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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역사] 46/52화: 이스라엘 건국과 나크바: 1948년 같은 날 갈린 두 민족의 역사

1948년 이스라엘 독립과 나크바의 두 서사

들어가며 — 하나의 날짜, 두 개의 이름

1948년 5월 14일. 이 날짜는 중동 현대사에서 가장 깊은 균열선을 표시하는 좌표다. 한쪽에서는 ‘독립기념일(욤 하아츠마우트)’이라 부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대재앙(알나크바)’이라 부른다. 같은 24시간 동안 벌어진 사건이 어떻게 정반대의 이름으로 기억되는가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감정이 아닌 사실의 연쇄를 따라가야 한다.

지난 시간 우리는 사우디아라비아 건국과 석유의 발견을 살펴보며 아라비아반도에서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는 과정을 추적했다. 그러나 반도의 동쪽에서 석유가 분출하던 같은 시기, 지중해 동안의 좁은 땅에서는 전혀 다른 성격의 국가 건설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42화에서 다룬 밸푸어 선언(1917)의 약속, 43화에서 살펴본 영국 위임통치의 모순이 30년 동안 축적되어 마침내 폭발한 것이 바로 1948년의 사건이다.

이 글은 어느 한쪽의 ‘정의’나 ‘악의’를 판정하지 않는다. 대신 기록된 사실 — 문서, 통계, 증언, 유엔 결의문 — 을 시간순으로 배열하여 독자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제1장: 위임통치 말기 — 세 방향의 충돌(1936~1947)

1. 아랍 대봉기와 필 위원회(1936~1939)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에서는 1920년대부터 아랍 주민과 유대인 이민자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밸푸어 선언이 약속한 ‘유대인 민족 고향’과, 같은 땅에 이미 살고 있던 아랍 주민의 권리가 정면으로 충돌했기 때문이다.

1936년 4월, 팔레스타인 아랍 주민들은 대규모 총파업과 무장봉기를 시작했다. 이른바 ‘아랍 대봉기(Great Arab Revolt)’는 1939년까지 3년간 지속되었다. 봉기의 핵심 요구는 세 가지였다.

  • 유대인 이민의 즉각 중단
  • 유대인에 대한 토지 매각 금지
  • 독립 아랍 정부의 수립

영국은 봉기를 군사적으로 진압하면서 동시에 필 위원회(Peel Commission, 1937)를 파견해 상황을 조사했다. 필 위원회는 역사상 최초로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와 아랍 국가로 분할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유대 국가에는 갈릴리와 해안 평야의 약 20%를, 아랍 국가에는 나머지 대부분을 배정했고,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영국이 계속 관할하는 국제 구역으로 남겼다.

유대인 지도부(유대 기관, Jewish Agency)는 분할 원칙 자체는 수용하되 영토 비율에 불만을 표했다. 아랍 지도부는 분할 자체를 거부했다. 어떤 비율이든 자기 땅을 외부 이주민에게 떼어주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리였다. 필 위원회의 권고는 결국 실행되지 못했다.

2. 백서(White Paper)와 유대인 사회의 분노(1939)

봉기 진압 이후 영국은 1939년 5월 맥도널드 백서(MacDonald White Paper)를 발표했다. 이 문서의 핵심은 다음과 같았다.

  • 향후 5년간 유대인 이민을 연 15,000명으로 제한하고, 그 이후에는 아랍 측 동의 없이는 추가 이민 불허
  • 토지 매매를 특정 구역에서 제한 또는 금지
  • 10년 내에 아랍-유대 공동 독립국가 수립을 목표

이 백서는 사실상 밸푸어 선언의 후퇴였다. 유대인 지도부는 격렬히 반발했다. 특히 유럽에서 나치의 박해가 가속화되던 시점에 이민 문을 닫는다는 것은 유대인에게 사형선고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아랍 지도부 역시 백서를 불충분하다며 거부했다. 양측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한 영국의 정책은 위임통치의 구조적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3.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의 충격(1939~1945)

제2차 세계대전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도덕적·정치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유럽에서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이 나치에 의해 체계적으로 학살당한 홀로코스트(쇼아)는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규모의 대량학살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생존한 유대인 수십만 명이 유럽의 ‘이산민 수용소(DP camps)’에 갇혀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 팔레스타인은 유일하게 남은 희망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1939년 백서의 이민 제한을 여전히 유지했고, 불법 이민선을 나포하여 승객들을 키프로스의 억류 수용소로 보냈다.

1947년 7월의 ‘엑소더스(Exodus)’ 사건은 이 모순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4,515명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태운 배가 팔레스타인 해안에 도착했으나, 영국 해군에 의해 나포되어 승객들은 다시 독일의 수용소로 강제 송환되었다. 이 사건은 국제 여론을 크게 자극했고, 영국의 위임통치에 대한 비판이 전 세계적으로 고조되었다.

영국 위임통치 말기 팔레스타인의 긴장

4. 유대인 무장 조직의 활동(1944~1947)

전쟁 말기부터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무장 조직들은 영국 위임통치에 대한 무장 투쟁을 본격화했다. 주요 조직은 세 개였다.

  • 하가나(Haganah): 유대 기관 산하의 준군사 조직으로 약 3만~4만 명 규모. 공식 지도부의 통제 아래 상대적으로 규율 있는 활동을 했다.
  • 이르군(Irgun, 에첼): 수정주의 시온주의 노선의 무장 조직. 지도자는 후일 이스라엘 총리가 되는 메나헴 베긴이었다.
  • 레히(Lehi, 스턴 갱): 이르군에서 분리된 소규모 극단 조직. 이츠하크 샤미르가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1946년 7월 22일, 이르군은 영국 위임통치 행정부와 군사령부가 입주한 예루살렘의 킹 데이비드 호텔을 폭파했다. 이 공격으로 91명이 사망했는데, 사망자에는 영국인, 아랍인, 유대인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은 영국 본국에서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피로감을 극대화시켰다.

