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 지도 위의 자(尺)가 결정한 민족의 운명
지난 42화에서 우리는 사이크스-피코 협정과 밸푸어 선언이라는 두 개의 비밀스러운 약속이 어떻게 중동의 미래를 설계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영국의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조르주-피코가 지도 위에 자를 대고 그은 선은 아직 잉크가 마르기도 전이었지만, 그 선이 현실의 국경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1920년부터 1940년대까지 이어진 위임통치(Mandate) 시대는 중동 현대사의 가장 결정적인 시기 중 하나입니다. 이 시기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국경선이 그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국경선은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의 의사와는 거의 무관하게, 런던과 파리의 외교관들이 자국의 전략적 이익을 계산하며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중동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갈등 — 이라크의 종파 분쟁, 시리아 내전, 레바논의 만성적 정치 위기, 쿠르드족의 독립 열망,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 의 뿌리를 추적하면, 우리는 어김없이 이 위임통치 시대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번 43화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어떻게 중동의 지도를 다시 그렸는지, 그리고 그 지도가 1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어떤 유산을 남기고 있는지를 꼼꼼히 살펴보겠습니다.

제1장 — 위임통치란 무엇이었나: 국제연맹의 이상과 현실
1-1. 윌슨의 이상주의와 ‘위임통치’라는 타협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세계는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그해 1월 발표한 ’14개 조항’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했습니다. 모든 민족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원칙이었습니다. 특히 12번째 조항은 오스만 제국 치하의 비(非)튀르크 민족들에게 “자치적 발전의 확실한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과 달랐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전쟁 중에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통해 오스만 영토를 분할하기로 약속한 상태였습니다. 노골적인 식민지 분할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정면으로 충돌했기에, 양측은 절묘한 타협안을 고안해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위임통치(Mandate)** 제도였습니다.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서 탄생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규약 제22조는 위임통치의 법적 근거를 제공했습니다. 이 조항의 핵심 논리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아직 스스로를 통치할 능력이 없는 민족들에게는 문명국가가 후견인 역할을 해야 한다.” 즉, 식민지배가 아니라 ‘교육’이자 ‘보호’라는 명분이었습니다.
위임통치는 세 가지 등급(Class A, B, C)으로 나뉘었습니다. 옛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역은 **A등급**으로 분류되었는데, 이는 “독립국으로서의 존재를 잠정적으로 인정하되,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위임통치국의 행정적 조언과 지원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론적으로 A등급 위임통치는 ‘일시적’ 성격이었고, 궁극적으로 해당 지역의 독립을 목표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종이 위의 이상이었습니다. 현실에서 위임통치는 식민지배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했습니다. 위임통치국은 해당 지역의 외교·군사·경제 정책을 사실상 전면 통제했고, ‘독립’의 시점은 위임통치국이 결정했습니다. 중동의 아랍인들은 이를 즉각 간파했습니다. 시리아의 민족주의 지도자 라시드 리다는 “위임통치란 식민지배에 예의 바른 옷을 입힌 것에 불과하다”고 일갈했습니다.
1-2. 산레모 회의 — 분할의 확정
위임통치의 구체적인 배분은 1920년 4월 이탈리아 산레모에서 열린 연합국 최고회의에서 확정되었습니다. 이 회의는 중동 현대사의 결정적 전환점 중 하나였습니다.
산레모 회의의 핵심 결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영국은 메소포타미아(이라크)와 팔레스타인(트란스요르단 포함)의 위임통치권을 획득
- 프랑스는 시리아(레바논 포함)의 위임통치권을 획득
-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에는 밸푸어 선언의 내용이 공식적으로 포함됨
이 결정이 내려질 때, 해당 지역 주민들의 의사는 사실상 무시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정부가 파견한 킹-크레인 위원회(King-Crane Commission)는 이미 1919년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주민들을 직접 방문하여 그들의 의사를 조사한 바 있었습니다. 위원회의 결론은 명확했습니다: 시리아 주민의 압도적 다수는 프랑스의 위임통치를 거부하며 미국이나 영국의 한시적 지원 아래 독립을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대규모 시온주의 이민에 대한 강한 반대 의사가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킹-크레인 보고서는 무시되었습니다. 미국은 윌슨의 병환과 의회의 고립주의 흐름 속에서 국제연맹 자체에 가입하지 않기로 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자신들의 계획을 밀고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산레모 회의의 결정은 1922년 국제연맹 이사회에서 공식 승인되었고, 1923년 9월 29일 위임통치령이 정식으로 발효되었습니다.
1-3. 파이살의 시리아 왕국 — 120일의 꿈
위임통치가 확정되기 전, 중동에서는 독자적인 국가 건설의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 파이살 이븐 후세인이 있었습니다. 파이살은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의 셋째 아들로,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의 T. E. 로렌스(아라비아의 로렌스)와 함께 아랍 반란을 이끈 인물이었습니다.
1918년 10월, 파이살의 아랍군은 영국군과 함께 다마스쿠스에 입성했습니다. 이후 파이살은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하는 아랍 왕국의 수립을 추진했습니다. 1920년 3월 8일, 시리아 민족회의(Syrian National Congress)는 파이살을 시리아 왕으로 선포했습니다. 이 ‘시리아’는 오늘날의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 요르단을 포함하는 대(大)시리아(Greater Syria)의 개념이었습니다.
파이살의 왕국은 아랍 민족주의의 희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꿈은 120일밖에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프랑스는 산레모 회의에서 시리아에 대한 위임통치권을 확보한 후, 즉각 군사 행동에 나섰습니다. 프랑스군 사령관 앙리 구로 장군은 파이살에게 최후통첩을 보냈고, 파이살이 이를 수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진격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20년 7월 24일, 마이살룬 전투(Battle of Maysalun)가 벌어졌습니다. 다마스쿠스 서쪽 마이살룬 고개에서 유세프 알-아즈마 국방장관이 이끄는 소규모 시리아군은 프랑스 정규군에 맞서 장렬히 싸웠지만, 장비와 병력의 압도적 열세를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알-아즈마는 전사했고, 프랑스군은 이틀 뒤 다마스쿠스에 입성했습니다. 파이살은 추방당했습니다.
마이살룬 전투는 아랍 민족주의 역사에서 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시리아에서 7월 24일은 아직도 추모의 날이며, 알-아즈마는 외세에 맞서 싸운 민족 영웅으로 기려지고 있습니다. 이 전투는 아랍인들에게 하나의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민족자결이란 강대국이 허락할 때만 가능한 것이라는 쓰라린 현실이었습니다.
제2장 — 프랑스 위임통치: 시리아와 레바논의 분리
2-1. ‘분할하여 통치하라’ — 프랑스의 시리아 운영
프랑스는 시리아 위임통치에 전형적인 ‘분할 통치(divide and rule)’ 전략을 적용했습니다. 1920년부터 1922년 사이에 프랑스는 시리아를 여러 개의 분리된 행정 단위로 쪼갰습니다. 이 분할의 기준은 주로 종교와 종파였습니다.
