력: 카르발라 서사에 기반한 순교와 저항의 전통이 혁명적 동원의 언어와 메커니즘을 제공.
이 다양한 흐름이 1977~1979년에 일시적으로 합류하여 샤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혁명 이후에는 이슬람주의 세력이 다른 모든 흐름을 제압하고 권력을 독점했습니다. 이란 혁명의 비극 중 하나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요구하며 독재를 무너뜨린 혁명이 결과적으로 또 다른 형태의 권위주의 체제를 만들어냈다는 점입니다.
이란 혁명이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 것
이란 혁명은 여러 면에서 현대사의 중요한 질문들을 제기합니다. 급격한 경제 성장이 정치적 자유 없이 지속 가능한가? 전통과 근대화는 양립할 수 있는가? 혁명은 약속한 것을 실현하는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억압을 낳는가? 종교는 정치의 도구인가, 아니면 정치가 종교의 도구인가?
2,500년의 왕정 전통을 가진 이란에서 성직자가 국가를 통치하는 실험은 이제 47년째를 맞고 있습니다. 이 실험의 최종적 평가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란의 미래는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다음 이야기: 레바논 내전과 팔레스타인 문제의 국제화
이란 혁명이 중동의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것과 같은 시기, 지중해 동안의 작은 나라 레바논에서는 종파 간 갈등이 15년에 걸친 내전으로 폭발하고 있었습니다. 레바논 내전은 중동의 모든 모순 — 종파 갈등,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외세 개입, 이스라엘의 팽창 — 이 한 나라 안에서 충돌한 축소판이었습니다. 49화에서는 레바논 내전을 통해 팔레스타인 문제가 어떻게 국제화되었는지, 그리고 이란 혁명의 산물인 헤즈볼라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살펴봅니다.
이미지는 Leonardo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이미지는 Claude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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