아랍 측에서도 무장 활동이 있었다. 1936~1939년 봉기의 전통을 이은 비정규 전투원들이 유대인 정착촌과 수송대를 공격했고, 주변 아랍 국가에서도 의용군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5. 영국의 손 떼기 — 유엔으로 넘어간 문제(1947년 2월)

아랍과 유대인 양쪽의 무장 공격, 국제 여론의 압력, 전후 경제난 속에서 더 이상 팔레스타인을 관리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한 영국은 1947년 2월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이관한다고 선언했다. 30년간 유지한 위임통치를 포기한 것이다.

유엔은 즉시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UNSCOP, United Nations Special Committee on Palestine)를 구성했다. 11개국 대표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1947년 여름 동안 팔레스타인 현지를 조사하고 양측의 입장을 청취했다. 주목할 점은, 아랍고등위원회(Arab Higher Committee)는 UNSCOP 조사 자체를 보이콧했다는 것이다. 분할이든 뭐든 외부 기구가 자국 영토의 처분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는 입장이었다.

제2장: 유엔 결의 181호 — 분할안의 탄생(1947)

1. UNSCOP 보고서의 두 가지 안

1947년 8월 31일, UNSCOP는 두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 다수안(8개국 지지):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 아랍 국가, 예루살렘 국제 관할구역(corpus separatum)으로 분할. 두 국가 사이에 경제 동맹을 설정.
  • 소수안(3개국 지지): 연방제 국가 수립. 유대 자치구와 아랍 자치구를 포함하는 단일 연방.

유엔 총회는 다수안을 기초로 논의를 진행했다. 이것이 유엔 총회 결의 181호의 원형이다.

2. 분할안의 구체적 내용

결의 181호가 제시한 분할의 구체적 수치는 다음과 같았다.

  • 유대 국가: 전체 면적의 약 56.5%. 네게브 사막의 대부분, 해안 평야, 이즈르엘(에스드렐론) 계곡, 동부 갈릴리를 포함.
  • 아랍 국가: 전체 면적의 약 43.5%. 서부 갈릴리, 사마리아·유대아 구릉지(오늘날 서안지구 지역), 가자 해안, 야파(자파) 도시를 포함.
  • 예루살렘 국제구역: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포함하는 특별 국제 관할 구역. 유엔 신탁통치이사회가 관리.

당시 인구 통계를 보면,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에는 약 120만~130만 명의 아랍인과 약 60만~65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유대인은 전체 인구의 약 33%였으나 분할안에서 56.5%의 영토를 배정받았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네게브 사막(전체 면적의 약 45%)이 유대 국가에 포함되었는데, 이 지역은 대부분 불모지로서 소수의 베두인 부족만 거주했다. 그러나 이 수치적 불균형은 아랍 측의 거부 논리를 강화하는 핵심 근거가 되었다.

더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분할안대로 유대 국가가 세워지더라도, 그 국경 안에는 약 49만 7천 명의 아랍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유대 국가 인구의 거의 절반이 아랍인인 셈이었다. 이는 민족 국가로서의 안정성에 근본적 의문을 던졌다.

유엔 분할안 181호 지도

3. 표결 —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결의 181호가 표결에 부쳐졌다.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 찬성 33표: 미국, 소련, 프랑스, 호주, 캐나다,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
  • 반대 13표: 아프가니스탄, 쿠바, 이집트, 그리스, 인도, 이란, 이라크, 레바논,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튀르키예, 예멘
  • 기권 10표: 영국, 아르헨티나, 칠레, 중국, 콜롬비아, 엘살바도르, 에티오피아, 온두라스, 멕시코, 유고슬라비아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한 표결에서 결의안은 통과되었다. 몇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첫째, 미국과 소련이 동시에 찬성했다. 냉전이 시작되는 시점에 양 초강대국이 같은 편에 선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미국은 트루먼 대통령의 국내 정치적 고려(유대인 유권자)와 인도주의적 명분이 결합되었고, 소련은 영국의 중동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전략적 판단이 작용했다.

둘째, 영국은 기권했다. 위임통치를 포기하면서 문제를 유엔에 넘긴 당사자가 결의안에 대해서는 찬반 의사를 밝히지 않은 것이다. 이는 어느 쪽에도 서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셋째, 아랍·이슬람 국가들은 전원 반대했다. 반대 13표 중 대다수가 아랍연맹 회원국이거나 무슬림 다수 국가였다.

4. 양측의 반응

유대 기관(Jewish Agency)의 의장 다비드 벤구리온은 분할안을 수용했다. 텔아비브에서는 자발적인 축하 행사가 벌어졌다. 다만 수용에는 전략적 계산이 있었다. 벤구리온은 사적으로 분할안의 국경이 최종적이 아닐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국가를 먼저 세우고, 나머지는 이후에 해결한다”는 논리였다.

아랍고등위원회와 아랍연맹은 결의 181호를 즉각 거부했다. 그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 팔레스타인은 아랍인의 땅이다. 인구의 3분의 2가 아랍인인데 외부에서 이주해 온 소수에게 영토의 과반을 주는 것은 정의에 반한다.
  • 유엔 총회는 주권국의 영토를 분할할 법적 권한이 없다. 결의 181호는 총회 결의(recommendation)이지 안보리 결의(binding decision)가 아니다.
  • 밸푸어 선언 자체가 팔레스타인 주민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불법적 약속이므로, 그에 기초한 모든 후속 조치도 무효다.

이 거부의 의미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 논쟁이 있다. 한쪽에서는 “아랍 측이 국가 수립의 기회를 스스로 거부했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부당한 제안을 거부한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반박한다. 양측의 논리를 사실과 분리하여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제3장: 내전의 시작(1947년 11월~1948년 5월)

1. 결의안 직후의 폭력 격화

분할안이 통과된 다음 날인 1947년 11월 30일부터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폭력이 분출했다. 이 시기를 역사가들은 ‘1947~1948년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내전(1947–1948 civil war in Mandatory Palestine)’이라 부른다.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기 전, 아직 영국이 공식적으로 위임통치를 유지하고 있던 5개월 반 동안의 전투다.