- 다마스쿠스 국가(State of Damascus): 내륙의 수니파 다수 지역
- 알레포 국가(State of Aleppo): 북부의 수니파 다수 지역
- 알라위 국가(State of the Alawites): 서북부 해안 산악지대, 알라위파 소수가 다수인 지역
- 자발 드루즈 국가(State of Jabal Druze): 남부 산악지대, 드루즈파 소수가 다수인 지역
- 알렉산드레타 산작(Sanjak of Alexandretta): 튀르크계 인구가 상당수인 북서부 항구 지역
- 대레바논(Grand Liban/Greater Lebanon): 마론파 기독교인이 다수인 지역 + 확장 영토
이 분할에는 명확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습니다. 단일한 아랍 민족주의 운동이 형성되는 것을 막고, 각 종파 공동체를 서로 견제하게 만들어 프랑스의 통제를 용이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소수 종파인 알라위파, 드루즈파, 마론파 기독교인들에게 자치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이들을 수니파 다수에 대한 ‘방파제’로 활용했습니다.
프랑스의 시리아 통치 방식은 매우 직접적이었습니다. 영국이 이라크에서 간접 통치를 시도한 것과 달리, 프랑스는 시리아에 직접적인 행정 통제를 가했습니다. 프랑스인 관료들이 핵심 행정직을 차지했고, 아랍어 대신 프랑스어가 공식 행정 언어로 사용되었습니다. 프랑스 군대가 전국에 배치되었고,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은 가차 없었습니다.
프랑스의 분할 통치 전략은 흥미롭게도 시리아의 종파적 정체성을 오히려 강화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았습니다. 프랑스 통치 이전에 알라위파나 드루즈파의 정체성은 지역적·부족적 성격이 강했지만, 프랑스가 이들에게 별도의 행정 단위와 군사 조직을 부여하면서 종파적 정체성이 ‘정치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훗날 시리아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특히 프랑스가 알라위파 청년들을 적극적으로 군에 편입시킨 것은, 수십 년 뒤 알라위파 출신의 하페즈 알-아사드가 군사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토양이 되었습니다.
2-2. 대(大)레바논의 창설 — 인위적 국가의 탄생
프랑스 위임통치의 가장 결정적인 결정 중 하나는 1920년 9월 1일 ‘대레바논(Grand Liban)’의 선포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레바논 국가의 직접적인 기원입니다.
역사적으로 ‘레바논’이라는 개념은 레바논 산맥의 마론파 기독교인 공동체를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스만 시대에 레바논 산악지대는 특별 자치 지역(무타사리피야)으로 존재했으며, 그 경계는 비교적 좁았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마론파 기독교인들이 확실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마론파 기독교인 지도자들의 요청과 자국의 전략적 이익을 결합하여, 이 작은 산악 자치지역을 훨씬 넓은 영토로 확장했습니다. 대레바논에는 베이루트 시, 트리폴리 시, 시돈 시, 베카 계곡, 그리고 남부 레바논이 포함되었습니다. 이 확장된 영토에는 수니파 무슬림, 시아파 무슬림, 드루즈파 등 비기독교 인구가 대거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결정의 논리는 이랬습니다. 프랑스는 중동에서 기독교인의 ‘보호자’ 역할을 자임하고 있었고, 마론파 공동체는 프랑스와 수세기에 걸친 문화적·종교적 유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론파 지도자들은 독립 국가의 형태로 자신들의 공동체를 보호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좁은 산악지대만으로는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었기에, 비옥한 농경지(베카 계곡)와 주요 항구도시(베이루트, 트리폴리, 시돈)를 포함하는 확장된 영토를 요구했습니다.
문제는 영토 확장이 인구 구성의 근본적 변화를 수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좁은 레바논 산악지대에서 마론파는 확실한 다수였지만, 대레바논에서는 간신히 상대적 다수를 유지하는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1932년에 실시된 인구 조사(레바논 역사상 유일한 공식 인구 조사)에서도 기독교인은 전체 인구의 약 51%에 불과했고, 이마저도 조사 방법론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 인구학적 모순은 레바논 정치 시스템의 태생적 불안정성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1943년 독립 시 수립된 ‘국민협약(National Pact)’은 종파별 권력 배분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 대통령은 마론파, 총리는 수니파, 국회의장은 시아파가 맡는 식이었습니다. 이 시스템은 1932년 인구 조사의 종파별 비율에 기반한 것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 인구 비율은 크게 변했지만 정치 시스템은 고정된 채 남아 있었습니다. 이 괴리는 결국 1975년부터 1990년까지 15년간 이어진 레바논 내전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2-3. 1925년 대(大)시리아 반란 — 드루즈의 봉기
프랑스의 분할 통치에 대한 가장 큰 저항은 1925년에 폭발했습니다. 이 반란은 자발 드루즈 지역에서 시작되었지만, 곧 시리아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반란의 직접적 원인은 프랑스 위임통치 당국의 오만과 무능이었습니다. 자발 드루즈의 프랑스 총독 가브리엘 카르비예 대위는 드루즈 지도자들을 공개적으로 모욕하고, 강제 노역을 부과하며, 드루즈 사회의 전통과 관습을 무시했습니다. 드루즈 지도자 술탄 알-아트라쉬는 프랑스 당국에 여러 차례 불만을 제기했지만 무시당했고, 결국 1925년 7월 무장 봉기를 선언했습니다.
반란은 처음에는 드루즈의 지역적 저항으로 시작되었지만,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합류하면서 반(反)프랑스 민족 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1925년 10월, 반란은 다마스쿠스까지 확산되었습니다. 다마스쿠스의 구시가지에서 시가전이 벌어졌고, 프랑스군은 이에 대해 도시 전체에 대한 포격을 감행했습니다. 1925년 10월 18일의 다마스쿠스 포격은 국제적 비난을 받았지만, 프랑스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반란은 1927년까지 약 2년간 계속되었으며, 프랑스는 막대한 군사력을 동원해 진압했습니다. 프랑스는 6만 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했고, 항공기를 이용한 폭격까지 실시했습니다. 반란 과정에서 수천 명의 시리아인이 사망했고, 다마스쿠스와 여러 도시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비록 군사적으로는 실패했지만, 대시리아 반란은 중요한 정치적 유산을 남겼습니다. 프랑스는 이후 통치 방식을 일부 조정하여 시리아에 제한적 자치를 허용하기 시작했고, 시리아 민족주의 운동은 더욱 조직화되었습니다. 1928년에는 시리아 제헌의회가 소집되어 헌법 초안을 작성했는데, 이 헌법은 대시리아(레바논, 팔레스타인 포함)의 통일과 위임통치 거부를 선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당연히 이를 거부했습니다.