초기에는 아랍 비정규군과 민병대가 주도권을 잡았다. 예루살렘과 텔아비브를 잇는 도로가 봉쇄되었고, 유대인 정착촌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다. 시리아 출신의 파우지 알카우크지가 이끄는 아랍해방군(Arab Liberation Army)이 갈릴리에 진입했고, 이집트 무슬림형제단 의용군도 남부에 나타났다.

유대인 측에서는 하가나를 중심으로 방어전을 펼쳤다. 그러나 예루살렘 유대인 지구에 대한 보급로가 차단되면서 약 10만 명의 유대인 주민이 포위 상태에 놓였다. 물, 식량, 무기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2. 달렛 작전(Plan Dalet)과 전환점(1948년 3~4월)

1948년 3월, 전세가 유대인 측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하가나는 달렛 작전(Plan Dalet, 또는 Plan D)을 입안했다. 이 작전의 성격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에서 치열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 측 해석: 달렛 작전은 영국 철수 이후 예상되는 아랍 국가들의 정규군 침공에 대비한 방어적 군사 계획이었다. 주요 도로와 전략적 거점을 확보하여 유대 국가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팔레스타인/아랍 측 해석 및 일부 역사가의 분석: 달렛 작전은 아랍 주민이 다수인 지역을 군사적으로 장악하고, 필요시 아랍 주민을 추방하는 것을 포함한 공세적 계획이었다. 작전 문서에는 “적대적 무장 세력의 거점인 마을의 파괴”와 “주민의 국경 밖 추방”이라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관계를 보면, 달렛 작전이 실행된 1948년 4월부터 아랍 주민의 대규모 이탈이 급격히 가속화된 것은 기록으로 확인된다. 작전의 의도와 실행 사이에 간극이 있었는지, 아니면 의도대로 실행된 것인지는 자료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

3. 데이르 야신 학살(1948년 4월 9일)

달렛 작전 시기에 벌어진 사건 중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은 데이르 야신(Deir Yassin) 학살이다. 예루살렘 서쪽 외곽의 아랍 마을 데이르 야신에 이르군과 레히 소속 전투원 약 120~130명이 공격을 감행했다.

이 공격으로 마을 주민 다수가 사망했다. 사망자 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초기 보도에서는 254명이라는 숫자가 널리 퍼졌으나, 이후 연구에서는 107명에서 120명 사이로 추산하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합의다. 사망자 중에는 비전투원 — 여성, 아동, 노인 — 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데이르 야신 사건은 두 가지 차원에서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첫째, 심리적 공포 효과. 데이르 야신의 소식은 팔레스타인 전역에 빠르게 퍼졌다. 아랍 측 선전도 공포를 증폭시켰다(일부는 과장된 잔학 행위를 보도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주민들의 공포를 더욱 키워 대피를 가속화했다). 많은 아랍 마을 주민들이 비슷한 운명을 두려워하며 마을을 떠났다.

둘째, 보복의 연쇄. 4월 13일, 아랍 민병대가 예루살렘 하다사 병원으로 향하던 의료 호송대를 공격하여 의사, 간호사, 환자 등 78명이 사망했다(하다사 학살). 폭력은 폭력을 불렀다.

유대 기관은 데이르 야신 사건을 공식적으로 비난했고, 벤구리온은 요르단의 압둘라 왕에게 사과 전문을 보냈다. 그러나 하가나도 이 시기 다른 지역에서 아랍 마을 주민의 추방에 관여한 기록이 있어, 비난의 범위는 이르군·레히에 국한되지 않는다.

4. 하이파, 야파, 서예루살렘의 함락(1948년 4~5월)

1948년 4월 하순부터 5월 초에 걸쳐 주요 도시들에서 연쇄적인 변화가 벌어졌다.

하이파(4월 22일): 영국군이 하이파에서 철수하자 하가나가 아랍 지구를 공격했다. 유대인 시장은 아랍 주민에게 잔류를 호소했으나, 아랍 지도부는 주민들에게 일시적 대피를 권유했다. 약 6만~7만 명의 아랍 주민 중 대다수가 도시를 떠났다. 이것이 자발적 대피였는지, 군사적 압박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여전히 논쟁 대상이다. 하가나의 심리전 방송(확성기를 통한 경고 방송)이 공포를 조장했다는 기록이 있고, 일부 아랍 지도자가 대피를 독려한 기록도 있다.

야파(4월 25일~5월 13일): 분할안에서 아랍 국가에 배정된 야파는 이르군의 공격을 받았다. 약 7만~8만 명의 아랍 주민 중 대다수가 바다와 육로를 통해 도시를 떠났다. 5월 13일 야파는 하가나에 항복했다.

서예루살렘: 카타몬, 바카아 등 아랍 거주 구역에서 아랍 주민이 퇴거했고, 유대인 세력이 이 지역을 장악했다. 예루살렘 구시가지(올드시티)는 여전히 아랍·요르단 세력이 장악했다.

이 5개월의 내전 기간 동안 이미 약 25만~30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 주민이 집을 떠나 있었다. 이스라엘 독립 선언과 아랍 국가들의 침공이 있기 전의 일이다.

제4장: 1948년 5월 14일 — 독립 선언

1. 마지막 준비

영국의 위임통치 종료일은 1948년 5월 15일 자정(5월 14일 금요일 일몰 직후)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유대인 지도부는 이 시점에 맞춰 독립을 선언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쉽지 않았다.

미국 국무부는 독립 선언을 연기하고 유엔 신탁통치를 수용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조지 마셜 국무장관은 아랍 국가들의 침공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국가 선포는 무모하다고 경고했다. CIA도 유대 국가가 군사적으로 생존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내렸다.

유대인 지도부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인민의회(People’s Council) 13명의 위원 중 일부는 국가 이름을 ‘유다(Judea)’로 하자고 주장했고, 다른 이들은 ‘이스라엘’을 선호했다. 국경을 명시할 것인지, 수도를 어디로 할 것인지도 끝까지 논쟁이었다. 결국 독립선언문에는 국경선을 명시하지 않기로 했다.

2. 텔아비브, 로스차일드 대로 16번지

1948년 5월 14일 오후 4시, 텔아비브의 로스차일드 대로 16번지에 위치한 텔아비브 미술관(옛 디젠고프 하우스) 건물에서 역사적 행사가 시작되었다. 안식일(샤밧) 시작 전에 선언을 마치기 위해 금요일 오후로 시간이 잡혔다.

다비드 벤구리온이 이스라엘 독립선언문(메길라트 하아츠마우트)을 낭독했다. 선언문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유대 민족이 이스라엘 땅(에레츠 이스라엘)에서 태어났으며, 이 땅과의 역사적·종교적 유대를 강조
  • 디아스포라의 고통과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언급하며 유대 국가의 필요성을 역설
  • 유엔 총회 결의 181호를 국가 수립의 법적 근거로 인용
  • 새 국가가 “사회적·정치적 완전한 평등”을 보장할 것이며, 종교·인종·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주민의 권리를 보호할 것을 약속
  • “아랍 주민들에게 평화를 유지하고 시민권에 기초한 동등한 국가 건설에 참여하라”고 호소
  • “이웃 국가들과 그 국민들에게 평화와 선린의 손을 내민다”

선언문 낭독이 끝나고 팔레스타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하티크바(희망)’를 연주했다. 참석자 250여 명이 기립하여 함께 불렀다. 이 곡은 이스라엘의 국가(國歌)가 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선언 장면

3. 국제 승인의 연쇄

독립 선언 직후 국제 사회의 반응은 빨랐다.

미국은 독립 선언 11분 만에 사실상의 승인(de facto recognition)을 부여했다. 이는 트루먼 대통령의 개인적 결단이었다. 국무부와 국방부의 반대를 무릅쓴 것이었으며, 트루먼의 측근 클라크 클리포드가 핵심 역할을 했다. 트루먼은 후일 “올바른 일이었다”고 회고했지만, 조지 마셜 국무장관은 “투표를 위한 결정이라면 나는 대통령에게 반대표를 던질 것”이라고까지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소련은 5월 17일에 법률상의 승인(de jure recognition)을 부여했다. 미국보다 더 강한 수준의 공식 승인이었다. 소련의 동기는 복합적이었다. 영국의 중동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전략, 이스라엘 건국 운동 내 사회주의 세력(키부츠 운동, 마팜당 등)에 대한 기대, 그리고 아랍 왕정 국가들에 대한 견제가 함께 작용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의 양해 아래 이스라엘에 결정적인 무기를 공급한 국가였다. 전쟁 초기 이스라엘 공군의 전투기 대부분이 체코제 아비아 S-199(메서슈미트 Bf 109의 체코 생산 버전)였다는 사실은 냉전 초기의 기묘한 지정학을 보여준다.

제5장: 아랍 국가들의 침공(1948년 5월 15일)

1. 다섯 나라의 군대

1948년 5월 15일 새벽, 영국 위임통치가 공식 종료되자마자 다섯 아랍 국가의 정규군이 팔레스타인에 진입했다.

  • 이집트: 남부 네게브와 가자 방면으로 진격. 약 1만 명 규모.
  • 트란스요르단(요르단): 아랍군단(Arab Legion)이 동쪽에서 진입, 예루살렘과 중부 지역을 목표로 삼았다. 영국인 장교 존 배고트 글럽(글럽 파샤)이 지휘하는 아랍 최정예 부대였다. 약 4,500~6,000명.
  • 시리아: 북동부 갈릴리 방면으로 진격. 약 5,000~6,000명.
  • 이라크: 요르단을 경유해 중부 전선에 투입. 약 3,000~5,000명.
  • 레바논: 소규모 병력이 북부에서 진입. 약 1,000명.

이 외에도 사우디아라비아, 예멘 등이 소규모 병력을 파견했고, 아랍해방군과 무슬림형제단 의용군도 전투에 참여했다. 아랍 측 총 병력은 초기에 약 2만 5천~3만 명 수준이었다.

이스라엘 측은 하가나를 개편한 이스라엘 방위군(IDF, Israel Defense Forces)을 5월 26일 공식 창설했다. 이르군과 레히도 IDF에 통합되었다(일부 마찰 끝에). 초기 병력은 약 3만~3만 5천 명이었으나, 전쟁 기간 중 동원과 해외 이민자 유입으로 빠르게 증가하여 연말에는 약 10만 명에 달했다.

2. 전쟁의 전개 — 세 단계

제1단계: 아랍군의 초기 공세(5~6월)

가장 치열한 전투는 예루살렘에서 벌어졌다. 요르단의 아랍군단은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유대인 지구를 포위·공격하여 5월 28일 항복을 받아냈다. 구시가지 유대인 지구의 주민 약 1,500명은 추방되었고, 유대인 회당과 건물이 파괴되었다. 라트룬 요새를 둘러싼 전투에서도 이스라엘군은 요르단 아랍군단에 패배했다. 이집트군은 남부에서 키부츠 야드 모르데하이, 니짐 등을 공격하며 북쪽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아랍 국가들의 공세는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아랍 국가들 사이의 불신과 비협조가 핵심 원인이었다. 트란스요르단의 압둘라 왕은 팔레스타인 아랍 국가 수립보다 자국 영토 확대에 관심이 있었고, 이집트의 파루크 왕도 마찬가지였다. 통합 군사 지휘 체계가 사실상 부재했다.

제2단계: 제1차 휴전과 이스라엘의 재무장(6~7월)

유엔 중재관 폴케 베르나도테 백작의 중재로 6월 11일부터 4주간의 제1차 휴전이 시행되었다. 이 휴전 기간은 이스라엘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대량의 무기가 도착했고, 해외(특히 유럽과 북미)에서 전투 경험이 있는 유대인 의용병들이 유입되었다. 병력은 약 6만 5천 명으로 증강되었다.

7월 8일 휴전이 만료되자 이스라엘군은 ’10일 전투(Ten Days’ Battles)’라 불리는 공세를 펼쳤다. 리다(로드)와 라믈레를 점령하고, 나자렛을 포함한 하부 갈릴리를 장악했다. 리다·라믈레 함락 시 약 5만~7만 명의 아랍 주민이 추방되었는데, 이츠하크 라빈(당시 여단장, 후일 총리)이 벤구리온의 지시에 따라 주민 추방을 실행했다는 기록이 라빈 자신의 회고록에 남아 있다.