2-4. 알렉산드레타 문제 — 프랑스가 튀르키예에 넘긴 시리아 영토
프랑스 위임통치 시기의 또 다른 중요한 영토 문제는 알렉산드레타 산작(오늘날 튀르키예의 하타이 주)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시리아 위임통치령의 일부로 배정되었지만, 튀르크계 인구가 상당수(약 40%)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1930년대 후반, 유럽에서 전운이 감돌면서 프랑스는 튀르키예와의 관계 유지가 전략적으로 중요해졌습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튀르키예는 알렉산드레타에 대한 영유권을 지속적으로 주장했고, 프랑스는 이를 수용하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1938년, 프랑스와 튀르키예의 합의 하에 알렉산드레타는 ‘하타이 공화국’이라는 독립 국가가 되었다가, 1939년 6월에 주민 투표를 거쳐 튀르키예에 편입되었습니다. 이 투표 과정은 논란이 많았습니다. 튀르키예가 대규모 튀르크계 인구를 이주시켜 투표 결과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투표 이후 아랍계와 아르메니아계 주민 수만 명이 시리아로 피난했습니다.
시리아는 이 영토 이전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시리아의 공식 지도에는 오랫동안 하타이 주가 시리아 영토로 표시되었으며, 이 문제는 시리아-튀르키예 관계의 만성적 갈등 요인이 되었습니다. 위임통치국인 프랑스가 자국의 전략적 이익을 위해 위임통치 대상 국가의 영토를 제3국에 넘겨버린 이 사례는, 위임통치 제도의 본질 — 결국 강대국의 이익을 위한 도구 — 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제3장 — 영국 위임통치 (1): 이라크의 인위적 탄생
3-1. 세 개의 빌라예트, 하나의 나라
오늘날의 이라크는 오스만 제국 시대에 세 개의 별도 행정 구역(빌라예트, vilayet)이었습니다:
- 바스라 빌라예트: 남부, 시아파 아랍인 다수
- 바그다드 빌라예트: 중부, 수니파 아랍인 다수(하지만 시아파도 상당수)
- 모술 빌라예트: 북부, 쿠르드족 다수 + 튀르크멘, 아시리아 기독교인, 아랍인 혼재
이 세 빌라예트는 역사적으로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통합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문화적으로도 이질적이었습니다. 남부의 시아파 부족사회, 중부의 수니파 도시 엘리트, 북부의 쿠르드 산악 부족은 서로 다른 언어, 관습, 정치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스만 시대에도 이 세 지역은 각각 별도의 총독이 다스렸습니다.
그렇다면 영국은 왜 이 세 빌라예트를 하나의 나라로 묶었을까요? 여기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석유입니다. 모술 빌라예트의 키르쿠크 지역에 막대한 석유 매장이 확인되었습니다. 영국은 이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모술을 반드시 자국의 영향권에 넣어야 했습니다. 모술만 별도의 단위로 남기면 프랑스나 (전쟁 전 광업 이권을 가지고 있던) 독일의 영향력이 재침투할 여지가 있었기에, 바그다드-바스라와 묶어 단일 위임통치령으로 만든 것입니다.
둘째, 전략적 완충 지대입니다. 영국에게 이라크는 인도로 가는 길목의 핵심 거점이었습니다. 페르시아만에서 인도양으로 이어지는 해상 루트와, 이란·러시아 세력에 대한 육상 완충 지대로서의 역할이 중요했습니다. 단일한 ‘이라크’가 분열된 소국들보다 이 역할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셋째, 행정적 편의입니다. 영국은 이미 전쟁 중에 인도군을 동원하여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점령했고, 단일한 군사 행정 체계를 구축한 상태였습니다. 이를 분리하기보다는 유지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이라크’라는 국가는 태생적으로 심각한 내적 모순을 안고 있었습니다. 인구의 약 60%를 차지하는 시아파 아랍인, 약 20%의 수니파 아랍인, 약 17%의 쿠르드족(대부분 수니파이지만 민족적 정체성이 더 강함), 그리고 튀르크멘, 아시리아 기독교인, 야지디 등 소수 집단이 하나의 국경 안에 모여 있었지만, 이들을 묶어주는 ‘이라크 국민’으로서의 공유된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3-2. 1920년 이라크 반란 — 최초의 대규모 저항
영국의 이라크 지배에 대한 첫 번째 대규모 저항은 위임통치가 공식화되기도 전인 1920년 여름에 발생했습니다. ‘1920년 이라크 반란(ثورة العشرين)’이라 불리는 이 봉기는 이라크 현대사의 기원적 사건 중 하나입니다.
반란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습니다. 첫째, 영국이 전쟁 중 아랍인들에게 약속한 독립이 위임통치로 둔갑한 것에 대한 분노가 있었습니다. 둘째, 영국의 직접 군사 행정이 현지 부족 지도자들의 권위와 관습을 무시한 것에 대한 반발이 있었습니다. 셋째, 시리아에서 파이살이 왕으로 선포된 소식이 이라크의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했습니다.
반란은 1920년 6월 중부 이라크의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시작되어 빠르게 남부와 중부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주목할 점은 이 반란에서 수니파와 시아파가 연대했다는 것입니다. 바그다드의 수니파 울라마와 남부의 시아파 성직자들이 공동으로 반영국 운동을 호소했고, 수니파와 시아파 모스크에서 번갈아 합동 집회가 열렸습니다. 이 종파 간 연대는 이라크 민족주의의 초기 발현이자, 공동의 적 앞에서 종파적 차이가 일시적으로 뒷전으로 밀린 사례였습니다.
영국은 반란 진압에 막대한 비용을 치렀습니다. 약 10만 명의 영국·인도 병력이 동원되었고, 반란 진압에만 약 4천만 파운드(당시 영국 재정에 상당한 부담)가 소요되었습니다. 영국군 사상자는 약 2,000명, 이라크 측 사상자는 약 8,400명 이상으로 추산됩니다. 특히 영국은 이라크에서 최초로 항공기를 이용한 공중 폭격을 민간인 지역에 대해 실시했는데, 이는 식민지 반란 진압에 공군력을 사용한 초기 사례 중 하나였습니다.
영국의 식민 장관 윈스턴 처칠은 이라크에서의 막대한 비용에 경악했고, 이를 계기로 이라크의 통치 방식을 직접 군사 행정에서 간접 통치로 전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이 파이살의 이라크 왕 즉위로 이어지게 됩니다.
3-3. 파이살의 이라크 왕국과 ‘카이로 회의’
1921년 3월, 처칠이 주재한 카이로 회의(Cairo Conference)는 영국의 중동 정책을 재편하는 자리였습니다. 이 회의에는 T. E. 로렌스, 거트루드 벨(Gertrude Bell) 등 중동 전문가들이 참석했습니다.
카이로 회의의 핵심 결정은 프랑스에 의해 시리아에서 쫓겨난 파이살을 이라크의 왕으로 앉히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여러 의도가 복합된 결정이었습니다. 영국은 파이살에게 시리아에서의 배신에 대한 일종의 보상을 해줌으로써 아랍 세계에서의 신뢰를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동시에 파이살이라는 합법적 권위를 가진 아랍 군주를 내세워 간접 통치의 비용을 줄이려 했습니다.