제3단계: 이스라엘의 결정적 공세(10월~1949년 3월)

7월 18일부터 제2차 휴전이 시작되었으나, 10월 이후 이스라엘군은 결정적 군사 작전들을 연속으로 감행했다.

  • 히람 작전(10월): 북부 갈릴리에서 아랍해방군과 레바논군을 격퇴, 갈릴리 전역 장악
  • 요아브 작전(10월): 남부 네게브에서 이집트군을 격퇴, 베르셰바 점령
  • 호레브 작전(12월~1949년 1월): 시나이 반도 진입까지 포함한 대규모 공세. 영국의 개입 위협으로 시나이에서 철수했으나 네게브의 대부분을 확보

전쟁이 끝날 무렵 이스라엘은 유엔 분할안에서 배정된 영토보다 약 50% 더 넓은 영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분할안 기준 56.5%에서 실제 약 78%로 확대된 것이다.

3. 휴전 협정(1949년)

1949년 2월부터 7월까지 유엔 중재 아래 이스라엘은 이집트, 레바논, 요르단, 시리아와 개별적으로 휴전 협정(Armistice Agreements)을 체결했다.

  • 이집트(2월 24일): 가자 지구는 이집트가 관할. 시나이는 이집트 영토로 확인.
  • 레바논(3월 23일): 위임통치 시대의 국경으로 복귀.
  • 요르단(4월 3일): 요르단이 서안지구(웨스트뱅크)와 동예루살렘(구시가지 포함)을 장악. 이 지역을 1950년 공식 병합(국제사회 대부분은 이 병합을 승인하지 않았다).
  • 시리아(7월 20일): 시리아군이 약간의 비무장지대를 남기고 철수.

중요한 점은, 이 협정들이 ‘평화 조약’이 아니라 ‘휴전 협정’이었다는 것이다.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국경이 아닌 ‘휴전선(Green Line)’이 그어졌다. 이 선은 오늘날까지 국제법적 논쟁의 기준점으로 남아 있다.

이라크는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하지 않았으므로 별도의 휴전 협정을 맺지 않았다. 이라크군은 요르단 영역으로 철수했다.

제6장: 나크바 — 팔레스타인의 대재앙

1948년 나크바 당시 팔레스타인 난민 행렬

1. 나크바란 무엇인가

나크바(النكبة, al-Nakba)는 아랍어로 ‘대재앙’ 또는 ‘대참사’를 의미한다. 1948년 전쟁 과정에서 약 70만~75만 명(추정치에 따라 편차가 있으며, 유엔 기구 UNRWA의 공식 등록 기준으로는 약 72만 6천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 주민이 자신의 집과 마을을 떠나 난민이 된 사건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 용어를 처음 체계적으로 사용한 것은 시리아 출신 역사가 콘스탄틴 주라이크로, 1948년 8월에 출간한 책 『대재앙의 의미(معنى النكبة)』에서 아랍 세계의 패배와 팔레스타인 주민의 이산을 ‘나크바’라 명명했다.

나크바의 규모를 수치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난민 수: 약 70만~75만 명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아랍 인구의 약 55~60%)
  • 파괴·비워진 마을: 약 400~530개 (연구자에 따라 편차. 이스라엘 역사가 베니 모리스는 약 400개, 팔레스타인 연구자 왈리드 칼리디는 약 530개로 추산)
  • 도시 이탈: 하이파, 야파, 리다, 라믈레, 아크레, 베르셰바 등 주요 도시의 아랍 주민 대부분이 떠남
  • 난민 행선지: 서안지구, 가자 지구,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이집트, 이라크 등

2. 떠난 이유 — 복합적 원인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한 원인은 단일하지 않다. 역사 연구가 축적되면서 복수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음이 밝혀졌다. 이스라엘의 ‘신역사가(New Historians)’ — 베니 모리스, 일란 파페, 아비 슐라임 등 — 이 1980년대 이후 비밀 해제된 이스라엘 국방부·외무부 문서를 분석하면서 기존의 양측 공식 서사 모두에 수정이 가해졌다.

원인 1: 군사적 공격과 강제 추방

여러 사례에서 유대인 무장 세력(하가나, 이르군, 레히, 이후 IDF)이 아랍 주민을 직접 추방한 기록이 있다. 리다·라믈레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베니 모리스의 분석에 따르면 전체 난민의 상당 부분이 직접적 군사 작전의 결과로 발생했다. 일란 파페는 더 나아가 이를 ‘민족 청소(ethnic cleansing)’로 규정한다.

원인 2: 전투와 공포로 인한 자발적 피난

전투 지역의 민간인이 안전을 위해 피난한 사례도 많았다. 데이르 야신 학살 이후 퍼진 공포가 다른 마을 주민들의 선제적 대피를 촉진한 것은 확인된 사실이다. 이는 ‘자발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공포의 원인이 실제 발생한 학살이었다는 점에서 순수한 의미의 자발적 이동과는 구분된다.

원인 3: 아랍 지도부의 대피 명령설

이스라엘의 전통적 서사는 “아랍 지도자들이 전쟁 승리 후 귀환할 수 있다며 주민들에게 대피를 명령했다”고 주장해왔다. 이 주장에 대해 역사학적 검증이 이루어졌다. 일부 사례(하이파 등)에서 아랍 지도자가 대피를 권유한 기록이 있으나, 이것이 조직적·체계적인 ‘명령’이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영국의 정보 보고서(1948년 6월)도 “아랍 이탈의 대부분은 유대인 세력의 군사적 행동에 의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베니 모리스는 “아랍 라디오 방송이 주민들에게 떠나라고 명령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다”고 결론지었다.