1921년 8월, 이라크에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고, 파이살은 96%의 찬성으로 이라크 왕에 선출되었습니다. 물론 이 투표는 영국이 철저히 관리한 것으로, 다른 후보가 사실상 없는 상태에서의 일방적 추인이었습니다. 거트루드 벨은 당시의 상황을 “우리가 후보를 선택하고, 유권자들에게 동의를 구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기록했습니다.
파이살 1세의 이라크 통치(1921-1933)는 식민 권력과 민족 열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하는 과정이었습니다. 파이살은 형식적으로 주권 국가의 군주였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영국 고등판무관에게 있었습니다. 1922년의 영-이라크 조약은 이 관계를 공식화했는데, 이라크는 외교·국방·재정 등 핵심 영역에서 영국의 ‘자문’을 받아야 했고, 이 ‘자문’은 사실상 명령이었습니다.
파이살은 이 상황에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이라크의 국가 건설을 추진했습니다. 근대적 관료제를 정비하고, 교육 제도를 확충하며, 국민 통합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영국이 만들어놓은 이라크의 구조적 문제 — 소수 수니파 엘리트의 과대 대표, 시아파 다수의 정치적 소외, 쿠르드족의 자치 요구 — 는 그의 능력으로 해결하기에는 너무 깊은 것이었습니다.
파이살 1세는 1933년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는데,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이라크라는 국가는 있지만 이라크 국민은 아직 없다(There is still no Iraqi people but unimaginable masses of human beings, devoid of any patriotic idea).” 이 한 문장은 위임통치가 만든 인위적 국가의 본질적 딜레마를 정확히 포착하고 있습니다.
3-4. 이라크의 ‘독립’과 영국의 그림자
이라크는 1932년 10월 국제연맹에 정식 가입하며 형식적 독립을 달성한 최초의 위임통치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독립’은 실질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독립 직전인 1930년에 체결된 영-이라크 동맹 조약은 영국에 다음과 같은 권한을 보장했습니다: 이라크 내 두 곳의 공군 기지 사용권, 전시에 이라크 군사시설과 영토의 자유로운 사용, 무기 판매 독점권 등. 이라크의 외교 정책은 사실상 영국과의 협의를 통해 결정되었고, 이라크군의 훈련과 장비는 영국이 담당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독립 이후 이라크의 내적 갈등이 본격화되었다는 것입니다. 1933년에는 아시리아 기독교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시멜레 학살)이 발생했고, 쿠르드족의 반란은 반복되었습니다.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1936년에는 바크르 시드키 장군이 이라크 역사상 최초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후 이라크는 쿠데타와 반쿠데타의 악순환에 빠져들었습니다.
영국이 만들어놓은 이라크의 구조적 문제 — 인위적 국경 안에 묶인 이질적 공동체들, 소수 수니파의 지배 구조, 쿠르드족 자치 문제, 석유를 둘러싼 이해관계 — 는 독립 이후에도 해결되지 않은 채 증폭되었고, 이는 20세기 후반과 21세기까지 이라크 비극의 구조적 원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제4장 — 영국 위임통치 (2): 팔레스타인과 트란스요르단
4-1.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 양립 불가능한 약속의 충돌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는 중동의 모든 위임통치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가장 폭발적인 유산을 남긴 것이었습니다. 그 근본 원인은 영국이 같은 땅에 대해 양립 불가능한 두 가지 약속을 동시에 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영국은 1915-1916년 후세인-맥마흔 서한을 통해 아랍인들에게 독립 아랍 국가를 약속했습니다(팔레스타인의 포함 여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지만, 아랍 측은 포함으로 해석). 다른 한편으로 1917년 밸푸어 선언을 통해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에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국제연맹이 승인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의 공식 문서에는 밸푸어 선언의 내용이 전문(前文)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즉, 위임통치의 목적 자체가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의 고향을 건설하는 것”으로 명시된 것입니다. 동시에 위임통치 조항은 “팔레스타인의 비유대인 주민들의 시민적·종교적 권리가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고도 규정했습니다. 이 두 목표가 장기적으로 양립 가능하다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위임통치 초기인 1920년대에 유대인 이민이 본격화되면서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습니다. 1917년 밸푸어 선언 당시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는 전체의 약 8%(약 56,000명)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위임통치 기간 동안 대규모 이민이 이루어져, 1931년에는 약 17%(175,000명), 1939년에는 약 30%(약 450,000명)까지 증가했습니다.
유대인 이민자들은 유럽에서 자본과 기술을 가지고 왔고, 체계적으로 토지를 구입하여 공동체(이슈브, Yishuv)를 확장해갔습니다. 시온주의 기관들 — 유대기관(Jewish Agency), 유대국민기금(JNF) 등 — 은 사실상 ‘국가 안의 국가’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자체적인 교육 체계, 의료 체계, 노동 조합(히스타드루트), 준군사 조직(하가나)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아랍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러한 변화를 자신들의 존재 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했습니다. 토지 구입으로 인한 아랍 농민들의 퇴거, 유대인 노동 우선 고용 정책(히브리 노동), 증가하는 이민 물결은 아랍 주민들 사이에서 깊은 불안과 분노를 야기했습니다.
4-2. 팔레스타인의 폭발 — 1929년과 1936-1939년
팔레스타인에서의 아랍-유대 갈등은 위임통치 기간 동안 점점 격화되었습니다. 중요한 분기점이 된 사건들이 있습니다.
1929년 서쪽 벽(통곡의 벽) 폭동: 예루살렘의 서쪽 벽은 유대교와 이슬람 모두에게 성스러운 장소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고대 성전의 유일한 잔재이며, 무슬림들에게는 알-아크사 모스크와 바위의 돔이 있는 하람 알-샤리프(성전산)의 일부입니다. 1929년 8월, 이 장소를 둘러싼 종교적 긴장이 폭력 사태로 폭발했습니다. 헤브론에서는 유대인 67명이 학살당했고(헤브론 학살),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양측의 폭력이 이어졌습니다. 총 사망자는 유대인 133명, 아랍인 116명(대부분 영국군의 진압 과정에서)이었습니다.
1936-1939년 아랍 대반란(Great Arab Revolt):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기간의 가장 대규모 충돌이었습니다. 1936년 4월, 아랍 고위위원회(Arab Higher Committee)의 주도 아래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총파업이 선언되었습니다. 파업은 곧 무장 봉기로 발전했고, 3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아랍 반란군은 영국 군대 및 경찰, 유대인 정착촌을 공격했고, 한때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장악하기도 했습니다.
영국은 반란 진압에 2만 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했고, 가혹한 탄압 조치를 실시했습니다. 가옥 철거, 집단 처벌, 행정 구금, 사형 등이 광범위하게 시행되었습니다. 반란 과정에서 약 5,000명의 아랍인이 사망했고, 15,000명 이상이 부상했으며, 5,600명이 투옥되었습니다. 아랍 지도부는 와해되었고, 아랍 사회의 군사적·정치적 역량은 심각하게 약화되었습니다. 이 약화는 10년 뒤 1948년 전쟁에서 아랍 측의 취약성으로 직결됩니다.