원인 4: 경제적 붕괴와 사회 구조 해체

전투가 장기화되면서 팔레스타인 아랍 사회의 경제·행정 기반이 무너졌다. 도시의 부유층과 중산층이 먼저 떠났고(전쟁 초기), 이들의 이탈은 나머지 주민의 생계와 사회적 결속력을 약화시켜 연쇄적인 이탈을 초래했다. 팔레스타인 아랍 사회에는 유대 기관(Jewish Agency)에 필적하는 통합된 정치 지도부가 없었다. 1930년대 대봉기 진압 과정에서 영국이 팔레스타인 아랍 지도부를 체계적으로 해체한 결과이기도 했다.

3. 귀환 불허 — 기정사실화

전쟁 중 그리고 전쟁 후, 이스라엘 정부는 떠난 아랍 주민의 귀환을 체계적으로 차단했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확인된 사실이다.

1948년 6월, 이스라엘 임시 정부는 귀환 불허 정책을 공식 채택했다. 벤구리온은 같은 해 “아랍인의 귀환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내각에서 발언했다. 비워진 아랍 마을의 건물은 파괴되거나 유대인 이민자의 주거지로 전환되었다. 경작지는 이스라엘 국가 소유 또는 유대인 정착민에게 이전되었다.

1950년, 이스라엘 의회(크네세트)는 부재자 재산법(Absentees’ Property Law)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1948년 11월 29일 이후 팔레스타인을 떠난(혹은 국내에서도 원래 거주지를 떠난) 사람의 재산을 ‘부재자 재산’으로 분류하고, 국가가 관리·처분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난민의 귀환과 재산 회복은 법적으로도 차단되었다.

4. 유엔 결의 194호와 귀환권 논쟁

1948년 12월 11일, 유엔 총회는 결의 194호를 채택했다. 이 결의의 11조는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귀환을 원하는 난민은 가능한 이른 시일 내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이웃과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허용되어야 하며, 귀환을 원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국제법의 원칙에 따라 그 재산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결의를 둘러싼 해석 논쟁은 70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 팔레스타인/아랍 측: 결의 194호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권(right of return)’을 확립한 국제법적 근거다. 이스라엘은 이를 이행할 의무가 있다.
  • 이스라엘 측: 총회 결의는 구속력이 없는 권고다. 또한 “이웃과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는” 조건이 붙어 있으므로 무조건적 귀환권이 아니다. 수백만 명에 달하는 난민 후손의 대규모 귀환은 유대 국가의 존립을 위협한다.

주목할 것은, 결의 194호 채택 당시 아랍 국가들이 이 결의에 반대표를 던졌다는 사실이다. 당시에는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난민 간의 ‘협상’을 전제로 한 결의를 수용할 수 없었다. 이후 아랍·팔레스타인 측은 입장을 바꿔 결의 194호를 핵심 근거로 원용하게 되었다.

제7장: 두 개의 서사 — 같은 사실, 다른 틀

1. 이스라엘의 서사: 독립과 생존

이스라엘의 전통적 국가 서사는 다음과 같은 뼈대를 가지고 있다.

기원과 정당성: 유대 민족은 고대 이스라엘 왕국 시대부터 이 땅과 역사적·종교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2,000년의 디아스포라(이산) 동안에도 유대인들은 이 땅과의 유대를 유지했고, 소규모이나마 항상 이 땅에 거주하는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 19세기 말 시온주의 운동은 박해받는 유대인의 민족 자결권을 실현하려는 정당한 움직임이었다.

홀로코스트와 도덕적 긴급성: 600만 유대인의 학살은 유대 국가의 필요성을 돌이킬 수 없이 증명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유대인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했으므로, 유대인 스스로의 국가만이 이러한 재앙의 반복을 막을 수 있다.

전쟁과 방어: 유대인은 유엔의 분할안을 수용했지만 아랍 측이 거부하고 전쟁을 시작했다. 독립 직후 다섯 아랍 국가의 침공을 받았으나 기적적으로 생존했다. 이것은 약자의 방어전이자 생존 전쟁이었다.

난민 문제: 전통적 이스라엘 서사에서 팔레스타인 난민은 전쟁의 불가피한 부산물이다. 아랍 지도자들이 전쟁을 시작했고, 일부는 주민에게 떠나라고 명령했다. 이스라엘은 잔류한 아랍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또한 아랍 국가들에서 추방당한 약 80만~85만 명의 유대인(‘미즈라히’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이주한 사실도 고려되어야 한다(사실상 ‘인구 교환’).

2. 팔레스타인의 서사: 상실과 부정의

팔레스타인의 서사는 근본적으로 다른 전제에서 출발한다.

원주민의 권리: 팔레스타인 아랍 주민은 수세기 동안 이 땅에 살아온 원주민이다.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하던 이들의 동의 없이, 외부 강대국(영국)의 약속(밸푸어 선언)에 의해 그들의 땅이 다른 민족에게 양도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식민주의의 한 형태다.

불의한 분할: 유엔 분할안은 인구의 33%인 유대인에게 영토의 56.5%를 주었다. 유대인 이민의 상당 부분은 위임통치 기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원주민의 의사에 반하여 진행되었다. 이러한 기정사실에 기초한 분할은 공정할 수 없다.

나크바는 계획적이었다: 팔레스타인 서사에서 나크바는 전쟁의 ‘부수적 피해’가 아니라 유대 국가의 인구학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의도적 추방이다. 달렛 작전, 데이르 야신 학살, 리다·라믈레 추방 등은 체계적 패턴의 일부다.

계속되는 부정의: 나크바는 1948년에 끝난 단일 사건이 아니라, 귀환 불허, 재산 몰수, 마을 파괴, 그리고 이후의 점령과 정착촌 건설로 이어지는 ‘진행형 나크바(ongoing Nakba)’다.

3. 신역사가들의 기여 — 신화의 해체

1980년대 이후, 이스라엘의 ‘신역사가(New Historians)’들은 30년 비밀 해제 규정에 따라 공개된 정부 문서를 분석하여 양측의 공식 서사 모두에 도전했다. 주요 수정 사항은 다음과 같다.

베니 모리스(Benny Morris):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를 처음 체계적으로 연구한 역사가. 1988년 출간한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의 탄생(The Birth of the Palestinian Refugee Problem)』에서 난민 발생의 원인이 복합적이었음을 밝혔다. 아랍 지도자의 ‘명령설’은 증거가 부족하며, 유대인 세력의 군사 작전이 주요 원인이었음을 문서로 입증했다. 다만 모리스는 2004년 개정판에서, 벤구리온이 체계적 추방을 ‘명령’하지는 않았으나 전장의 추방을 ‘묵인’하고 귀환을 ‘차단’했다고 분석했다.

일란 파페(Ilan Pappé): 더 급진적 입장에서 1948년 사건을 ‘민족 청소’로 규정했다. 2006년 저서 『팔레스타인의 민족 청소(The Ethnic Cleansing of Palestine)』에서 달렛 작전을 조직적 민족 청소 계획으로 해석했다. 파페의 분석은 팔레스타인 측 서사와 상당 부분 일치하지만, 다른 역사가들로부터 사료 해석의 과도한 선택성에 대해 비판을 받기도 한다.

아비 슐라임(Avi Shlaim): 압둘라 왕과 유대 기관 사이의 비밀 교섭을 밝혔다. 양측이 팔레스타인 아랍 국가의 탄생을 막기 위해 사실상 공모했다는 주장이다. 요르단이 서안지구를 병합하고, 이스라엘이 나머지를 갖는 ‘암묵적 합의’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신역사가들의 연구는 이스라엘 사회 내에서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다. 전통적 서사를 훼손한다는 비판, 자국의 건국 신화를 해체한다는 분노, 반대로 역사적 정직성의 용기라는 칭찬이 교차했다. 이들의 연구는 학문적 정밀함의 편차에도 불구하고, 1948년에 대한 이해를 결정적으로 풍부하게 만들었다.

제8장: 전쟁의 인적 비용

1. 인명 피해

1948년 전쟁의 인적 비용은 양측 모두에게 참혹했다.

  • 이스라엘 측: 약 6,373명 사망(전체 유대인 인구의 약 1%). 이 중 약 4,000명이 군인, 나머지가 민간인. 이스라엘은 이 전쟁을 ‘독립전쟁(מלחמת העצמאות)’이라 부른다.
  • 아랍 측(팔레스타인 및 아랍 국가 군대): 정확한 수치는 확인하기 어렵다. 추정치는 아랍 국가 정규군 약 7,000~10,000명, 팔레스타인 전투원과 민간인 수천 명. 전체적으로 1만~1만 5천 명 범위로 추산된다.
  • 난민: 70만~75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난민이 됨. 이스라엘에 남은 아랍인은 약 15만~16만 명.

2. 이스라엘에 남은 아랍인 — ’48 아랍인’

전쟁 후 이스라엘 국경 안에 남은 약 15만~16만 명의 아랍인은 이스라엘 시민권을 받았으나, 1966년까지 군사 정부(military administration) 아래 놓였다. 이들은 여행의 자유, 거주지 선택, 토지 소유 등에서 제약을 받았다. 군사 정부는 1966년에 해제되었고, 이후 이스라엘 내 아랍 시민(오늘날 약 200만 명, 이스라엘 인구의 약 21%)은 투표권과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나, 사실상의 차별과 불평등이 지속되고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3. 아랍 국가 내 유대인의 이탈

1948년 전쟁과 이스라엘 건국은 아랍·이슬람 국가에 거주하던 유대인 공동체에도 격변을 가져왔다. 이라크, 예멘, 이집트, 모로코, 리비아, 시리아, 튀니지 등에서 약 80만~85만 명의 유대인이 1948년부터 1970년대에 걸쳐 이주했다. 대부분이 이스라엘로 향했고, 일부는 프랑스 등 유럽으로 갔다.

이 이주의 성격도 논쟁 대상이다. 이스라엘 측은 아랍 국가의 박해와 추방에 의한 ‘유대인 나크바’라고 주장한다. 아랍 측은 이스라엘 정부(특히 모사드)가 아랍 국가 유대인의 이주를 의도적으로 촉진한 사례가 있다고 반박한다. 이라크의 경우, 1950~1951년 바그다드에서 유대인 대상 폭탄 테러가 발생했는데, 이것이 이라크 정부의 소행인지 이스라엘 공작원의 소행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결론이 나지 않았다. 사실은, 원인이 어디에 있든 수천 년 역사를 가진 중동 유대인 공동체가 사실상 소멸했다는 것이다.

제9장: 1948년 이후 — 만들어진 새로운 현실

1. 이스라엘 — 국가 건설과 대량 이민

신생 이스라엘은 즉각적인 과제에 직면했다. 가장 시급한 것은 인구였다. 1948년 약 80만 명이던 유대인 인구를 늘리기 위해 귀환법(Law of Return, 1950)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세계 어디에 있든 유대인이면 이스라엘에 이민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아랍 국가 출신 유대인, 동유럽 유대인이 대거 유입되어 1950년대 초반에 인구가 두 배로 증가했다.

비워진 아랍 마을과 도시의 가옥은 새 이민자의 주거지가 되었다. 야파의 아랍인 가옥에 예멘 유대인이 입주하고, 갈릴리의 아랍 마을 터에 새 유대인 정착촌이 세워졌다. 이 과정은 기존 아랍 주민의 귀환을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2. 팔레스타인 난민 — 임시가 영구가 되다

70만이 넘는 팔레스타인 난민은 주변 아랍 국가의 난민 캠프에 수용되었다. 유엔은 1949년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기관(UNRWA, United Nations Relief and Works Agency)을 설립하여 난민 지원을 담당하게 했다. ‘임시’ 기구로 설립된 UNRWA는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으며, 등록 난민 수는 후손을 포함하여 약 590만 명(2023년 기준)에 달한다.

난민 캠프는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서안지구, 가자 지구에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텐트촌이었던 캠프가 점차 콘크리트 건물로 바뀌었지만, ‘임시’라는 명목은 유지되었다. 난민들은 집 열쇠를 간직한 채 귀환의 날을 기다렸고, 이 열쇠는 팔레스타인 정체성의 상징이 되었다.

각 수용국에서의 난민 처우는 달랐다.