반란 기간 중 영국은 필 위원회(Peel Commission, 1937)를 파견하여 상황을 조사했습니다. 필 위원회는 역사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랍인과 유대인의 열망은 근본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며, 유일한 해결책은 **분할(partition)** — 즉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와 유대 국가로 나누는 것 — 이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이는 ‘두 국가 해결(two-state solution)’ 개념의 최초의 공식적 제안이었습니다. 아랍 측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고, 시온주의 지도부는 원칙적으로 수용하되 구체적 경계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반란이 진행 중이던 1939년,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짙어지면서 영국은 정책을 급선회했습니다. 1939년 맥도날드 백서(White Paper)는 향후 5년간 유대인 이민을 75,000명으로 제한하고, 이후에는 아랍인의 동의 없이는 이민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또한 10년 내에 아랍인과 유대인이 공유하는 독립 팔레스타인 국가를 수립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했습니다. 이 백서는 시온주의 운동을 격분시켰고, 영국에 대한 유대 지하 무장 조직들의 저항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4-3. 트란스요르단 — 압둘라의 왕국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요르단 강 동쪽 지역, 즉 트란스요르단(Transjordan)의 분리였습니다. 이 결정은 오늘날의 요르단 왕국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원래 국제연맹이 승인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은 요르단 강 양쪽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21년, 파이살의 형 압둘라 이븐 후세인이 프랑스에 의해 쫓겨난 동생의 복수를 위해 시리아를 공격하겠다며 군대를 이끌고 트란스요르단으로 진군해 왔습니다.
영국은 이 상황을 독특한 방식으로 해결했습니다. 처칠은 카이로 회의에서 압둘라를 만나, 시리아 공격을 포기하는 대가로 트란스요르단의 통치권을 주겠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압둘라는 이를 수락했고, 트란스요르단 토후국(Emirate of Transjordan)이 탄생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1922년 영국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서 트란스요르단을 분리하여 밸푸어 선언의 적용 범위에서 제외시켰다는 것입니다. 즉, 요르단 강 동쪽에서는 유대인 이민과 정착이 허용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시온주의 지도부는 이를 강하게 비판했고, 수정주의 시온주의(Revisionist Zionism)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자보틴스키는 이를 “유대 민족 고향의 77%를 절단한 행위”라고 규탄했습니다.
트란스요르단은 위임통치 기간 내내 비교적 평온했습니다. 압둘라는 영국에 충실한 동맹이었고, 그의 통치 아래 트란스요르단은 작지만 안정적인 정치 단위로 발전했습니다. 영국의 지원으로 아랍 군단(Arab Legion)이라는 정예 군대가 창설되었는데, 이 군대는 영국인 장교 존 바고트 글럽(글럽 파샤)이 지휘하며 중동에서 가장 효과적인 아랍 군대 중 하나로 성장했습니다.
트란스요르단의 ‘창설’은 영국이 얼마나 즉흥적으로 중동의 지도를 그렸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요르단이라는 국가는 역사적 선례도, 자연적 국경도, 뚜렷한 민족적 정체성도 없는 상태에서 순전히 영국의 정치적 편의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처칠이 후에 농담처럼 말한 “일요일 오후에 펜 한 자루로 트란스요르단을 만들었다”는 일화는 과장이 섞여 있지만, 이 국가 창설의 즉흥적 성격을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제5장 — 잊힌 민족, 잊힌 약속: 쿠르드족과 기타 소수 집단
5-1. 쿠르드족 — 국가 없는 세계 최대 민족
위임통치 시대의 국경 획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집단 중 하나가 쿠르드족입니다. 쿠르드족은 약 3,000만~4,000만 명(추정치에 따라 다름)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국가 없는 민족’으로, 오늘날 튀르키예, 이라크, 이란, 시리아 4개국에 걸쳐 거주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쿠르드족의 독립 국가는 한때 국제적으로 약속된 적이 있었습니다. 1920년 8월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Treaty of Sèvres)은 오스만 제국의 해체를 규정하면서, 동부 아나톨리아의 쿠르드 거주 지역에 자치 쿠르드 국가의 수립을 예상하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조약 제62~64조는 쿠르드 자치 지역의 설정과, 이후 국제연맹에 독립을 청원할 수 있는 권리를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세브르 조약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튀르크 민족주의 운동이 승리하여 1923년 로잔 조약(Treaty of Lausanne)이 세브르 조약을 대체했는데, 로잔 조약에는 쿠르드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습니다. 쿠르드족의 독립 가능성은 외교 테이블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다.
영국도 쿠르드족의 독립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쿠르드족 거주 지역, 특히 모술과 키르쿠크에는 석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쿠르드족이 독립하면 이 석유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할 수 있다고 우려했고, 따라서 모술 빌라예트를 이라크에 포함시키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라크 내 쿠르드족은 처음부터 바그다드 중앙정부의 권위에 저항했습니다. 셰이크 마흐무드 바르진지는 1919년, 1922년, 1930년 세 차례에 걸쳐 쿠르드 독립 반란을 일으켰고, 매번 영국군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영국은 쿠르드 반란 진압에도 공중 폭격을 적극 활용했으며, 심지어 아서 “포격기” 해리스(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 도시 폭격으로 악명 높은)가 이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위임통치가 만든 국경은 쿠르드 민족을 네 나라로 분단시켰고, 이후 100년 동안 쿠르드족은 각 국가에서 차별과 탄압을 경험하면서도 국가 수립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라크에서의 안팔 작전(1988), 튀르키예에서의 PKK 무장투쟁, 시리아 내전에서의 로자바 자치 등, 쿠르드 문제는 오늘날에도 중동 정치의 가장 복잡한 난제 중 하나입니다.

5-2. 아시리아 기독교인의 비극
위임통치 시대의 국경 획정 과정에서 잊힌 또 다른 집단이 아시리아 기독교인(Assyrians)입니다. 아시리아인들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아시리아 제국의 후예를 자처하는 기독교 소수 집단으로,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만 제국에 의해 대규모 학살(아시리아 대학살/세이포)을 경험한 바 있었습니다.
전쟁 중 영국은 아시리아인들에게 자치 또는 보호를 약속하며 협력을 이끌어냈고, 아시리아인들은 영국군의 보조 부대로 복무했습니다. 위임통치 기간에도 아시리아인들은 영국이 조직한 ‘이라크 부대(Iraq Levies)’의 핵심 구성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라크가 1932년 독립하면서 아시리아인들의 처지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영국이 떠난 후 이라크 정부는 아시리아인들을 영국의 협력자이자 분리주의 세력으로 간주했습니다. 1933년 8월, 이라크군은 북부의 아시리아인 마을 시멜레(Simele)를 비롯한 여러 마을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수백에서 수천 명의 아시리아 민간인이 학살당했고(정확한 숫자는 논쟁 중), 수만 명이 시리아와 이란으로 도피했습니다.
시멜레 학살은 여러 면에서 중요한 사건입니다. 첫째, 이라크 ‘독립’ 후 영국이 약속한 소수 집단 보호가 무의미했음을 증명했습니다. 둘째, 이 학살을 지휘한 바크르 시드키 장군은 아시리아인 학살로 민족 영웅이 되었고, 이 인기를 바탕으로 1936년 쿠데타를 일으켜 이라크 역사상 최초의 군사 정권을 수립했습니다. 셋째, 시멜레 학살은 국제적으로도 주목을 받아, 라파엘 렘킨이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용어를 고안하는 데 영감을 준 사건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5-3. 알렉산드레타의 아르메니아인, 팔레스타인의 드루즈
위임통치의 국경선은 수많은 소수 집단의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알렉산드레타가 튀르키예에 편입되면서 그곳의 아르메니아인 공동체는 다시 한번 이산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1915-1923)의 생존자들 중 상당수가 프랑스 시리아 위임통치령의 알렉산드레타에 정착해 있었는데, 튀르키예 편입이 결정되자 대부분이 시리아와 레바논으로 재이주해야 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드루즈 공동체, 이라크의 야지디 공동체, 시리아의 이스마일파 등 크고 작은 종교·민족 집단들은 강대국이 그은 국경선에 의해 각자 다른 국가에 편입되었고, 새로운 국가에서 소수자로서의 불안정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제6장 — 석유와 이해관계: 위임통치 뒤의 경제적 논리
6-1. 석유가 국경을 결정하다
위임통치 시대의 국경 획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석유라는 요소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20세기 초, 석유는 군사력과 산업력의 핵심 자원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석유의 전략적 중요성을 실감한 영국은 중동의 석유 자원 확보를 최우선 전략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미 전쟁 전인 1912년, 오스만 제국 내의 석유 이권을 둘러싸고 영국, 독일, 네덜란드 등이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튀르크 석유 회사(Turkish Petroleum Company, TPC)가 설립되어 모술 빌라예트의 석유 개발권을 획득했는데, 이 회사의 지분은 영국계(앵글로-페르시안 석유 회사와 영국 투자자), 독일계(도이체 방크), 네덜란드계(로열 더치-셸)가 나눠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독일의 지분을 전쟁 배상으로 몰수하고 이를 프랑스에 넘겼습니다. 이것이 1920년 산레모 석유 협정(San Remo Oil Agreement)으로, 사이크스-피코 협정의 석유 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는 TPC(후에 이라크 석유 회사, IPC로 개명)의 독일 지분 25%를 획득하는 대가로 모술 빌라예트를 영국 위임통치령 이라크에 포함시키는 데 동의했습니다.
즉, 모술이 이라크의 일부가 된 것은 쿠르드족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석유 이권의 분배 결과였습니다. 국경은 민족이나 지리가 아닌 석유 파이프라인의 경로를 따라 그어진 것이었습니다.
6-2. ‘빨간 선’ 협정과 석유 카르텔의 탄생
석유와 국경의 관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1928년의 ‘빨간 선 협정(Red Line Agreement)’입니다. 이라크 석유 회사(IPC)의 주주들 —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의 석유 기업들 — 은 이 협정에서 옛 오스만 제국의 영토(튀르키예 본토와 이집트, 쿠웨이트를 제외한) 내에서는 IPC를 통해서만 석유를 개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IPC의 아르메니아계 사업가 칼루스테 굴벤키안이 회의석상에서 빨간 연필로 옛 오스만 제국의 국경을 지도 위에 그었다고 합니다. 이 ‘빨간 선’ 안에는 이라크, 시리아, 팔레스타인, 아라비아 반도(사우디아라비아의 대부분 포함)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빨간 선 협정은 중동 석유 산업의 구조를 수십 년간 규정했습니다. 서방 석유 기업들은 이 협정을 통해 중동의 석유 자원을 과점적으로 통제했고, 석유 생산국들은 이 카르텔에서 제한된 로열티만 받을 뿐 자국의 자원에 대한 실질적 통제권이 없었습니다. 이 구조는 1950년대부터 석유 국유화 운동이 시작되면서 도전받기 시작했고, 1960년 OPEC의 창설과 1970년대의 석유 국유화 물결로 최종적으로 해체되었습니다.
6-3. 걸프의 작은 국가들 — 석유 시대 이전의 국경
위임통치 시대에 영국은 걸프 지역의 작은 토후국들의 경계도 확정했습니다.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트루셜 국가들(오늘날의 UAE) 등은 이미 19세기부터 영국과 보호 조약을 맺고 있었지만,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1922년, 영국의 퍼시 콕스 고등판무관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이븐 사우드와 이라크의 국경을 확정하는 우까이르 의정서(Uqair Protocol)를 주도했습니다. 이 협상에서 콕스는 사실상 일방적으로 지도 위에 국경선을 그었는데, 이 과정에서 쿠웨이트의 영토 약 3분의 2가 이라크와 사우디아라비아에 할당되었습니다. 쿠웨이트 대표는 이 결정에 항의했지만 무시당했습니다.
이 시기에 확정된 국경선은 나중에 막대한 석유가 발견되면서 엄청난 경제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쿠웨이트-이라크 국경 분쟁은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의 배경 중 하나가 되었고, 걸프 소국들 간의 해상 경계 분쟁은 해저 유전의 관할권과 직결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7장 — 위임통치의 종말과 독립의 여명
7-1. 제2차 세계대전의 충격
제2차 세계대전은 위임통치 체제에 치명적 타격을 가했습니다.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 — 위임통치의 두 축 — 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켰고, 동시에 아랍 민족주의 운동에 새로운 동력을 제공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1940년 6월 독일에 항복한 후 시리아와 레바논은 비시 프랑스(나치 독일 협력 정부) 관할에 놓였습니다. 1941년 6월-7월, 영국군과 자유 프랑스군이 시리아·레바논에 진군하여 비시 프랑스군을 축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 샤를 드골은 시리아와 레바논의 독립을 약속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 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1943년, 레바논이 독립을 선포하고 프랑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헌법 개정을 단행하자, 프랑스는 레바논 대통령과 각료들을 체포·구금하는 극단적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 사건은 국제적 비난을 초래했고, 영국과 미국의 압력으로 프랑스는 구금자들을 석방해야 했습니다. 이후 레바논과 시리아의 독립은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 되었습니다.
이라크에서는 전쟁 초기인 1941년 4월, 라시드 알리 알-가일라니가 이끄는 친독일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습니다. 영국은 즉각 군사 개입하여 쿠데타를 진압하고 이라크를 재점령했습니다. 이 사건은 이라크의 ‘독립’이 얼마나 허구적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7-2. 각국의 독립 과정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위임통치 체제는 급속히 해체되었습니다. 각국의 독립 과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이라크: 1932년 형식적 독립(국제연맹 가입). 그러나 1958년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될 때까지 영국의 영향력이 지속.
- 레바논: 1943년 11월 22일 독립 선포, 1946년 프랑스군 완전 철수.
- 시리아: 1946년 4월 17일 프랑스군 완전 철수로 독립 달성. 매년 4월 17일을 독립기념일로 기념.