  • 요르단: 유일하게 팔레스타인 난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한 아랍 국가. 인구의 절반 이상이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정치적 긴장도 있었다(1970년 ‘검은 9월’ 사태).
  • 레바논: 종파 균형을 우려하여 시민권 부여를 거부. 난민은 특정 직업에서 배제되고 부동산 소유가 제한되었다. 캠프는 사실상의 게토가 되었다.
  • 시리아: 시민권은 부여하지 않았으나 비교적 광범위한 사회적 권리를 보장했다. 2011년 시리아 내전은 팔레스타인 난민에게 ‘이중 난민’의 비극을 안겼다.
  • 가자 지구: 이집트 관할 아래 난민 캠프가 밀집. 1967년 이스라엘 점령 이후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3. 아랍 세계의 충격 — ’48년의 트라우마’

1948년의 패배는 아랍 세계 전체에 심대한 정치적 충격을 주었다. 기존의 아랍 왕정·보수 정권은 패전의 책임을 추궁받았다.

  • 이집트: 1952년,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파루크 왕을 축출했다. 가말 압델 나세르가 권력을 장악하며 ‘아랍 민족주의’의 시대가 열렸다. 나세르의 부상은 1948년 패전과 직결된다.
  • 시리아: 1949년에만 세 차례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후 수십 년간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었다.
  • 요르단: 압둘라 왕은 서안지구를 병합하여 영토를 확대했으나, 1951년 예루살렘의 알아크사 모스크에서 팔레스타인인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스라엘과의 비밀 교섭이 ‘배신’으로 인식된 결과였다.
  • 이라크: 패전의 치욕이 1958년 하심 왕조 타도 혁명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처럼 1948년 전쟁은 패전 당사국들의 정치 체제까지 뒤흔들었다. 그리고 이 정치적 격변은 다시 아랍-이스라엘 분쟁의 다음 장(1956년 수에즈 위기, 1967년 6일 전쟁)으로 이어진다.

제10장: 1948년의 유산 — 풀리지 않은 매듭

1. 난민 문제의 고착화

2026년 현재,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는 난민 위기다. UNRWA에 등록된 난민은 약 590만 명으로, 원래 난민(1948년 이탈자)의 후손 대부분이 포함된다. 이스라엘은 대규모 귀환을 거부하고 있고, 아랍 수용국 중 요르단을 제외하면 시민권 부여에 소극적이며, 국제사회는 해결 방안에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

난민 문제가 고착된 데에는 양측의 요인이 있다. 이스라엘은 유대 국가의 인구학적 특성 유지를 이유로 귀환을 거부한다. 일부 아랍 국가는 이스라엘에 대한 정치적 압력 카드로 난민의 ‘임시’ 지위를 유지해왔다는 비판을 받는다. 팔레스타인 난민 자신은 어디에서도 완전한 시민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떠 있는 존재’로 세대를 이어왔다.

2. 기억의 전쟁

1948년은 사실의 영역만큼이나 기억의 영역에서 중요하다. 양측은 자신의 서사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이스라엘에서는 매년 욤 하아츠마우트(독립기념일)를 축하하되, 그 전날은 욤 하지카론(전몰장병 추모일)으로 기린다. 슬픔에서 기쁨으로의 극적 전환이 국가 서사의 핵심 구조다.

팔레스타인에서는 매년 5월 15일을 나크바의 날로 기억한다. 검은 옷, 열쇠 모형, 옛 마을의 이름을 적은 표지판이 시위와 기념 행사에 동원된다. 2011년 이스라엘 의회는 나크바를 기념하는 기관에 대한 정부 지원을 삭감할 수 있는 ‘나크바 법’을 통과시켜 논란이 되었다.

양측의 교과서도 1948년을 전혀 다르게 서술한다. 이스라엘 교과서에 ‘나크바’라는 단어는 거의 등장하지 않거나 최근에야 일부 언급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교과서에서 이스라엘은 정당한 국가가 아닌 ‘식민 기획(colonial project)’으로 프레이밍된다. 상대방의 고통을 인정하는 것이 자신의 서사를 약화시킨다는 두려움이 양측 모두에 존재한다.

3.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1948년의 역사를 정직하게 마주하려면, 불편한 복수의 진실을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

  •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참극을 겪은 유대인에게 안전한 고향이 필요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 그 고향이 다른 사람들이 이미 살고 있던 땅에 세워졌고, 그 과정에서 대규모의 추방과 파괴가 발생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 아랍 국가들의 침공이 신생 이스라엘의 존립을 위협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 그 전쟁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민간인에 대한 체계적 폭력과 추방이 이루어졌다는 것도 사실이다.
  • 아랍 국가 내 유대인 공동체가 사실상 소멸한 것은 사실이다.
  • 팔레스타인 난민이 70년 넘게 귀환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사실들은 서로를 상쇄하지 않는다. 한쪽의 고통이 다른 쪽의 고통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1948년의 역사는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정리될 수 없으며, 바로 그 복잡성이 이 갈등을 세계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 중 하나로 만들고 있다.

나가며 — 끝나지 않은 1948년

1948년은 과거가 아니다. 그 해에 만들어진 현실 —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미해결의 국경, 예루살렘의 분쟁, 양측의 상처 — 은 모두 현재 진행형이다. 2026년 오늘도 가자와 서안에서 이 ‘끝나지 않은 1948년’의 여파가 매일의 뉴스를 만들고 있다.

역사가의 임무는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밝히고, 각 사실이 어떤 맥락에서 발생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시리즈에서 그 원칙을 지키며 걸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다음 47화에서는 1948년 이후 중동을 뒤흔든 아랍 민족주의의 부상과 나세르의 시대를 다룬다. 1948년의 패배가 어떻게 아랍 세계의 정치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어떻게 다음 전쟁(1956년 수에즈, 1967년 6일 전쟁)의 씨앗을 뿌렸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이미지는 Leonardo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이미지는 Claude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 시리즈: 중동의 역사 (총 52화 중 4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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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역사] 46/52화: 이스라엘 건국과 나크바: 1948년 같은 날 갈린 두 민족의 역사”에 대한 2개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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