- 트란스요르단: 1946년 5월 25일 독립, 압둘라가 국왕으로 즉위. 국호는 ‘요르단 하심 왕국’으로 변경.
- 팔레스타인: 1948년 5월 14일 영국 위임통치 종료. 같은 날 이스라엘 독립 선포 → 제1차 중동전쟁 발발. 독립 아랍 팔레스타인 국가는 수립되지 못함.
이 독립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팔레스타인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위임통치 시대에 확정된 국경 그대로 독립했다는 것입니다.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꿈꾸던 통일 아랍 국가는 실현되지 못했고, 영국과 프랑스가 그은 인위적 국경선이 그대로 국제적으로 승인된 국경이 되었습니다.
7-3. 아랍 연맹의 창설과 그 한계
위임통치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분리된 아랍 국가들을 다시 묶어보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1945년 3월 22일 카이로에서 아랍 연맹(League of Arab States)이 창설된 것입니다. 창설 회원국은 이집트,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트란스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예멘 7개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랍 연맹은 처음부터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각국의 지도자들은 아랍 통합을 수사적으로 지지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국의 주권과 기득권을 양보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위임통치가 만든 국경선은 이미 각국 지배 엘리트의 권력 기반이 되어 있었기에, 국경의 해체는 곧 자신들의 권력 기반 해체를 의미했습니다.
아랍 연맹이 처음으로 집단 행동에 나선 것은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이었지만, 이 전쟁에서 아랍 측의 패배는 아랍 연맹의 무력함과 아랍 국가들 간의 분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각국은 팔레스타인 해방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영토적·전략적 이익을 추구했습니다. 요르단의 압둘라 왕은 팔레스타인에 독립 아랍 국가를 세우는 것보다 웨스트뱅크를 자국에 합병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고, 이집트, 시리아 등 다른 참전국들도 각자의 계산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제8장 — 직선 국경선의 유산: 100년 후의 중동
8-1. 인위적 국경이 남긴 구조적 모순
위임통치 시대에 그어진 국경선은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중동의 정치 지형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국경선이 남긴 구조적 모순을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국가와 민족의 불일치. 위임통치의 국경선은 민족·종교·부족의 경계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쿠르드족은 네 나라로 나뉘었고, 아랍인은 수십 개의 국가로 분산되었습니다. 각 국가 내에는 이질적인 집단들이 섞여 있어, 국민 정체성의 형성이 지속적인 도전이 되었습니다.
둘째, 소수파 지배 구조의 형성. 프랑스와 영국의 분할 통치 전략은 여러 국가에서 소수 집단이 권력을 장악하는 구조를 낳았습니다. 이라크에서는 인구의 약 20%에 불과한 수니파 아랍인이 2003년까지 지속적으로 권력을 독점했고, 시리아에서는 인구의 약 12%인 알라위파가 1970년부터 하페즈 알-아사드 가문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이러한 소수파 지배 구조는 다수파의 불만과 저항, 그리고 지배 소수파의 가혹한 탄압이라는 악순환을 초래했습니다.
셋째, 종파주의(sectarianism)의 정치화. 위임통치 이전에도 중동에 종교적·종파적 다양성은 존재했지만, 종파가 정치적 정체성의 핵심 축이 된 것은 위임통치 시대부터였습니다. 프랑스가 시리아를 종파별로 분할하고, 레바논에 종파 기반 정치 체제를 도입한 것, 영국이 이라크에서 수니파 엘리트를 우대하고 시아파 다수를 정치적으로 소외시킨 것 — 이러한 정책들이 종파적 정체성을 정치화하고 고착시켰습니다.
넷째, 자원의 불균등 배분. 위임통치의 국경선은 석유와 수자원 같은 핵심 자원의 분포와 관계없이 그어졌습니다. 어떤 나라는 막대한 석유를 가진 반면, 바로 이웃한 나라는 자원이 빈약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요르단 강의 수자원을 둘러싼 분쟁,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의 수량 배분 문제 등은 위임통치가 만든 국경의 직접적 유산입니다.
8-2. 사이크스-피코의 망령 — ISIS와 국경선의 도전
위임통치 국경선에 대한 가장 극적인 도전은 2014년 ISIS(이라크-시리아 이슬람 국가)의 등장으로 나타났습니다. ISIS의 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는 “사이크스-피코의 국경을 파괴한다”고 선언하며, 이라크와 시리아 사이의 국경선을 물리적으로 해체하는 퍼포먼스를 벌였습니다.
ISIS의 등장은 여러 면에서 위임통치 국경선의 실패를 상징합니다. 이라크의 수니파 아랍인들 — 2003년 미국의 침공 이후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탈바트화(de-Ba’athification)로 직업을 잃은 — 이 ISIS의 핵심 지지 기반이 되었습니다. 시리아에서는 내전으로 국가가 사실상 분열되면서 ISIS가 동부 시리아를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라크와 시리아의 수니파 지역을 아우르는 ISIS의 ‘영토’는, 사이크스-피코 이전에 이 지역이 하나의 문화적·사회적 공간이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ISIS는 군사적으로 패배했고, 이라크-시리아 국경은 복원되었습니다. 그러나 ISIS가 제기한 근본적 질문 — 위임통치의 국경선이 이 지역의 주민들에게 정당성을 가지는가? — 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8-3. 레바논의 만성적 위기
프랑스가 만든 대레바논의 유산은 오늘날 레바논의 만성적 정치 위기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습니다. 1943년의 국민협약에 기반한 종파 기반 권력 배분 시스템은 레바논 정치를 영구적으로 교착 상태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1975-1990년 레바논 내전은 이 시스템의 모순이 폭발한 결과였습니다. 내전을 종결한 1989년 타이프 협정은 종파 시스템을 수정했지만 폐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결과 레바논은 오늘날에도 효과적인 정부 구성, 대통령 선출, 기본적 공공 서비스 제공에 반복적으로 실패하고 있습니다. 2019년의 경제 위기와 2020년 베이루트 항구 폭발 사건은 이 구조적 실패의 극적인 표출이었습니다.
레바논의 비극적 아이러니는, 마론파 기독교인들이 프랑스에 요청하여 얻어낸 ‘대레바논’이 바로 그 마론파의 정치적 지배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확장된 영토에 포함된 무슬림 인구의 높은 출산율로 인해 기독교인은 이미 20세기 중반에 과반수를 잃었고, 이는 1975년 내전의 핵심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8-4. 이라크 — 끝나지 않는 통합의 도전
영국이 세 개의 빌라예트를 하나로 묶어 만든 이라크는 건국 이래 한 번도 진정한 국민 통합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수니파의 독점적 지배(왕정기, 바트당 시대), 쿠르드족의 반복적 반란(1961-1970, 1974-1975, 1980년대), 시아파의 저항과 탄압(1991 봉기) — 이 모든 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국가의 내적 모순이 표출된 것이었습니다.
사담 후세인의 바트당 정권(1968-2003)은 이 모순을 극단적 억압으로 관리했습니다. 쿠르드족에 대한 안팔 작전(1988, 화학무기 사용 포함), 시아파에 대한 체계적 탄압, 쿠웨이트 침공(1990, 쿠웨이트와의 국경 분쟁이 한 원인) —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위임통치가 만든 구조적 문제에서 파생된 것이었습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바트당 정권 붕괴 이후, 이라크는 종파 기반 민주주의로 전환했지만, 이는 종파 갈등을 제도화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쿠르드 자치구(KRG)는 사실상 독립 국가에 가까운 자치를 행사하고 있으며, 2017년에는 독립 국민투표까지 실시했습니다(이라크 중앙정부와 국제 사회의 반대로 독립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이라크가 하나의 국가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은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8-5. 시리아 — 분할의 그림자
프랑스가 시리아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었다가 다시 합친 역사는 시리아의 국가 정체성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2011년 시작된 시리아 내전에서 알라위파, 수니파, 쿠르드족, 드루즈파 등 각 공동체가 사실상 별도의 군사·정치 세력으로 활동한 것은, 프랑스가 구획한 종파별 행정 단위의 유령이 되살아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내전 중 시리아가 사실상 여러 개의 통제 영역으로 분할된 것 — 아사드 정부 통제 지역(서부, 알라위파 중심), 반군 통제 지역(북서부, 수니파 중심), 쿠르드 자치 지역(북동부), ISIS 통제 지역(동부) — 은 프랑스 위임통치 시대의 분할 지도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했습니다. 물론 이것이 프랑스 위임통치의 직접적 ‘결과’라고 단순화할 수는 없지만, 위임통치가 심어놓은 종파적 정치 구조가 이러한 분열의 토양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제9장 — 위임통치의 역사적 평가
9-1. ‘문명화의 사명’이라는 허구
위임통치의 공식적 명분은 ‘아직 스스로를 통치할 준비가 되지 않은 민족들을 교육하고 보호하여 궁극적으로 독립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유럽 제국주의의 오래된 정당화 논리인 ‘문명화의 사명(mission civilisatrice)’을 국제법적 외피로 포장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현실에서 위임통치국들은 해당 지역의 자립적 발전보다 자국의 전략적·경제적 이익을 일관되게 우선시했습니다. 석유 이권의 확보, 군사 기지의 유지, 지역 세력 균형의 관리 — 이것이 위임통치의 실질적 목표였습니다. 교육과 인프라 건설이 일부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위임통치 체제의 안정적 유지를 위한 것이지 해당 지역 주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국제연맹의 위임통치위원회(Permanent Mandates Commission)가 존재하여 이론적으로 위임통치의 감독 기능을 수행했지만, 실질적인 강제력은 없었습니다. 위임통치국들은 연례 보고서를 제출하고 심사를 받았지만, 위원회의 권고를 무시해도 별다른 제재가 없었습니다.
9-2. 반사실적 질문: 위임통치 없이 중동은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서 ‘만약에’는 학술적으로 엄밀하지 않지만, 사고 실험으로서의 가치는 있습니다. 만약 위임통치가 없었다면 중동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의 가능성은 파이살의 아랍 왕국이 존속하여 대시리아(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 요르단)가 하나의 국가로 발전하는 시나리오입니다. 이 경우 레바논의 종파 분쟁이나 팔레스타인 분쟁의 양상은 상당히 달랐을 수 있습니다. 다만, 대시리아 내부의 민족·종교적 다양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므로, 또 다른 형태의 내적 갈등이 발생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쿠르드 독립 국가가 세브르 조약대로 수립되는 시나리오입니다. 이 경우 쿠르드족의 100년 독립 투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라크와 시리아, 튀르키예의 내적 역학도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반사실적 시나리오들은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 분명한 것은, 위임통치가 만든 현실의 국경선은 10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중동 정치의 기본 프레임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국경선 안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국가적 정체성을 발전시켜왔기에, 이제 이 국경을 바꾸는 것은 또 다른 거대한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위임통치의 유산은 그래서 더욱 비극적입니다 — 잘못된 출발점에서 시작되었지만,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9-3. 교훈과 성찰
위임통치 시대의 역사는 여러 가지 교훈을 제공합니다.
첫째, 외부 세력이 그은 국경은 장기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것입니다. 해당 지역 주민들의 역사적·문화적·종교적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 국경은 끊임없이 도전받게 됩니다. 국경이 정당성을 획득하려면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둘째, ‘분할 통치’는 단기적으로는 효과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파괴적이라는 것입니다. 프랑스와 영국이 종파·민족 차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은 통치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지만, 그 결과로 종파주의가 정치의 핵심 축으로 고착되어 오늘날까지 해당 국가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셋째, 국제 규범과 실제 행동의 괴리에 대한 경고입니다. 위임통치는 민족자결과 독립 지원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식민지배의 연장이었습니다. 고상한 원칙이 강대국의 이익 추구를 위한 수사적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위임통치의 역사는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넷째, 역사적 결정의 장기적 파급력에 대한 인식입니다. 1920년대에 내려진 결정들 — 이라크의 국경, 레바논의 창설,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의 조건 — 이 100년 뒤에도 수백만 명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는 정치적 결정, 특히 국경과 정치 체제에 관한 결정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결론 — 지도 위의 선, 삶 위의 상처
위임통치 시대는 중동 현대사의 ‘원죄(original sin)’라 불리기도 합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자(尺)와 연필로 그은 국경선은, 그 선 위에 살고 있던 수천만 명의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탄생한 국가들은 태생적으로 내적 정당성의 결핍을 안고 출발했고, 이 결핍은 1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중동의 정치적 불안정의 근본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위임통치의 국경선만이 중동의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입니다. 독립 이후 각국의 지도자들의 선택, 냉전의 영향, 석유 정치, 이슬람주의의 부상 등 수많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왔습니다. 하지만 위임통치가 만든 구조적 틀 — 인위적 국경, 종파 기반 정치, 소수파 지배 구조 — 이 이후의 모든 정치적 발전의 기본 무대를 설정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지난 42화에서 사이크스-피코 협정과 밸푸어 선언이라는 ‘설계도’를 살펴보았다면, 이번 43화에서는 그 설계도가 어떻게 현실의 국가로 구현되었는지를 추적해보았습니다. 종이 위의 선이 어떻게 현실의 국경이 되고, 그 국경이 어떻게 민족을 나누고, 종파를 정치화하고, 갈등의 구조를 만들어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44화에서는 이 위임통치의 유산이 가장 폭발적으로 표출된 사건 — 이스라엘의 건국과 그에 따른 첫 번째 중동전쟁, 그리고 팔레스타인 난민의 탄생 — 을 다루겠습니다. 밸푸어 선언과 위임통치가 뿌린 씨앗이 어떻게 20세기 가장 길고 복잡한 분쟁으로 성장했는지, 그 첫 번째 장을 함께 펼쳐보겠습니다.
이미지는 Leonardo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이미지는 Claude AI 로 생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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